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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캐슬>과 <아내의 자격> 사이(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1-16 13:46
조회
1603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연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썩소’가 화제에 올랐다. 썩소는 고3 때 나의 담임선생님 별명이다. 그는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 같은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폭력 교사’였다. 얼굴이 심하게 얽은 분이었는데(그때는 그걸 곰보라고 불렀다), 아주 가끔 웃을 때면 하얀 치아가 검은 얼굴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뤘다. 미소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웃을 때 그러하듯 영 어색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썩은 미소’, 줄여서 썩소였다.


 어느 날 썩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는 수업을 하지 않고 자습을 시켰다. 그는 이어폰을 꺼내 휴대용 라디오를 들었다. “쉿! 지금 각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는 강시 같은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우리를 침묵하게 한 뒤 이어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당시 각하는 전두환이었다. 나중에 추론해 보니 그 방송은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4·13 호헌조치’ 담화문 발표 방송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경기도 한 위성도시의 삼류 학교였고, 우리는 6월 항쟁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던 무지렁이들이었으며, 선생님은 요즘 말로 하면 ‘전빠’였다.(이 분이야말로 전두환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믿어의심치 않으실 분이다.)


 썩소 선생님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분이라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울산에서는 너희들보다도 공부를 안 한 무식한 놈들이 대졸자들 만큼 월급을 올려달라고 파업을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느냐.’는 취지였다. 현대차라는 고유명사도 거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나중에 알고보니,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의 일장훈시는 내 인생 최대의 화두로 남았다. ‘공부 안(못) 한 사람은 월급을 많이 받으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우리 사회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입시 제도를 수십번 바꿔도 입시 경쟁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현상의 원인도 이 질문과 관련이 있다. 화제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의사 아버지의 승진 경쟁보다도 자녀들의 성적 경쟁이 더 중요한 일처럼 묘사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사회가 확립한 대답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에 올라왔던 만화.
한국인의 육체 노동 경시 풍조를 풍자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속한 세대는 썩소 선생님이 메시아처럼 떠받들던 전두환-나는 이들을 아버지 세대라고 부른다-을 상대로 싸웠지만(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성과를 이뤘지만), 이들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체제의 규칙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식들에게 전수했다. 그냥 전수만 한 게 아니라 그 규칙에 뼈와 살을 붙여 훨씬 공고한 시스템을 완성했다. <스카이캐슬>의 7년 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본 사람이라면 <스카이캐슬>의 설정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학부모를 쥐고 흔드는 강남의 초엘리트 사교육 권력이 더 강력해진 캐릭터(입시코디네이터 김주영)로 돌아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초등학생에서 고3과 중3으로 자랐고, 사교육 시스템은 복잡해진 입시제도 만큼 더 치밀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서울대 의대를 강요하는 부모를 상대로 복수를 기획하고 감행할 정도로 끔찍한 인간성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공부 강요하는 부모를 자식이 살해하는 일은 실제로 왕왕 일어난다.)


 다들 알다시피 사교육 시장의 주요 공급자와 수요자는 이른바 86세대다. 86세대 일부는 한때 대안학교 붐을 일으키며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자 시도했으나, 이제 대안학교조차 서울대에 몇 명 보내느냐가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돼버렸다. 조희연 교육감의 최근 발언을 보라.(“서울대 의대 두 명 보냈다.”) 물론 혁신학교의 학력 저하 주장을 반박하느라 나온 말이긴 하지만 이 시대의 욕망을 정확히 반영하는 장면이다. 학력숭배(간판숭배)는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가 된 지 오래다. 썩소 선생님의 소신은 이 시대의 종교가 되었다.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학력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노력과 능력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력에 따라 직업과 연봉이 달라지고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오로지 평가 과정의 공정성이다. 평가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경쟁은 당연한 것이고 승자독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게 86세대만의 탓은 아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경쟁주의 세력은 전교조로 대표되는 참교육 진영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예봉을 꺾었고, 이명박 정부 들어 학력경쟁을 초등학교로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내의 자격>이 <스카이캐슬>로 진화한 지난 7년 동안 이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내의 자격>의 대결 구도-국제중 전문 입시학원 대표 홍지선(이태란) vs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윤서래(김희애)-에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윤서래를 응원했었다. 돈과 성공에 눈이 먼 홍지선과 착하고 인간적인 윤서래 사이에서, 윤서래가 비록 불륜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윤서래를 지지했었다. 그런데 <스카이캐슬>은 좀 다르다. 딸 예서의 서울의대 입학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서진(염정아)과 역시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이수임(이태란)의 대결 구도에서 시청자들은 맘 편히 이수임을 응원하지 못한다. 한서진이 감추려던 과거(시장에서 내장과 선지를 팔던 집 딸이었다는) 치부를 드러낸 이수임을 비난하는 시청자들도 꽤 있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이 설정은 사교육이 우리 안에 더욱 깊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메타포가 아닐까. 사교육을 줄이고 획일적인 입시 교육에서 벗어나자는 참교육의 이상은 점점 더 딴 세상 이야기가 되어간다. 문재인 정부도 그런 방향으로의 교육 개혁은 꿈도 꾸지 않는 것 같다. 이대로 가면 학력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 역시 더욱 커질 것이다. 아이들은 더욱 심각한 입시 지옥에 빠져들 것이고, 부의 편중 또한 심화할 것이다.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체제의 작동 원리로 설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사슴은 뿔로 싸우고, 기린은 목으로 싸우듯이, 지능이 발달한 인간이 머리로 경쟁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러나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 경쟁을 죄악시했던 사회주의가 지나친 획일주의로 망했듯이, 경쟁만을 최고의 덕목으로 떠받들며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는 바로 그 획일적 경쟁주의 때문에 망할 수 있다.


 교육과 노동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입시경쟁 완화의 근본 대책이 노동 및 분배 정책에 있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이 낡은 주장조차도 제대로 인식하고 실행에 옮기려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이렇게 저렇게 교육 정책을 바꾸는 대증 요법에만 치중해 왔고, 그 실패 앞에서 자못 허탈한 심정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것 아닌가. 또는 <조선일보> 따위의 논리에 굴복했다는 치욕감에 아예 잊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노동 존중론이 나의 이 낡은 주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낀다. 최저임금 천원 올렸다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이 여전히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후진적 풍토에서 육체노동의 사회적 가치와 평가를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 나라의 하드웨어를 바꾸는 데 성공했듯이, 운영체제에 해당하는 교육과 노동 정책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세대의 마지막 과제가 아닐까.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정책을 바꾸는 것보다 인식을 바꾸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공부도 못(안)한 것들이 어따 대고….’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 천박한 인식이 지금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이 인식을 바꿔내는 것이 진정으로 전두환을 이기는 길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