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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갈등의 뿌리는 어디일까(강국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11-27 17:41
조회
89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어제의 흔적이 오늘을 제약하고 오늘의 흔적은 내일을 규정한다. 올해 하반기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는 한일갈등과 검찰개혁 역시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두 가지는 일제잔재청산이라는 주제와 연관된다. 애초에 검찰이 기소독점과 기소편의 등 각종 특권을 갖게 된 것도 경찰이 친일파 소굴이라는 현실에서 적잖이 기인했다. 많은 국민들이 친일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고 인식하고, ‘정치인·고위공무원·재벌 등에 친일파 후손들이 많다’는 걸 원인으로 진단한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경축사에서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라고 말했을 정도다.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냈던 장면의 아들인 장순이 어린 시절 경찰서를 지날 때마다 들었다는 “고문 피해자들의 비명 소리”야말로 친일잔재청산과 좌절된 해방을 보여주는 예리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당시 경찰은 곧 친일파 집합소나 다름없었고 평범한 장삼이사들을 좌경화시키는 교과서였다.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해방 직후 경찰 고위직에 몸담았던 최능진은 “이러한 정세가 계속되면 한인의 80%가 공산주의 쪽으로 돌아설 것이다”라는 보고서를 제출했을 정도다. 물론 최능진은 그 직후 경찰에서 짤렸다.


 우리가 기억하는 해방 혹은 일재잔재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썩 믿을게 못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많은 이들이 조선총독부 앞에 일장기가 1945년 9월 9일까지 걸려있었으며,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그 전날 인천에 상륙했던 미군이 항복 조인식을 한 뒤 일장기를 내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장기를 내린 미군이 곧바로 성조기를 게양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민중들이 패전 소식을 들으면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을 공격할까 걱정했다. 결국 몽양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경제범 즉시 석방, 경성에 3개월 치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건설사업·학생훈련과 청년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 것 등 5개 항을 요구했고 수락을 받아냈다. 여운형은 그날 저녁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6일에는 오전 10시를 기해 전국 형무소에서 정치범과 경제범 약 1만 6000여명이 풀려났다. 17일에는 건준 부서 결정을 완료했다. 치안유지 권한과 방송국 등 언론기관도 조선총독부한테서 이양 받았다. 총독부 건물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독부에게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 “정식 항복할 때 일본 통치기구를 그대로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고하자 총독부는 8월 18일 오후에 여운형에 대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태극기도 다시 일장기로 바꿔 달았다.


 조선총독부는 미 군정청(MG)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일괄 사퇴한 총독부 일본인 관리들은 비공식 고문이 됐다. 이들은 한국인 '인재'들을 미군정에 추천했다. 그리하여 조병옥 경무국장, 장택상 수도경찰국장을 비롯해 노덕술 같은 이들이 경찰 핵심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일본 군대는 “심지어 ‘미군정’이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신나게 거리로 나와서… 미군정의 권위하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하는 한국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무리지어 활보하고 다녔다. 무장한 일본 군인들은 ‘미군이 재가한 일본군 파견대’라고 쓴 트럭을 타고 시내를 오갔다.”



사진 출처 - JTBC


 친일잔재는 살아남았다. 청산? 당연히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진실의 반쪽을 놓치고 있는건 아닐까.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오히려 육성한 건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친일잔재를 살려낸 건 미군정이었다. 그 이유는 경찰을 감독하던 윌리엄 매글린 대령이 “우리는 만일 [일제하 한국 경찰이] 일본인들을 위해서 일을 잘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일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큰 그림에서 보자면 미국의 세계전략은 일본부터 파키스탄에 이르는 반공 방벽을 만들려 했다. 한반도 남부는 미국과 '일본'의 하위 파트너가 되어야 했다.


 이승만이 그 유명한 ‘정읍발언’에서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라며 분단을 공식화한 게 1946년 6월 3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두 달 전인 그 해 4월 6일 "미 점령군 당국은 남조선에 한하여 조선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는 AP통신 보도가 나왔다.
요즘은 한미동맹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든 것 같다. 한일갈등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은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한일관계와 한미관계, 그리고 미일관계를 종합적인 차원에서 보지 못하는 건 반쪽짜리 인식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혹시 한일갈등 혹은 한중갈등이야말로 미국이 구사하는 현대판 '이이제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