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밤의 시간이 필요하다 (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51
조회
289

신종환/ 청년 칼럼니스트


‘헬조센’. 지옥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헬’(Hell)과 조선의 일본식 발음인 ‘조센’의 합성어인 이 말이 요즘 자주 쓰이고 있다. ‘헬조선’이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굳이 비하의 뉘앙스가 강한 ‘조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일제치하 시기와 비교하여 나아진 것도, 나아질 것도 없다’는 고단하고 자조적인 마음을 담은 것으로 읽힌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교를 맴돌다 보면 모두에게 평등한 건 고단함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직한 선배는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에 퇴근한다며 하소연 한다. 취업준비 중인 친구는 도서관 개관 시간인 오전 6시에 등교해서 자정에 도서관을 떠난다. 이런 삶 속에서 북한의 준전시태세, 선거개혁, 교수의 총장 간선제를 반대하며 투신한 부산대 교수 등의 얘기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일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일을 주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생존을 위해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시간을 쓴다. 사회의 요구는 취업에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시간을 쓰라는 것이다. 취업을 위한 공부로 쓰이는 시간은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고 제대로 습득했는지 확인하는 반복노동의 시간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 현실에서는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볼 수 없다. 물론 여러 경로에서 접하는 정보를 접하고 세계를 전망하는 일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특정 관점을 가진 정보들을 수용하면서 이를 곱씹을 시간이 없다면 그 정보에 내재된 관점을 내면화하기 쉽다. 이는 나아가 자신에게 무엇이 좋고 좋지 않은지를 질문하기도 답하기도 어렵게 한다.


앞서 말한 헬조센 같은 표현을 자기 시간이 없는 청년의 차원에서 보면 표현의 등장 배경이 조금은 이해된다. 생각하는 것도,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공유할 수 있는 건 고통, 회의 두려움 같은 심리적 감각이다. 헬조센은 그런 심리적 각각을 표현하며 비관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단어이다. 그 바람은 어디서부터 이뤄나가야 하는 걸까.


20150916web02.jpg고흐- '불가에 앉아 책 읽는 농부' (1881)
사진 출처 - 중앙일보


꼭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예전부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사수해온 것이 지금 청년들에게도 필요하다고는 할 수 있다. 다른 사회적 요구나 소용을 위해서 쓰이지 않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밤의 시간. 자기를 생각하는 밤은 스스로를 자각하고 규정하고 이를 표현하는 언어가 생기는 토대가 된다. 밤의 시간을 가진 사람들이 늘면 부조리한 구조에 저항할 수도 있고, 개인으로서는 스스로에게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가치를 세울 수 있다. 이렇게 뿌리가 내리면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고 수위 높은 사회의 요구와 비난에서 덜 흔들릴 수 있다.


하루가 늘 모자란 사람들에게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사수하기란 어렵다. 막상 어렵사리 사수하더라도, 고되게 살다보면 지켜낸 밤이 하잘 것 없어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자기 좌표를 알기 위해서 밤은 필요하다. 산업 혁명 당시에 영국의 노동자들에게도 그랬고, 평화시장의 전태일에게도 그랬다. 그들에게 힘이 되었던 밤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신종환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9월 2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