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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창용, 김치열, 이현종, 이희수, 정진이, 홍세화, 황은성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선생님이 고마워 (황은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0-25 14:06
조회
35

황은성/ 회원 칼럼니스트


아이들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떤 시대적 참사에 대한 진실규명과 청소년의 자율권을 호소하며 서명 부스를 운영하던 아이들을 낯설고 어색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녹아들지 못하고 무르춤히 서 있는 나를,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불렀다. 나는 그대로 얼어버린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상상해보지 못한 탓이다.


좀 오버 같지만 나는 정말 그랬다. 어렸을 때 나는 꼴통으로 불렸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데 자기주장은 강해서 그랬던 것 같다. 공부와 거리가 멀어진 건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좋지 못한 교우관계 때문이었다고, 자기주장이 강해진 건 반복된 폭력에 억압된 마음의 해소를 위한 사소한 저항이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개인의 사정까지 알 바 없는 어른들은 그저 날 ‘꼴통’이나 ‘구제불능’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불리었다. 나는 정말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소리 듣다 보면 정말 나 자신이 그런가 생각하게 됐으니까. 반복된 의심은 확신을 부르니까. 나조차도 꼴통 소리를 듣는 내가 꼴통인 것 같았고, 꼴통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날 아이들은 처음 보는 나를 당연한 듯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이 ‘선생님’ 이라고 부르면 목덜미까지 붉어진 채로, 그 모습을 숨기려고 노력하며 짐짓 대수롭지 않게 “응?”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실은 맥이 다 빠질 만큼 힘들었다. 고졸 출신에 청바지, 나이키 운동화, 편한 점퍼 차림을 한 선생님은 교단에서 본 적 없었고, 내 스스로가 인격적으로 그만큼 성숙하지 못하다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명의 화음이 화랑유원지에서 울려 퍼지던 행사가 있던 날, 리더인 아이를 곁에 앉혀두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부담스러우니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줘.” 내 말에 아이가 외려 웃으면서 물었다. “그럼 선생님을 선생님 말고 뭐라고 불러야 해요?” 생각해본 적 없던 질문이 난감하기만 했다. 해맑게 웃으면서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니 어쩐지 더 저항할 수 없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말했지만 계속 속으로 끙끙 앓았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그런 사람 아니니까, 그런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그 뒤로도 아이들을 만나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게 늘 힘들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말을 하겠지만 정말 그랬다. 선생님이라는 한 단어가 특별한 노력 없이 그저 얻을 수 있는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나 자신의 어딜 들여다봐도 자격 미달이었다. 옷차림만 봐도, 학벌만 봐도, 장난기 많은 성격만 봐도. 덕택에 괴리감이 날로 깊어졌다. 한편 그것들을 그다지 바꾸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바꾸기 싫다며 떼를 쓰는 아이와 뭐가 다를까.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참다 못한 나는 말했다. 평가회의 내내 ‘쌤쌤쌤’하고 나를 장난스럽게 부르던 아이들에게. “부탁이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줘.” 행사 소감을 간단히 나누고 서로의 근황을 나누다 어떤 설명도 없이. 무안함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들릴랑 말랑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부끄럽게도 몹시 진지하게. 뜬금없는 내 말에 떡볶이를 먹던 아이들은 나보다 배는 당황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이들은 난처하게 웃으면서 “알겠다”고 답했다.


그다음 모임부터 아이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내 눈치를 봐가면서 ‘저기’라고 부르거나 손짓하며 ‘여기요’라고 불렀다. “저기 건의할 게 있는데요. 여기요, 할 말 있대요.” 그 역시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나는 자격 미달의 선생님보다는 그 호칭이 낫다고 생각했고, 왠지 눈치 없이 상심한 마음을 품고 있는 스스로에게는 ‘내게는 이 정도가 딱 맞아’라는 위안을 건넸는데……. 그렇게 다음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아이들에게 문자 몇 통을 받았다.


아이들이 보낸 문자의 내용은 간단했다. “선생님이 ‘내가 진정한 쌤이 아닌데 무슨 쌤이냐’고 말해도 선생님은 선생님이예요.” 그러면서 이상하다고 말했다. 자신을 포함해 네트워크 친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연대에 어떤 활동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자기들을 보필하는데 어째서 선생님이 아니냐고. 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냐고. 선생님은 모든 일을 열심히 하고, 또 어떤 의견이든 자기보다 우리들의 의견을 먼저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걸 아는데. 왜 우리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너무 이상하다고. 눈치 보게 된다고. 우리들 생각엔 내게 자존감이 너무 낮은 것 같으니, 우리들이 내 자존감을 높여주겠다고. 너무 고민하지 말라고, 쌤은 생각이 너무 많다고. 자신들을 그대로 바라보는 선생님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자신들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선생님이야 말로 진정한 선생님이라고.


집으로 돌아와 많은 것을 생각했다. 아이들의 문자는 내 생각과 삶을 전반적으로 되짚어보게 했다. 연대의 활동가가 되고 싶어 했던 이유와 청소년 사업에 자꾸 욕심을 내고 열정을 가지는 이유까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청소년기에 내게 생겨났던 결여를 메우고 싶었던 거였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아름답게 꽃 피웠으면 좋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이없는 모순에 웃음이 픽 나왔다. 아이들의 말이 맞았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미달’과 ‘자격지심’은 꼴통 소리를 듣던 어린 시절 이후 스스로가 내게 짊어지운 맹신이었다. 아이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듣고 싶어 하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다니.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다니. 더 나은 사회와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니. 어쩐지 눈물이 나와서. 나는 그날 밤 맥주를 몇 캔 마시며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아이들은 나를 ‘은성쌤’이나 ‘쌤’이라고 부른다. 연대에 상근한 지 7개월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도 그 호칭이 부담스럽고 낯설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 너무 좋다. 마치 진짜 선생님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희들이랑 있으면 내가 마치 선생님이 된 것 같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다시 말한다. 오글거린다고. 앞으로도 신세질 테니까 미리 고맙다고. 그때 마다 나는 낯이 뜨거워져 그저 웃고 말았지만……사실.



사진 출처 - 필자


사실 꼭 말하고 싶었다.


나야말로 너희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청소년 참정권을 위해서 피켓을 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너희들을 보면서. 이제는 지겹다며 마주해야 할 사회적 참사를 불행이라 부르며 회피하는 어른들과 시대 사이에서 노란 리본을 달고 팔찌를 차는 너희들을 보면서. 나이와 학업 성적,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거친 비난 없이 포옹하는 자세로 경청하는 너희들을 보면서. 더 나은 내일을 꽃피우기 위해서 시험 기간에도, 주말에도 시간을 내는 너희들을 보면서. 이 못난 사회 초년생을 믿고 의지하며 좋은 사람이라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너희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너희들 덕분에 내가 더 나은 사람이,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고.


그러니까 나야말로 고맙다고. 선생님이 고맙다는 너희에게 외려 선생님이 고맙다고. 내가 너희의 선생님이 아니라, 너희들이야말로 나의 참된 스승이자 선생님이라고. 그 옛날 나를 무심히 상처주던 그들이 선생님이 아니라. 너희야말로 내 참된 스승이라고. 그래서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


황은성 : 동시대인이 되고 싶은 불효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