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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박선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2-31 17:18
조회
1001

박선영 / 회원칼럼니스트


 아직도 어떤 장면이 눈에 선하다. 길목에 널브러져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수많은 아기 돼지들과 한 손에 망치를 들고 그 사이를 걸어가며 돼지의 머리를 내리치는 노동자의 뒷모습이. 얼마 전에 경남 사천의 한 축산 돼지 농장에서 아기 돼지를 망치로 때려죽이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2만 마리 규모의 돼지를 사육하여 도축하는 전형적인 공장식 축산 농장이었다. 그 농장에서는 아기 돼지들을 임의 선별하여 비숙련자로 하여금 잔인하게 때려죽이게 하고 있었다. 느리게 자라거나 아파서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잔인무도한 살해의 이유였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자연과 동물을 더 잘 이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를 놀랍도록 발전시켜왔다. 동물을 인간에게 종속시키는 철학적 논리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이원론은 육체와 정신을 서로 대립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쪼개는 것이고, 나아가 그 둘 사이에 위계를 설정해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신을 제외하면 정신의 대표자는 인간이고, 물질적인 것의 대표는 자연이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억압과 착취만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약자에게로 향하는 모든 폭력과 지배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다.


 에코페미니스트인 발 플럼우드는 이원론을 통해서 특정한 인간 집단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논리적 장치를 분석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무가치화되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동물의 재생산 노동이나 사육, 도살 과정은 의도적으로 감춰지고, 우리는 동물로부터 얻은 생산물을 부채감 없이 소비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본능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동물적인 열등한 속성을 가진 것으로 정형화된다. 여성은 감성적이고 임신, 출산 기능을 갖고 있음에 따라 모성애가 있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서의 노동에 적합하다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논리이다. 이렇게 권력을 가진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여 특정 집단을 사회의 중요한 영역과 결정과정에서 배제하고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 - 걷는사람


 인간은 삶의 전 과정에서 이러한 지배 논리와 구조를 맹신하고 이것에 공모하도록 지속적으로 주입 당해왔다. 오래 전에 동물, 유색인종,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상황과 조건은 지금보다 훨씬 처참했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적으로 이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 계속 향상되었다. 이때 인간의 경직된 사고와 감정을 유연하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이야기’이다. <무민은 채식주의자>의 단편 소설들은 인간과 동물이 교감한다는 것을 넘어 인간과 동물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터에서 탱크 폭발 작전에 이용되는 개를 훈련시키던 사람, 동물 보호소에서 버려진 반려동물들을 안락사시키는 일을 하던 수의사, 구제역 살처분에 참여했던 사람. 이들은 소설 속에서 극심한 슬픔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야기’는 나와 상관없는 존재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문학과 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물론 인간의 공감 능력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감 능력은 단순히 ‘착하고 배려하는’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들을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구조를 이해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한 움직임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더 많은 존재들을 연결시켜 주길 기대한다.



사진출처 - 걷는사람


 그래서 내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냐고? 아니다. 어제의 나는 카레집에서 수많은 토핑 중에 돈까스를 선택했다. 오늘의 나는 요즘 즐겨보는 <밥블레스유>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출연진들이 새끼 돼지로 만든 ‘애저’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나도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질문에 ‘아직’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여전히 돈까스 카레를 맛있게 먹는 나이지만, 이런 내가 <무민은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동물의 죽음 앞에서 펑펑 울기도 한다. 아기 돼지를 망치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구조에 분노하기도 한다. 비인간 존재와 나와 다른 인간 존재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기에 나도 언젠가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