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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아. (황은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8-26 13:57
조회
832

황은성/ 회원 칼럼니스트


 다리를 다쳤다. 무릎 뼈 복합골절에 전치8주 상해였다.


 빗길에 미끄러진 것 치고는 큰 불운이었다. 곧장 병원에 입원한 다음 관절 경으로 연골 안에 부서진 뼛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의사는 수술경과가 좋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한 달 동안 걷지 못할 것이고 그 이후에도 몇 달 정도 목발을 짚고 다녀야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의사에게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알았다’고 말했다. 불편해봐야 얼마나 불편하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걷지 못한다는 사실은 내 생각보다 불편했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불편한 것을 넘어서 ‘다리 다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라는 걸까?’ 라는 회의적인 생각까지 더해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다치기 전 까지는 당연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았다. 먼저 병원의 문부터 그랬다. 흡연 장소에 가려면 병원의 후문 쪽을 이용했는데 지나치는 문은 안으로 당겨야 하는 여닫이 문이었고,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게 계단 옆으로 난 언덕은 경사는 너무나 가파르고 바로 앞이 도로였다. 도로에 차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성한 발에 온 힘을 지지해 언덕을 내려왔고 내려 온 다음에는 흡연실로 향하기 위해 다시 죽을힘을 다해서 주차장 옆 흡연실로 들어가는 경사 높은 길을 타고 들어갔다. 그렇게 흡연장에 가다 체중을 이기지 못해 휠체어가 뒤집어질 뻔 한 적도 몇 번 이었기에 나중에는 ‘담배 피러 나갈 때 마다 이런 고생을 해야 할까. 그냥 나가지 않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하다는 것과 불편하지 않다는 것은 판이했다. 병문안을 오신 어머니나 친구와 산책을 한 번 나가려면 무수히 많은 방지턱을 넘어야했다. 발이 성할 때는 아무생각 없이 넘어 다니던 대부분의 방지턱은 너무 높아서 휠체어 앞바퀴를 끌어다 놓아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또 그렇게 올라갔다 하더라도 인도가 너무 울퉁불퉁해서 휠체어가 잘 구르지 않았다. 난데없이 심어진 가로수들도 길을 막았다. 자주 이용하는 편의점이나 슈퍼의 문도 대부분이 여닫이 문이었다. 내부 공간도 무척 협소해서 휠체어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카페도 식당도 마찬가지였으며 생리현상이 찾아와도 장애인 화장실이 아닌 일반 화장실을 이용하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일반적인 자동차엔 휠체어를 실을 수 없어 병원 인근의 시설물만 이용해야했다. 그렇게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소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모든 것들이 불편해졌다.



사진 출처 - 필자


 인도보다 도로가 편해졌다. 외출보다는 그저 병실에 가만히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됐다. 친구들은 말했다. “나가면 같이 고생하니까 그냥 참아. 아픈데 무슨 외출이야? 그냥 병실 안에 가만히 있어.” 상태가 호전되어 통증은 없다는 말에도, 병실에 갇혀 있기 갑갑하다는 말에도 “요양이나 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병실 밖 세상’을 나갈 수 없는 세상이 원망스러웠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기에 ‘아픈 내가 죄인이지, 얼른 나아야지’ 생각했다.


 그러다 병실에서 노트북으로 어떤 기사를 보게되었다. 부산 영도구에서 벌어진 어떤 장애인 모자 중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다루고 있던 그 기사가 내 피부에 와 닿았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내가 더 크게 다쳤더라면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의 일면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그 날 모자에게 벌어진 그 비극을 상상해보았다.


 내게 그 이야기의 시작은 그저 효심(孝心)이었다. 밤늦게까지 일한 몸 불편한 엄마를 마중 나가는 몸 불편한 아들의 효심. 아들은 어머니를 얼른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전동 휠체어를 몰았을 것이고 그 전동휠체어가 다니는 길은 다만 인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도에 느닷없이 자리한 저 가로수가 그의 앞을 막았으니까. 또 소화전이. 또 횡단보도 너머로 보이는 다음 인도의 방지턱이. 또 너무 울퉁불퉁한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휠체어를 휘청이게 보도블록이 그를 막아 세웠으니까. 그렇게 인도를 포기한 채 차가 다니는 차도로 전동휠체어를 몰고 간 그는 그의 엄마를 만났고. 그들은 보지 못하고 이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버스 안의 출퇴근 풍경을, 훌쩍 여행을 떠난 다음 바라본 바닷가와 산 정상 국내 어디, 외국 어딘가의 풍경. 커피 한잔을 먹을 수 있는 카페, 배가 고프면 들어서는 식당, 생필품을 사기위해 들려야만 하는 마켓. 몸이 불편한 그들을 위한 ‘전용시설’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또 몸이 불편한 그들이 이용해야할 도로와 교통이 그들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꿋꿋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어느 봄 날.


 깊은 밤 퇴근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수고했다고 말하며 듬뿍 사랑을 나눠주던 아들과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담고 환하게 웃던 어머니.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손 꼭 잡고 그토록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은 결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울퉁불퉁한 보도를 놔두고 도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들에게 찾아올 죽음을. 그것은 라이트 불빛의 의지해 왕복 2차선 도로를 내달리던 택시기사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기사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가만히 소리 내었다. “아.” 라고.


 그 다음 속절없이 탄식이 흘러나온 까닭을 가만히 생각했다.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몸으로 체험했으니까. 살 수 있는 방법들이 정비되지 못한 탓에, 죽을 수도 있는 길로 내몰린다는 것. 그것이 몸이 불편한 채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일상이었다. 나는 아프기 전에는 몰랐다. 나는 아프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아프기 전에는 그들에게서 등 돌린 채 살았다. 내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그 사실이 나를 너무 부끄럽게 만들었다.


황은성: 동시대인이 되고 싶은 불효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