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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임영훈)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3-15 11:15
조회
1153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3·1운동 100주년이 대대적인 기념행사와 함께 지나갔다. 백세까지 바라보시는, 가족 중 가장 장수하시는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일제시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다. 구순이 넘으셨고, 1929년생이시니 광복이 되던 1945년에는 만 16살이셨다.


  최근 2-3년 사이로 동생들이 결혼하면서 집안에 처음으로 며느리라는 여자 사람이 생겼다. 명절 등 모일 일이 있을 때마다 만나지만, 며느리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까워지긴 힘드니 할머니의 대화 상대가 전보다 늘어나지는 않았다.


  작년인가 할머니께서 마루에 가족들이 있을 때 혼잣말하시듯 입을 여신 적이 있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게 종일 집안일, 애 키우며 살다 보면 40 정도에는완전히 폭삭 늙어서 말 그대로 할머니가 됐어...” 여럿이 있으니 애매했지만 아무래도 눈 앞에 있는 손주 며느리한테 하신 말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제수씨는 못 들었는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원래 하던 일을 하며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런 말들이 요새 사람들에게는 무척 듣기 싫은 말이었을 것이다. 나도 오래전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는 아주 가끔 듣던 옛날 얘기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래 동화 속의 타령들로 여겨졌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돌 때 돌아가셨으니, 품 안의 그 애기에게 뭐라고 하셨을지는 짐작만 할 뿐이다.


  하여튼 그러고 보면 이해도 된다. 아버지, 어머니가 '옛날에는 말이지,' 이렇게 얘기만 꺼내도 '벌써 잔소리 듣겠구나'하는 생각에 귀가 무거워지는데 무려 두 세대 이전인 할머니, 그것도 평생 모르고 살던 시댁 할머니께서 옛날 얘기를 하시면 누가 듣고 싶겠나 싶다.


  다만 어릴 때부터 출근하시는 어머니 대신 나와 동생들, 더하여 사촌들까지 도맡다시피 있는 정 없는 정 다 쏟아 부어 키우시고 심지어 몸이 많이 불편해지신 아직까지도 내리 사랑을 매일같이 보여주시는 할머니시기에 가끔씩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의 사소한 말이라도 무심코 지나치는 느낌이면 마음이 아프다. 평생 고생만 하신 할머니께는 응당 공경과 보답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주말에 찾아 뵈면 나는 식탁 근처에 도와드리러 가도 쉬라고 하시면서 뭐라도 더 먹고 입게 하실 생각에 마음과 몸이 바쁘시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셨다. 그 옛날에 학교를 졸업한 사람 자체가 귀했을 것이고, 졸업 후에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그 때 우체국에서 당시 육군 장교셨던 할아버지의 눈에 띄어 혼사까지 이르게 되셨다고 한다. “너희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시고는 마음에 드셨는지 저 처자가 뉘 집 딸인지 알아봤단다!” 이 얘기를 하실 때의 할머니 얼굴은, 만면에 퍼지는 흐뭇한 미소가 내 마음도 무척 밝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여성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에 대해서도 가끔 얘기하신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며느리로 살기가 너무나 고달팠다. 같은 동네에서 어느 집 새댁이 두부를 부치다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죽었다. 두부가 귀해서 힘들게 부쳐 봤자 자기는 먹을 수가 없으니, 내가기 전에 얼른 하나 삼키려다가 그 뜨거운 것이 그만 목구멍을 막았다지 뭐냐…” 이 얘기는 아마 열 살 때쯤 처음 들었다. 이 말을 들을 때 내가 느꼈던 비애와 비통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과 맞물려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는데도 이 얘기를 다시 떠올리면 당시 여성들의 삶이 사무치게 안쓰러워 공감이 되다 못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남성, 여성과는 상관없이 배고팠던 시절의 어려움도 가끔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드라마를 같이 볼 때였는데, 전쟁 통에 군인들이 민가로 들어가 밥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없이 부엌에 몰래 들어가 솥에서 밥을 퍼 먹으려다 배가 너무나 고픈 나머지 급하게 손으로 허겁지겁 집는 통에 시커먼 옛날 부엌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드라마 속 군인들은 그걸 도로 손으로 밥풀까지 주워서 허겁지겁 먹었다. “예전에는 저렇게 배가 고팠다. 다들 살기가 너무나 어려웠어.” 하면서 안쓰럽게 혀를 끌끌 차시던 할머니, 그 표정까지 생생하다.


  할머니의 삶 자체가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제시대를 관통하며 지내신 어린 시절, 해방과 함께 끝났을 학창시절, 짧게 우체국에서 일하셨던 시절과 이른 나이에 결혼해 네 명의 아이와 열 명 가까운 손주를 수십년 동안 키워 내신 할머니의 삶. 아직까지 혼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 사진작가 최민식


  어머니, 그리고 외삼촌들과 이모는 할머니의 희생으로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을 나와서 번듯한 직장을 얻으셨다. 고도 성장기와 더불어 다들 20대에 결혼하셔서 아들 딸 낳고, 시집, 장가까지 보낸 뒤 노년을 바라보고 계신다. 어머니만 생각해보면, 중고교 시절부터 서울에서 유학하고 대학까지 나오셨다. 가끔 내가 현대식 교육의 근거 없는 우월감, 박정희 시대의 옛날식 교육을 받으셨다는 편견으로 어머니를 무시하려 해도 쉽게 제압당하지 않으신다. 반면 할머니는 가끔 종이에 뭔가 써서 보여주실 때, 한글 문법이나 맞춤법에 자신 없어 하시는 듯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역사의 깊은 질곡만큼, 한 세대차이지만 그분들의 세대는 나에게는 그만큼 대비된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많은 교육을 받으신 편이지만, 지금 기준으로 할머니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셨다. 구순에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매일 이런저런 일을 하실 만큼 성실하신 할머니가 공부를 원없이 하셨다면 얼마나 잘 하셨을까. 그런 할머니의 희생을 바탕으로 대학까지 나와 남부럽지 않게 사는 다른 가족들과 나를 생각해보면 이게 과연 당연한 나의 권리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뭔가 허전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때로는 조금 다른 생각도 한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시고, 책을 많이 보셔서 생각이 많으신 어머니, 또 비슷한 걸 공부하고 (문과대학 다녔으니) 역시나 (책은 안 봤지만) 신문 잡지를 하도 봐서 잡생각에 하루가 다 가는 나, 이런 사람들, 소위 먹물이라는 사람들이 과연 할머니보다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평생 희생하신 것만 같지만, 가족들로부터 항상 감사와 공경, 사랑을 받으셨고, 아직은 건강하셨던 환갑 즈음에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부채춤도 배워서 공연도 하셨었다. 평생 헌신 하셨기에,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일구실 수 있었고 가끔은 작은 여유나 문화 생활도 덤으로 여성적인 취미로 가지실 수 있었다. 다만 현대 여성들처럼 스키도 타고, 스쿠바 다이빙을 하는 등의 전폭적 자유는 동시대 남성들에게도 쉽지 않았듯 할머니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10년 넘은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DJ의 첫 정권 교체 이후 노무현 후보가 혜성 같이 나타났던 시절, 할머니는 대법관 출신 이회창 후보한테 호감을 보이셨다. 서울 살이 한 지 오래 되셨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은 오롯이 호남에서 보내신 할머니의 선택은 나로서는 의외였다. 화려한 대법관과 총리 경력을 자랑하는 이 후보가 안정감 있게 국정을 수행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던 할머니, 나는 그 말이 또렷이 기억난다. 오히려 당시 젊은 층에 지역 감정이 더한 것만 같아 속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 당시의 소회를 짧게 적은 것도 같다. 하긴 할머니는 일제 시대는 적어도 안정적이었고, 일본 사람들은 적어도 원칙이 있었다는, 그런 말도 하셨었다. 구한말 이후의 삶을 사셨으니, 할머니가 일제 시대와 비교하시는 것은 해방 후의 혼란상일 것이다. 극심한 혼란과 난리 (6/25), 이런 시기가 일제 시대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살기 좋았을 리가 없다. 그 때 그 시절을 살아 보신 분의 말씀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분단으로 내몬 외세의 폭압과 망동 탓이겠지만 한국전쟁 후의 참상이야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일제 시대에도 그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것을 ‘가정 교육’으로 알게 된 계기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설이나 주장들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었기에 그 한 마디는 있는 그대로 와 닿았었다.


  할머니는 자본주의, 공산주의에도 관심이 없으시고 당연히 페미니즘이나 마초이즘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으시다. 아마 시간이 주어져도 관심을 갖고 싶어하지도, 고민할 이유도 찾지 못하실 것이다. 이 점이 과연 할머니의 결핍이나 부재일까? 아직도 누군가의 삶을 이래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나는 이렇게 깨이고 배운 사람이니 못 배운 사람들을 계몽하려는 교조주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 오히려 강압적이고 탄압적인 사람들은 아닐까? 이제, 너무나 많은 생각들과 주장들에 지친 나는 이런 생각에 머문다.


임영훈: 미국에 실을 팔고 있습니다. 가끔 천도 팔지만 어떻게 해야 팔리는지는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