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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에 전면광고를 하라(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3-27 12:53
조회
1043

- 안보딜렘마에서 안보다원주의로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보를 내세우며 북한과의 대화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 대북 대화나 교류 기사에 대해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험악한 반대 발언들을 쏟아내는 이들은 무슨 일말의 논리라도 있는 것일까. 두루 살펴보면 북한을 그저 전복시키든지 압박해 죽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폭력적 심성 외에는 없어 보인다. 힘으로 정복하라는 파괴적 정서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자기 가족에게도 그런 태도를 적용할까. 이웃이나 친지에게도 그런 태도로 일관할까. 글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안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힘에 의한 평화와 안보딜렘마


 사전적으로 안보는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당연히 안보는 국방, 국제정치, 외교의 주요 과제이다. 신약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자기 궁전을 지키는 동안 그의 소유는 평화 안에 있습니다.”(누가복음 11:21) 이천년 전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평화’를 더 큰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큰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상태는 ‘안보’(安保, security)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지키는 자신의 소유물’처럼, 안보란 어떤 힘에 의해 무언가가 지켜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안보라는 개념 자체가 무언가 막아야 하는 외부의 힘 혹은 폭력적 상황을 전제한다.
 문제는 저마다 힘을 이용해 다른 힘을 막으려는 데서 발생한다. 안보는 힘으로 나를 지키는 행위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저마다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다보니, 힘들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한다. 갈등을 해소하겠다며 다시 더 큰 힘을 추구한다. 역시 저마다 그렇게 한다. 저마다 힘을 키운다. 힘을 키우기 위한 투자가 지속된다. 그럴수록 실질적인 삶의 질은 뒷전으로 밀리고, 안보가 ‘편안히(安) 보전됨(保)’이기는커녕 불안(不安)의 계기가 된다. 서로가 힘을 키우면서 불안은 여전히 지속되거나 더 커진다. 안보에 대한 투자가 안보불안을 키우는 안보의 역설, 안보딜렘마가 지속되는 것이다.


안보라는 동상이몽, 안보들의 충돌


 안보딜렘마는 왜 발생하는가. 나의 안보만 안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안보, 우리의 안보가 있다면, 남의 안보, 너희의 안보도 있다. 한 걸음 물러선 곳에는 그들의 안보도 있다. 안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안보도 사실상 복수이다. 하나의 안보(Security)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안보들(securities)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안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안보와 충돌하는 것이다. 서로 충돌하는 안보들 사이의 자세, 안보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성경이 전하는 이천년 전의 상황처럼, 그것은 나의 소유를 지키고 키우려 하면서도, 남이 나의 소유를 뺏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무장하고 나의 소유를 지킨다는 말은 누군가 나의 소유를 탐낸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나의 소유를 탐낸다고 여겨지는 상대방도 내가 자신의 소유물을 탐낸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이자 적으로 여기는 상황, 마치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비슷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안보가 충돌하고 안보가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안보만을 기준으로 남의 안보를 나의 경쟁 상대이거나 마치 적처럼 생각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이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면, 현실에서 대문자 단수 안보(Security)는 사실상 없다. 서로 대립하는 소문자 복수 안보들(securities)이 있을 뿐이다. 좋든 싫든, 여러 안보들 간 인정, 수용, 조화를 통해 우산과 같은 상위의 안보를 계속 추구해나가야 한다. 나 혹은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안전해져가는 과정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힘에 의한 안보는 기본적으로 힘들의 대립을 낳는다. 힘들의 균형, 대화를 통한 안보들(securities) 간의 타협의 과정을 통해 대문자 안보(Security)로 나아가는, 즉 안보다원주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한반도 안보트릴렘마


 물론 현실에서는 서로 안보라는 동상이몽에 빠져있다. 안보는 늘 딜렘마에 처해있다. 북한대학원대학 구갑우 교수는 한반도의 경우는 ‘트릴렘마’의 상황 속에 있다고도 말한다. 구체적으로 구 교수는 ① ‘한반도 비핵화’, ② ‘한반도 평화체제’, ③ ‘한미동맹의 지속’, 이 세 가지는 한국정부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정책목표, 즉 트릴렘마라고 분석 및 정리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이 세 정책 목표를 추구해야 하지만,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라는, 그래서 한국 정부는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사실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 가지 표제들의 충돌, 즉 트릴렘마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가령 ①한반도 비핵화와 ③한미동맹을 같이 지속하려면 북한에 대한 강압정책 또는 전쟁을 통한 북한붕괴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 ②한반도평화체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②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 ③한미동맹을 동시에 지속하려면 북한이 핵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①한반도 비핵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①한반도 비핵화와 ②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려면 ③한미동맹의 형태나 수준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남한의 친미주의자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미국 주류의 입장 때문에 그것도 어렵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정부가 나서서 한미동맹의 방행과 강도를 수정했는데도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국내정치적 파국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형세에 대한 적절한 분석이며, 형식논리상으로도 그럴 듯하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트릴렘마의 돌파구


 그러나 현실은 형식논리 안에 갇히지 않는다. 현실적 난제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렘마들’의 출구로 이끄는 지점도 있다. 안보가 안보에 대해 불안의 근원이 되는 현실을 인식하고, 안보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출구도 보인다. 그러려면 무엇이 최종 목적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안보딜렘마의 상황이나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과 트릴렘마 중에서도 우선 선택지가 보인다.
 셋 가운데 최종 목적은 당연히 평화, 즉 한반도평화체제이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가장 원하는 이는 한반도 구성원이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를 가장 아쉬워하는 곳은 남한이다. 가장 원하는 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물론 북한도 평화를 원한다. 한반도 통일을 바라는 이가 북한은 95% 이상, 남한은 국민의 절반 수준이라는 점만 보면, 북한이 평화를 더 원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70년 이상 행해온 독자적 정책의 원심력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구미세계의 압박이 강해 평화를 향한 공식적 모멘텀을 찾기가 남한만큼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남한 정부가, 근본적으로는 다수 국민이 먼저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남북 평화의 길과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북한의 실상과 현실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때 한반도 평화의 추구가 세계의 다양한 평화 ‘목소리들(voices)’과 대립한다면 역시 한반도 평화가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같은 소모적 논리에 빠진다. 인류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한반도 평화여야 한다. 세계의 다양한 평화 목소리들을 일단 인정한다는 목소리를 세계에 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이 무언가 양보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세계의 인정을 받는다. 이것이 가장 가능한 돌파구이다.
 한반도 비핵화(사실상 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핵심 과제이자 주요 과정이다. 한미동맹도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한반도 평화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주요 수단이다. 한미동맹 자체가 한반도와 인류의 평화보다 궁극적일 수는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동맹 체제도 결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남한 정부도 이것을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으로 하여금 북미대화에 더 적극적이도록 자극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뉴욕타임즈에 전면 광고하라


 하지만 바로 여기가 사태를 풀어나가기가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세상은 한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미국대로 미국 중심적이며, 미국의 대북관도 다양해서 한국 정부의 목소리에 동일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존 볼턴(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처럼 극우에 가까운 대북강경파가 있고, 마이크 폼페이오(국무부장관) 같은 그 다음 우파가 있다. 미국 민주당 역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지를 흐려놓고 미국 내 트럼프의 입지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큰 대북 대화를 못미더워 한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일방적 정책으로 미국 내 정치적 입지가 대단히 취약해진 트럼프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좌우협공으로 맥을 못 춘다. 미국 내 대북 대화가 시작은 되었으나 늘 좁은 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도 자신의 정권과 일본의 재무장을 위해 늘 대북 강경파의 자리에 선다. 미국과의 경제전쟁에서 흔들려 경제에 손상을 입히고 체면을 구긴 중국 시진핑은 한반도 문제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물론 중국 역시 한반도에 봄이 오는 것을 내심 좋아할 리도 없지만...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를 열어줄 첫 열쇠는 남쪽의 정부에 있을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좁게는 김정은을 다시 만나야 한다. 만나야 할 명분과 실리도 북한에 다시 주어야 한다. 좀 더 길게는 미국을 다시 움직여야 한다. 트럼프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를 설득해야 한다.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유력 언론에 세계의 평화를 위한 감동적 전면광고를 해야 한다. 여러 차례 해서라도 미국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북한을 통해서도 미국에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미국 전체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광고비는 제법 들겠지만, 그것이 유엔연설보다 효과가 몇 배 클 것이다. 기업이 광고비를 쓰는 이유는 결국 광고비를 상회하는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 아닌가. 손을 내미는 쪽이 진짜로 강한 쪽이다.


진짜 강한 쪽


 세 가지 렘마들 간 힘의 균형은 더 힘이 큰 쪽에서 한 발 물러서거나 문을 여는 데서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힘이 있는 쪽에서는 손을 먼저 내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차선은 가장 필요로 하는 쪽에서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이 때 상대방이 물리치지 않을 정도로, 오판하지 않을 정도로 손을 내미는 외교적 지혜가 필요하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나, 문재인 정부가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연기하자고 미군에 정책적으로 먼저 제안했던 것은 적절한 예이다. 물론 평화마저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는, 본성에 가까운 습관 탓에 힘 있는 자가 힘을 일부라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남한의 극우 보수 및 대북 강경파들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심리도 자기중심성에 기반해 당장의 이익과 안정만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남한 내에서조차 이른바 남남 갈등을 해소하는 과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평화와 안보는 지난하고 장기적인 과정적 과제이다.


평화는 술어다


 나는 언젠가 평화는 주어가 아니라 술어라고 정리한 바 있다(『평화와 평화들』). 가령 “평화는 전쟁이나 일체의 폭력이 없는 상태”라면, 평화라는 주어는 전쟁, 폭력, 없음 등의 술어에 의해서만 지시된다. “평화는 정의의 구현”이라고 한다 해도 정의 역시 질서와 같은 또 다른 언어를 가지고 와야 해명되기 시작한다. 모든 주어는 술어를 통해서만 지시되는 세계이다. 이것은 모든 주어의 운명이고 한계이다. 어떤 개념이든 그 개념을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 개념 아닌 다른 개념을 가지고와야 하는 것이다. 인식의 지평 자체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어는 문장의 주체가 아니라 술어에 종속적이다. 주어에 해당하는 영어 subject가 ‘종속적’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도 이러한 논리적 경험의 소산이다. 마찬가지로 평화든 안보든 자신의 입장을 술어의 자리에 둘 때에만 평화가 되고 안보가 된다. 자신의 입장을 주어 혹은 유일한 목적과 동일시하는 순간 주어도 사라진다. 술어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여러 가지 기능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듯이, 그럴 때에만 딜렘마 혹은 트릴렘마가 해소되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평화가 술어라는 말은 평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입장들을 일단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인정하는 쪽이 주어로서의 평화에 먼저 다가선다. 이미 남북 간에도 힘의 균형이 동일하지는 않은 마당에, 더 큰 힘의 소유자가 먼저 대화와 만남의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먼저 손을 내밀려면 대화와 나눔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평화적인 길이라는 사실을 힘의 소유자 자신이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내면에까지 변화를 주는 일은 사실상 정치적 협상이나 힘에 의한 밀어붙이기보다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의 길은 자기 자신을 술어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인문적 겸손함에 대한 지속적 교육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