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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완전무결하게 다하여 놓은 것은 어디 있느냐(조소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2-19 17:44
조회
365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 한겨레


 세 명의 여성이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 사진은 1920년대 지식인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속의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가 당시 여성 지식인 중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고 여성단발운동을 적극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러 신문사가 취재했고, 위 사진이 보도된 후 거센 비난을 받았다. 단발운동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심하던 당시 허정숙이 <<신여성>> 잡지와 <<동아일보>>에 여러 칼럼을 기고했는데, 이를 엮은 책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가 최근 발간되었다.


 허정숙의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에서 당시 단발운동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관계를 느낄 수 있다. 단발운동을 비난하던 어떤 기사에서는 신여성들을 “불완전한 준인간”에 비유하고 “미성품”이라고 표현한다. “신여성의 우대를 받는 것만큼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느냐”, “책임을 깨닫고 동시에 철저한 실행이 있느냐”며 여성운동을 하는 ‘신여성’에게만 엄격한 책임감의 잣대를 부여하고, 운동의 크고 작은 실패에 대해서 ‘철저한 실행’이 없다며 맹렬히 공격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 쓰인 허정숙의 칼럼은 약 100년이 흐른 지금의 페미니즘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글에 나오는 갈등은 최근 한국에서의 페미니스트 운동을 둘러싼 격한 갈등과 겹치는 점이 많다.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며 여자도 군대나 갔다 와라’는 반박이나, 혜화역 시위에서의 일부 극단적 행위를 빌미로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글, 상의탈의 시위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며 ‘관종’이냐는 반응들. 이렇게 비현실적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완전무결 흠잡을 데 없는 ‘보기 좋은’ 사회운동을 요구하는 여론은 단지 단발운동이나 지금의 페미니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 많은 시민운동이 겪어왔던 반응이다.


 예컨대 1960년대의 미국 시민권 운동을 떠올려보자. 미국 시민권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인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사상이 강조되곤 한다. 그 바람에 1960년대의 흑인인권을 위한 시위들이 언제나 평화로웠던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그가 주도한 시위들에서도 격한 육체적 충돌과 소동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흑인인권운동의 반대세력 중에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물론 있었지만 주로 대결해야 했던 상대는 인종차별을 타파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공감하면서도 운동은 지지하지 않는 많은 백인 온건주의자들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1963년 “버밍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흑인인권운동을 통해 자유를 찾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백인시민위원회도, 쿠 클럭스 클랜(KKK)도 아니다. 바로 정의보다는 질서를 선택한 온건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정의가 구현되는 적극적 평화보다 갈등이 없는 소극적 평화를 선호한다. 그들은 ”너희들 취지는 알겠으나, 시위라는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대부분이 진심으로 성차별을 경멸한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를 지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혜화역 시위에서의 문구는 너무 극단적이었다고 말한다. 상의 탈의 운동은 보기에 흉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사회를 바꿔온 시민운동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미국 시민권 운동에서부터 여성 투표권 운동, 그리고 동성혼 합법화 운동까지 우리가 바라는 얌전하기만 한 운동은 없었다.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시민운동의 바로 그런 면이 주위를 환기시키고 인식을 변화시킴으로써 결국엔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혜화역 시위 중의 일부 위법한 일탈행동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완벽한 시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스트 운동 자체를 계속 부정한다면, 더운 날씨에 몇 시간씩 피켓을 들고 평화롭게 시위하던 2만 명이 넘는 시위자들의 의지는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시위로까지 뛰쳐나오게 한 장시간 쌓여온 부정의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양성평등을 원하지만 탈코르셋 운동과 상의탈의시위는 왠지 과하다고 느껴지고, 몰카는 나쁘지만 혜화역 시위는 너무 격하다고 하는 우리들 스스로에게 허정숙의 글을 빌어 반문하고 싶다. “우리들이 완전무결하게 다하여 놓은 것은 어디 있느냐” 라고.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