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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위악한 아이들 (안상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46
조회
319

안상현/ 청년 칼럼니스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반말에 욕도 한다. 목소리는 또 왜 그리 우렁찬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내버려두면 일이 터진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게 이렇게 고된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한 가족캠프에서 운영요원으로 있을 당시 이야기다. 캠프에는 말썽꾸러기가 유독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잘 따라주는 몇몇 얌전한 아이들이 유달리 예뻐 보였다. 운영회의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1회 캠프는 70%가 차상위계층 가정이라 애들이 좀 거칠었을 거예요. 그래도 2회부터는 일반가정이 대부분이니까 분위기도 다르고 일하기 좀 더 수월할 겁니다.”


회의 때 캠프운영실장에게 들은 말이다. 편견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개연성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르던 배경을 알게 된 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굳이 명단을 보지 않아도 누가 취약계층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는 이가 모두 썩어 검은 입을 갖고 있었고 치통 때문에 캠프 프로그램에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단 앞에서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낑낑대던 모녀도 있었다. 가방을 들어드리려 다가갔을 때, 아이의 어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도움을 거절하진 않았지만 내려가는 내내 어머니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불신하는 건가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운영요원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3일간 함께한 만큼 낯선 사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가방을 잡은 채로 어정쩡하게 내려갔다. 내려오는 도중 모녀의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엄마는 사모님이 바로 출근하라고 하셔서 내일 같이 못 있어줄 거 같아. 미안해...”
“괜찮아~ 엄마.”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짐짓 쾌활한 척 답하는 아이의 모습이 더 이상 말썽꾸러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아마 가사도우미 일을 하시는 듯했다. 낡은 등산조끼를 걸친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가방 손잡이를 놓지 못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사소한 도움마저 받아본 경험이 적었던 것이리라.


20150826web01.jpg위선(僞善)과 위악(僞惡)
사진 출처 - 네이버 카페


그 후 악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떤 상처처럼 느껴졌다. 예외인 아이들도 있었지만 캠프 안에서만큼은 집안 형편에 따른 아이들의 태도 차이가 쉽게 구분됐다. 슬러시를 먹기 위해 줄을 설 때도 줄을 지키는 아이들과 새치기 하는 아이들의 그룹은 비례했다. 슬러시가 다 떨어졌다고 하면 쉽게 수긍하고 돌아가는 아이와 왜 없냐며 따지고 매달리는 아이도 비슷하게 나눠졌다. 가난이 미치는 영향이 어디까지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부모 수준에 비례하는 자녀의 교육수준이나 직업, 소득수준 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소득불평등이 기회불균등을 야기한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패러다임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빈곤은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것들을 대물림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런 아이의 성격과 태도가 빈곤의 작품이라면 기회의 균등은 무의미다. 기회의 유무를 넘어 기회를 대하는 모습마저 결정돼 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캠프에서 겪은 일들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부인할 수 없는 근거들이 많다. 빈곤과 아동 발달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논문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지난달 미국의학협회저널 소아과학(JAMA Pediatrics)에는 가족의 빈곤이 아동의 두뇌 발달과 학업 성취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논문이 실렸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빈곤층 자녀들의 회백질은 또래 평균보다 8~10% 적었다. 회백질은 대뇌 신경세포가 모이는 부분으로, 적은 부위가 마침 행동과 학습을 담당하는 전두엽과 측두엽이었다. 작년 1월에 나온 미국 교육학자 찰스 넬슨의 연구논문도 비슷한 결과를 시사한다. 빈곤이 아이들의 가능성마저 오염시키는 ‘원죄’가 되어가고 있다.


“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저서 <담론>(돌베개)에 나오는 글귀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명예를 얻고자 한다. 위선이다. 반면 약자는 약하다는 걸 들킬까봐 거친 모습으로 자신을 가린다. 취약계층 아이들이 그렇다. 그들의 성격이 거칠다 해도 그건 보이는 것일 뿐 본질이 아니다. 아이들은 악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빈곤에 의해, 그리고 자신들의 빈곤을 감추기 위해 위악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안상현씨는 다문화 사회에 관심을 갖고 문제점을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2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