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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여성이 관계에 복무하는 사회 (박선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6-07 15:09
조회
1691

박선영/ 회원 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중3 아들과 중1 딸의 엄마인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잘 도와주고, 마음도 잘 이해해주는 딸이 너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의 온 신경이 아들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는 일,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 식사를 챙기는 일, 전화로 계속 아들의 스케줄과 상태를 확인하는 일, 심지어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아들의 짜증을 받아주는 일까지 그는 기꺼이 해내고 있었다. 딸도 오빠보다 자신이 소홀히 여겨지는 것에 대해 매번 서운함을 토로한다고 했다. 그래도 딸은 엄마를 배려하고 기다려주니까, 이것저것 요구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아들이 더 눈에 밟히는 것이다.


  딸의 역할은 교실에서도 이어지는 듯하다. 타인을 잘 배려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는 교사들의 대화에서 매년 되풀이 된다. 교사의 일을 잘 도와주고 무슨 일이든 시키면 똑 부러지게 해내는 여자 아이들. 관심 없는 남자 아이들과는 달리, 지치고 힘든 교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아는 여자 아이들. 이런 사례들이 매년 쌓이고 쌓여서 ‘여자 아이는 관계 지향적’이라는 교사의 믿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이 관계 지향적이어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자 아이들은 고학년쯤 되면 친한 친구끼리만 무리지어 다니고, 교실에는 그 무리가 서로 견제하는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 간의 관계 지형도는 시시각각 변하기도 해서 교사가 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3년 간 6학년을 맡으면서 여자 아이들 간의 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특히 교사 앞에서는 한없이 착한 여자 아이들이 SNS 같이 교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들은 너무 낯설고 충격적이다. 여자 아이들 간의 이러한 ‘관계 갈등’은 복잡하고 애매해서 교사를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교사는 또다시 ‘여자는 관계적 동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얼마 전에 어느 교대의 실습 교재 일부를 보게 되었다. 아동 발달에 있어 놀이의 중요성을 서술한 부분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여자 아이의 관계 지향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숙련된 기능이 필요하고, 규칙이 있는 경쟁적인 놀이를 통해 독립심과 집단 활동에 필요한 조직력 등을 배움으로써 직업 세계에서의 성공을 준비한다’, ‘반면 여아는 인간관계가 발달하며 이는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양육자 역할과 가정의 사적 생활을 위한 준비를 돕는다’, ‘결국 놀이에서 남아는 경쟁을 중시하고, 여아는 관계를 중시하는 데 따라 세상을 보고 사는 것도 달라진다.’ 2018년의 예비 교사들도 여자에게는 관계를 민감하게 돌보는 능력이 있으며, 이에 따라 여자와 남자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배운다.


 이쯤 되면 ‘관계 지향성’은 여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여남의 생물학적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고, 여성의 타고난 특성인 것일까? 아직도 이러한 논리가 통하나 싶다. 성평등 교육이 의무화 되어 있고, ‘성 역할 고정관념’, ‘젠더’ 등의 말이 흔히 통용되는 시대에 말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굳어진 이 생각은 우리에게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여성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결론을 귀납적으로 도출하기 위한 사례와 경험들을 모아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고도 놓치는 혹은 무시하는 반례들 또한 너무 많다. 다양한 개인은 예외가 되어 지워지고, ‘확증 편향’을 통해 여성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믿음은 더욱 강화된다.


사진 출처 - 텀블벅


 성 역할의 ‘역할’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여성 또는 남성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고 있다. 1990년에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출간하면서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젠더 수행성은 젠더가 고정된 본질적 정체성이 아니라, 규범에 따르는 행위와 습관의 반복 그 자체임을 뜻하는 개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여성이 관계에 복무하도록 만들어 왔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결국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서 언급했던 어느 교대의 실습 교재에서 찾을 수 있다.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양육자 역할과 가정의 사적 생활’, 바로 이것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성, 어린 여자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여자는 딸로서 어머니를 도우며 돌봄과 집안 살림 등의 역할을 보조해야 한다.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관계를 챙겨야 한다. 이러한 여자의 행동 특성은 결혼 상대를 찾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조건이 된다. 그렇게 결혼한 여자는 또다시 가족 구성원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관계를 잘 보살피지 않거나 자기 것을 잘 챙기는 여성,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이 가족 관계나 연애 관계, 혼인 관계 등에서 ‘실패’하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여전히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다양한 장벽들이 존재하며, 여성의 노동에는 남성의 노동과는 다른 가치가 매겨진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관계일지라도 그로부터 벗어나 자립하기 어렵다. 이는 모두 여성을 사적 영역으로 몰아넣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관계에 종속된다. 여성이 이와 같은 삶을 살 때 이익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모든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관계맺음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만 노력이 강요될 때, 관계의 평등은 깨진다. 어떤 특정 인간 집단이 관계에서 희생해야 하는 구조가 있다면 그것이 ‘차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여남의 성차 문제로 환원하려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이 각자 갖고 있는 차이가 이러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이 모든 관계를 끊고 살아야 한다거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이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친절하지 않아도,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웃지 않아도, 아이보다 내 삶을 더 중시해도, 엄마 같은 누나가 아니어도, 가족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친구의 부탁을 거절해도 괜찮다. 여성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관계가 많아질수록 성평등한 사회는 가까워진다.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