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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를 위한 변명(이지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5-30 18:26
조회
1298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매화꽃 좋은데 뭐 하냐고 남쪽에서 전화가 왔더랬다. 내가 사는 동네의 언덕바리에 잔설이 녹지 않았을 때였다. 꼭 한번 다녀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냥 말만 그렇게 전했었다. 벚꽃 천지라고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 벚꽃은 우리 동네에도 많으니 이만하면 여기도 봐 줄만은 하다고 답을 드렸었다. 그 뒤로는 꽃이 좋다고 연락이 온 적은 없다. 그래도 꽃은 알아서 다 피었다. 진달래 개나리가 피더니 간간히 라일락 향기가 풍기고 조팝 이팝 뿌리다가 이제는 아카시아와 장미다. 누구의 감시나 통제를 받았다거나 혹은 누구의 사주를 받은 흔적은 전혀 없다. 다 알아서 피고 알아서 진다.


 대개 뿌리가 있는 것들은 다 그렇게 알아서 산다. 꽃필 철이 되면 한껏 부풀어 올랐다가 제 자랑 실컷 해놓고는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진다. 누가 더 이쁘게 봐준다고 기를 쓰고 오래 핀 적도 없고 누구의 손가락질에 실망해서 먼저 진적도 없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산다. 누구도 그런 존재를 속칭 “독꼬다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편의 찬사가 계절마다 쏟아진다.


 주지하다시피 노래의 생명력은 대중들의 입을 타면서 유지된다. 그 귀한 자양분을 확보하는 통로를 모르는 가수는 없다. 그러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시대적 사고를 노래로 풀어 내는데만 급급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대중이라는 막연한 존재에 노래의 생존을 맡길 생각은 하지 않고, 대중의 기호를 고려할 용량을 확대시킬 의사도 없이 그저 아픈 일만 생기면 달려가 노래를 한다. 하찮은 위로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심정으로 부르는 그들의 노래는 험한 일을 당해 생사의 귀로에 선 사람들의 가슴에 뿌리를 내려 가끔은 꽃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찾는 노래의 길은 일반적인 대중문화가 닦아놓은 길과는 달라서 들려오는 노래나 듣는 “아무나” 대중들이 알 길은 없다. 적어도 이들의 노래를 알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의 품을 들여야 한다. 아무데서나 노래 부르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회에 나가 서툰 구호라도 함께 외쳐야 할 때도 있지만 시민단체의 행사에 얼굴을 디밀거나 아니면 아주 작은 소규모 공연에 후원금이라도 챙겨가야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이런 노래를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해 할 때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흔히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시장(市場)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시장의 주변이나 헛도는 부류들로 치부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노래는 시장으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시장을 소외시킨 것이다.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한 소위 “민중가요”에 관한 이야기다.


 한때 민중가요는 부당한 정치권력과 탐욕스런 자본권력에 대항하는 몇 안 되는 문화적 수단이었다. 민중가요의 전성기는 스멀스멀 어둠의 기운이 사람들의 오감을 마비시키고 지배자의 손끝 하나에 수천수만의 밥줄이 오락가락 했던 반민주적 작태의 시기였다. 물론 시대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거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했던 “아무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 어진 의사가 아픈 환자를 치유하며 아파하듯이. 정의로운 검찰이나 경찰이 불의한 범죄자를 잡아들이며 분노하듯이 –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는 전제로 - 민중가요 속에는 불의한 역사와 아픈 시대를 살았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이명박근혜 시대의 국정농단에 생떼 같은 세월호의 안타까운 목숨까지, 참담했던 그 시절의 반민주적 행태가 쌓이고 쌓여 “이게 나라냐”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숱한 분노가 있었다. 그때의 촛불은 화려했다.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서면 200만 명이 넘는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 그 흔한 전깃불 하나 없어도 200만개의 촛불만 있으면 어떤 어둠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그때 얻었다. 촛불혁명이라 불리는 그때의 현장에도 민중가요가 있었다. 광화문 앞에 대형무대가 세워졌고 매주 격정적인 공연이 열렸다. 다만 그 곳에서 민중가요가 울려 퍼진 적은 별로 없었다. 그 무대는 이름만 대면 “아무나” 알 수 있는 가수들과 그 “아무나” 아는 노래를 좋아했던 대중들의 특별한 교감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청계천이나 세월호 농성장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 등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민중가요가 불려 졌고 촛불과 함께 분노하고 환호하고 위로 받았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한때 등잔불이 귀했던 시기가 있었다. 전기불이 들어오면서부터 등잔은 꺼졌다. 등잔의 기름 냄새와 하롱하롱 흔들리던 불빛은 이제 추억의 한 자락으로도 자리하지 못한 채 속담에서나 가끔 언급될 만큼 골동품이 되었다. 촛불이 꺼진지도 2년이 지났다. 어두운 시대 촛불이었다고 자부했던 그 노래들도 점점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목소리도 가끔 들린다. 필요할 때 찾다가 필요 없을 때 치워버리는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 터이다. 그러나 민중가요가 시장으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라 시장을 소외시킨 주체였다고 믿는 것처럼 소위 “아무나” 알 수 없는 민중가요는 삶의 고통을 안고 사는 “아무나”가 아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생산될 것이다. 흔한 대중들이 읊어대는 “독꼬다이” 인생 이라는 비아냥거림도 훈장으로 여기는 민중가수들도 여전히 노래를 부를 것이다.


 동백꽃이 언제 피었었던가 기억하기는 쉽지 않지만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동백이 다시 꽃피울 날을 기약하는 것처럼, 알아서 피고 알아서 지고 또 다시 꽃피우는 뿌리 있는 생물의 일생처럼 소위 “아무나” 대중들과 무관하게 철저한 자신만의 대지 위에 뿌리 내릴 것이다. 적어도 양복 손에 들고 흔들면서 흔들면 흔들리는 존재라는 하찮은 인생의 넋두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