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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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오항녕(연변대 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갱년기가 온 것일까요?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툭하면 마음이 울컥하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걸 알고 나서 콧등이 찡해질 때마다 참아보려 애쓰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눈물이 많아지면 눈물이 점점 싱거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 일요일, 세느 강에서  “오랜만에 세느 강변에나 나가볼까?”  지난 일요일, 아내가 지금 한창인 벚꽃 구경을 하러 가자고 재촉했습니다. 저희는 집 근처에 흐르는 작은 하천을 그냥 싱거운 우스갯소리로 ‘세느 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느 강’을 경계로 한쪽은 제가 살고 있는 oo구(區), 다른 한쪽은 ㅁㅁ구로 행정구역이 나뉩니다.  비록 도시 변두리의 그만그만한 하천이지만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있어 휴일이면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듭니다.   4월 중순, 세느 강에 나가 보니 벚꽃은 그야말로 만발입니다. 아내는 넋이 나간 듯 눈부신 꽃송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꽃들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다가 울컥! 갑자기 콧등이 찡해졌습니다. 부랴부랴 아내가 알아차릴까 봐 가슴을 꾹 눌러 겨우 눈물을 참고 있는데, 아내가 불만스럽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oo구청장 이 사람, 안 되겠네.”  꽃구경에 취해 있던 아내의 뜬금없는 소리에 눈물이 쏙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아내의 태세 전환에 깜짝 놀라 묻자, 아내는 우리가 서 있던 개천 건너편, oo구의 천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가만 보니 우리가 서 있는 ㅁㅁ구 쪽의 천변에만 꽃이 만발입니다. 겨울에는 잘 몰랐었지만 이렇게 꽃이 피고 나니 oo구에서 관리하는 천변과 ㅁㅁ구에 속한 천변의 풍경이 확연히 다릅니다. 꽃나무가 잘 관리된 ㅁㅁ구는 제가 살고 있는 oo구보다 산책로며 운동기구며 주변 환경이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다리를 이쪽저쪽으로 건너다니며 실컷 벚꽃 구경을 하던 아내는 어느새 oo구 주민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래도 간만의 꽃구경이 좋았는지 얼굴에는 오랜 동안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야 말로 찬란한 봄입니다, 눈부신 계절입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말 갱년기 때문일까,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빠졌습니다. 꽃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저를 아내가 봤다면 한마디 했을 것 같습니다.  “주책바가지!” 사진 출처 - 경향신문 #2. 화요일, 파리바게뜨 근처 술집에서  개인적인 볼일 때문에 약속된 술자리에 뒤늦게 합류했습니다. 벌써 세 친구들의 얼굴이 불쾌하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술자리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서는 가급적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 친구들의 묵시적인 금기였습니다. 박근혜 탄핵 이후, 어떤 정치적인 뉴스가 나올 때마다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서 “다신 보지 말자”는 말로 헤어지는 일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아홉시 반 정도 지난 시간, 그런데 벌써 준한 사태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한 친구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다른 두 친구는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등을 돌린 친구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친구가 뒤늦게 자리에 앉은 저를 보고 어떻게 하냐는 듯이 쓴 웃음을 지으며 제게 말했습니다.  “쟤들 세월호 때문에 한바탕했다.”  4월 16일, 예상했던 바였습니다. 등을 돌리고 있다가 한 친구가 일어섰습니다. 조그만 음식점을 하는 친구였습니다.  “미안하다, 나 먼저 간다.”  말릴 새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을 친구가 일어서 나갈 때 다른 친구가 소리쳤습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먼저 너, 다시는 안 봐!”  술자리는 금세 누가 먼저 입을 떼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소 긴 침묵이 이어졌다고 생각되는 때에 ‘다시는 안 보겠다’는 말을 했던 친구가 저를 보며 말을 꺼냈습니다.  “야, 저 새끼가 어쩌다 저런 놈이 되었냐? 너도 차명진이 같은 새끼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냐?”  그 말을 하고 있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당황하며 말을 받았습니다.  “정치 얘기 안 하기로 했었잖아, 근데 오늘 작정하고 나온 것처럼 왜 그랬어?”  그러자 눈물을 참고 있던 친구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습니다.  “너도 똑같이 답답한 놈이다. 내가 정치 얘기 했냐? 세월호 얘기 했지.”  술자리는 어찌어찌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시는 안 보겠다던 두 친구는 또 다시 보게 되겠지요.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저였습니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일까요, 친구가 말했던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서였을까요? 그날 집에 가는 길에 눈물이 났던 것은 아마 며칠 전 보았던 그 눈부신 꽃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정말 ‘주책바가지’가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9-04-19 | hrights | 조회: 65 | 추천: 1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에 ‘선을 넘어 생각한다’라는 책을 내고 나서 몇 차례 강연요청을 받았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갈까 고민하다가 프레젠테이션 첫머리에 집어넣은게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였다. 만원권 지폐 뒷면에 실리면서 유명해진 이 14세기 조선 초기 별자리 지도를 우리가 흔히 아는 서양식 별자리 지도와 비교해보자. 한국 사람들은 북쪽 하늘에 있는 국자 모양을 한 별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선을 그은 뒤 ‘북두칠성’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유럽 사람이라면 큰곰자리를 구성하는 꼬리와 등뼈 부분으로서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얘기하면 선 같은건 없다.  우리는 밤하늘을 보면서 북두칠성이니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하는 별자리를 생각하며 별과 별 사이에 선을 잇는다. 하지만 우리가 별자리를 기준으로 별을 인식하는 건 별자리를 잇는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북두칠성이니 큰곰자리니 하며 연결하는 선이란 그저 우리가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에 따라 혹은 외우기 쉽도록 상상력을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28수,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같은 별자리를 만들었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일단 별자리를 그리고 나면 그 별자리가 우리 인식을 규정해 버린다.  우리는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한다. 별과 별자리 지도의 관계를 현실과 프레임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프레임이란 한 번 자리 잡으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이 심어놓은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길 원하신다’는 생각의 씨앗이 자라고 자라서 아버지가 물려준 거대기업을 제 손으로 해체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런 이치다. 선과 선을 잇고 특정한 틀 안에 공간을 인식하게 만드는 ‘지도(地圖)’야말로 그런 효과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지도에 매혹 당했다. 메르카토르 지도의 크기 왜곡 문제를 없앤 피터스 도법 세계 지도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지도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틀’  주변에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를 대략 유럽만한 크기를 가진, 북아메리카보다는 훨씬 작은 대륙으로 인식한다. 여기에는 ‘메르카토르 도법’이라는 방식으로 만든 지도가 워낙 널리 퍼진 게 큰 영향을 미쳤다. 1569년 네덜란드 사림인 게르하르두스 메르카토르가 발명했다는 이 지도는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실제보다 훨씬 더 커보이게 하는 정치적 효과까지 덤으로 거둔다.  그럼 독일사람 아르노 피터스가 만들었다는 피터스 지도는 어떤가. 세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표시한다는 이 지도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괴하기까지 할 정도로 낯설다. 이 지도를 통해서야 우리는 아프리카가 미국과 중국, 인도는 물론 동유럽과 영국, 프랑스, 독일을 모두 우겨넣은 것보다도 더 큰 땅덩어리라는 걸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지도 하나 바꿨을 뿐인데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틀까지 바꿔버릴 수 있다. 지도를 통해 세상을 더 지혜롭게 인식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의 틀을 깨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대목이 있다.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지도가 있는데도 우리는 왜 계속해서 메르카토르 지도를 훨씬 더 많이 사용할까. 짐작하건데, 메르카토르 지도가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의 틀에 훨씬 더 잘 부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익숙한 걸 편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불편한 진실’이란 말은 틀렸다. 진실이란 원래 불편한 게 아닐까. 점심시간마다 서울시내에 울려 퍼지는 ‘박원순 시장 아들 병역기피 의혹 수사 촉구’ 집회와 ‘트럼프 대통령님, 피로써 지킨 대한민국을 지켜주세요’ 현수막을 보면서 틀을 깨고, 선을 넘어 생각해보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노릇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04-03 | hrights | 조회: 301 | 추천: 5
- 안보딜렘마에서 안보다원주의로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보를 내세우며 북한과의 대화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 대북 대화나 교류 기사에 대해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험악한 반대 발언들을 쏟아내는 이들은 무슨 일말의 논리라도 있는 것일까. 두루 살펴보면 북한을 그저 전복시키든지 압박해 죽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폭력적 심성 외에는 없어 보인다. 힘으로 정복하라는 파괴적 정서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자기 가족에게도 그런 태도를 적용할까. 이웃이나 친지에게도 그런 태도로 일관할까. 글이 다소 길어지더라도 안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힘에 의한 평화와 안보딜렘마  사전적으로 안보는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당연히 안보는 국방, 국제정치, 외교의 주요 과제이다. 신약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자기 궁전을 지키는 동안 그의 소유는 평화 안에 있습니다.”(누가복음 11:21) 이천년 전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평화’를 더 큰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상태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큰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상태는 ‘안보’(安保, security)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지키는 자신의 소유물’처럼, 안보란 어떤 힘에 의해 무언가가 지켜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안보라는 개념 자체가 무언가 막아야 하는 외부의 힘 혹은 폭력적 상황을 전제한다.  문제는 저마다 힘을 이용해 다른 힘을 막으려는 데서 발생한다. 안보는 힘으로 나를 지키는 행위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저마다 힘으로 자신을 지키려다보니, 힘들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한다. 갈등을 해소하겠다며 다시 더 큰 힘을 추구한다. 역시 저마다 그렇게 한다. 저마다 힘을 키운다. 힘을 키우기 위한 투자가 지속된다. 그럴수록 실질적인 삶의 질은 뒷전으로 밀리고, 안보가 ‘편안히(安) 보전됨(保)’이기는커녕 불안(不安)의 계기가 된다. 서로가 힘을 키우면서 불안은 여전히 지속되거나 더 커진다. 안보에 대한 투자가 안보불안을 키우는 안보의 역설, 안보딜렘마가 지속되는 것이다. 안보라는 동상이몽, 안보들의 충돌  안보딜렘마는 왜 발생하는가. 나의 안보만 안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안보, 우리의 안보가 있다면, 남의 안보, 너희의 안보도 있다. 한 걸음 물러선 곳에는 그들의 안보도 있다. 안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안보도 사실상 복수이다. 하나의 안보(Security)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안보들(securities)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안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안보와 충돌하는 것이다. 서로 충돌하는 안보들 사이의 자세, 안보들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성경이 전하는 이천년 전의 상황처럼, 그것은 나의 소유를 지키고 키우려 하면서도, 남이 나의 소유를 뺏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무장하고 나의 소유를 지킨다는 말은 누군가 나의 소유를 탐낸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나의 소유를 탐낸다고 여겨지는 상대방도 내가 자신의 소유물을 탐낸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이자 적으로 여기는 상황, 마치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비슷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안보가 충돌하고 안보가 불안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안보만을 기준으로 남의 안보를 나의 경쟁 상대이거나 마치 적처럼 생각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이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면, 현실에서 대문자 단수 안보(Security)는 사실상 없다. 서로 대립하는 소문자 복수 안보들(securities)이 있을 뿐이다. 좋든 싫든, 여러 안보들 간 인정, 수용, 조화를 통해 우산과 같은 상위의 안보를 계속 추구해나가야 한다. 나 혹은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안전해져가는 과정에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힘에 의한 안보는 기본적으로 힘들의 대립을 낳는다. 힘들의 균형, 대화를 통한 안보들(securities) 간의 타협의 과정을 통해 대문자 안보(Security)로 나아가는, 즉 안보다원주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 한반도 안보트릴렘마  물론 현실에서는 서로 안보라는 동상이몽에 빠져있다. 안보는 늘 딜렘마에 처해있다. 북한대학원대학 구갑우 교수는 한반도의 경우는 ‘트릴렘마’의 상황 속에 있다고도 말한다. 구체적으로 구 교수는 ① ‘한반도 비핵화’, ② ‘한반도 평화체제’, ③ ‘한미동맹의 지속’, 이 세 가지는 한국정부가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정책목표, 즉 트릴렘마라고 분석 및 정리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이 세 정책 목표를 추구해야 하지만,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라는, 그래서 한국 정부는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사실상 해결하기 힘든 난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 가지 표제들의 충돌, 즉 트릴렘마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가령 ①한반도 비핵화와 ③한미동맹을 같이 지속하려면 북한에 대한 강압정책 또는 전쟁을 통한 북한붕괴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 ②한반도평화체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②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 ③한미동맹을 동시에 지속하려면 북한이 핵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①한반도 비핵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①한반도 비핵화와 ②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루려면 ③한미동맹의 형태나 수준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남한의 친미주의자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미국 주류의 입장 때문에 그것도 어렵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정부가 나서서 한미동맹의 방행과 강도를 수정했는데도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국내정치적 파국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형세에 대한 적절한 분석이며, 형식논리상으로도 그럴 듯하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트릴렘마의 돌파구  그러나 현실은 형식논리 안에 갇히지 않는다. 현실적 난제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렘마들’의 출구로 이끄는 지점도 있다. 안보가 안보에 대해 불안의 근원이 되는 현실을 인식하고, 안보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출구도 보인다. 그러려면 무엇이 최종 목적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안보딜렘마의 상황이나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과 트릴렘마 중에서도 우선 선택지가 보인다.  셋 가운데 최종 목적은 당연히 평화, 즉 한반도평화체제이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가장 원하는 이는 한반도 구성원이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를 가장 아쉬워하는 곳은 남한이다. 가장 원하는 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물론 북한도 평화를 원한다. 한반도 통일을 바라는 이가 북한은 95% 이상, 남한은 국민의 절반 수준이라는 점만 보면, 북한이 평화를 더 원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70년 이상 행해온 독자적 정책의 원심력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구미세계의 압박이 강해 평화를 향한 공식적 모멘텀을 찾기가 남한만큼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남한 정부가, 근본적으로는 다수 국민이 먼저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남북 평화의 길과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북한의 실상과 현실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다.  이 때 한반도 평화의 추구가 세계의 다양한 평화 ‘목소리들(voices)’과 대립한다면 역시 한반도 평화가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같은 소모적 논리에 빠진다. 인류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한반도 평화여야 한다. 세계의 다양한 평화 목소리들을 일단 인정한다는 목소리를 세계에 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이 무언가 양보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세계의 인정을 받는다. 이것이 가장 가능한 돌파구이다.  한반도 비핵화(사실상 북한의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핵심 과제이자 주요 과정이다. 한미동맹도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한반도 평화라는 최종 목적을 위한 주요 수단이다. 한미동맹 자체가 한반도와 인류의 평화보다 궁극적일 수는 없다. 한반도를 둘러싼 한미동맹 체제도 결국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남한 정부도 이것을 알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으로 하여금 북미대화에 더 적극적이도록 자극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뉴욕타임즈에 전면 광고하라  하지만 바로 여기가 사태를 풀어나가기가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세상은 한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미국대로 미국 중심적이며, 미국의 대북관도 다양해서 한국 정부의 목소리에 동일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존 볼턴(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처럼 극우에 가까운 대북강경파가 있고, 마이크 폼페이오(국무부장관) 같은 그 다음 우파가 있다. 미국 민주당 역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지를 흐려놓고 미국 내 트럼프의 입지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큰 대북 대화를 못미더워 한다.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일방적 정책으로 미국 내 정치적 입지가 대단히 취약해진 트럼프는 야당과 시민사회의 좌우협공으로 맥을 못 춘다. 미국 내 대북 대화가 시작은 되었으나 늘 좁은 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도 자신의 정권과 일본의 재무장을 위해 늘 대북 강경파의 자리에 선다. 미국과의 경제전쟁에서 흔들려 경제에 손상을 입히고 체면을 구긴 중국 시진핑은 한반도 문제에서 한발 물러서 있다. 물론 중국 역시 한반도에 봄이 오는 것을 내심 좋아할 리도 없지만...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를 열어줄 첫 열쇠는 남쪽의 정부에 있을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좁게는 김정은을 다시 만나야 한다. 만나야 할 명분과 실리도 북한에 다시 주어야 한다. 좀 더 길게는 미국을 다시 움직여야 한다. 트럼프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를 설득해야 한다.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유력 언론에 세계의 평화를 위한 감동적 전면광고를 해야 한다. 여러 차례 해서라도 미국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북한을 통해서도 미국에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미국 전체에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광고비는 제법 들겠지만, 그것이 유엔연설보다 효과가 몇 배 클 것이다. 기업이 광고비를 쓰는 이유는 결국 광고비를 상회하는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 아닌가. 손을 내미는 쪽이 진짜로 강한 쪽이다. 진짜 강한 쪽  세 가지 렘마들 간 힘의 균형은 더 힘이 큰 쪽에서 한 발 물러서거나 문을 여는 데서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힘이 있는 쪽에서는 손을 먼저 내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차선은 가장 필요로 하는 쪽에서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이 때 상대방이 물리치지 않을 정도로, 오판하지 않을 정도로 손을 내미는 외교적 지혜가 필요하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나, 문재인 정부가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연기하자고 미군에 정책적으로 먼저 제안했던 것은 적절한 예이다. 물론 평화마저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는, 본성에 가까운 습관 탓에 힘 있는 자가 힘을 일부라도 내려놓는 일은 쉽지 않다. 남한의 극우 보수 및 대북 강경파들이 북한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심리도 자기중심성에 기반해 당장의 이익과 안정만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남한 내에서조차 이른바 남남 갈등을 해소하는 과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평화와 안보는 지난하고 장기적인 과정적 과제이다. 평화는 술어다  나는 언젠가 평화는 주어가 아니라 술어라고 정리한 바 있다(『평화와 평화들』). 가령 “평화는 전쟁이나 일체의 폭력이 없는 상태”라면, 평화라는 주어는 전쟁, 폭력, 없음 등의 술어에 의해서만 지시된다. “평화는 정의의 구현”이라고 한다 해도 정의 역시 질서와 같은 또 다른 언어를 가지고 와야 해명되기 시작한다. 모든 주어는 술어를 통해서만 지시되는 세계이다. 이것은 모든 주어의 운명이고 한계이다. 어떤 개념이든 그 개념을 이해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 개념 아닌 다른 개념을 가지고와야 하는 것이다. 인식의 지평 자체가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어는 문장의 주체가 아니라 술어에 종속적이다. 주어에 해당하는 영어 subject가 ‘종속적’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도 이러한 논리적 경험의 소산이다. 마찬가지로 평화든 안보든 자신의 입장을 술어의 자리에 둘 때에만 평화가 되고 안보가 된다. 자신의 입장을 주어 혹은 유일한 목적과 동일시하는 순간 주어도 사라진다. 술어의 자리에 둔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여러 가지 기능들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이다.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듯이, 그럴 때에만 딜렘마 혹은 트릴렘마가 해소되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평화가 술어라는 말은 평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입장들을 일단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인정하는 쪽이 주어로서의 평화에 먼저 다가선다. 이미 남북 간에도 힘의 균형이 동일하지는 않은 마당에, 더 큰 힘의 소유자가 먼저 대화와 만남의 계기를 제공해야 한다. 먼저 손을 내밀려면 대화와 나눔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평화적인 길이라는 사실을 힘의 소유자 자신이 먼저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내면에까지 변화를 주는 일은 사실상 정치적 협상이나 힘에 의한 밀어붙이기보다 힘들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의 길은 자기 자신을 술어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인문적 겸손함에 대한 지속적 교육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9-03-27 | hrights | 조회: 267 | 추천: 11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평화는 밥을 공평히 나누는 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대륙에 밥이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대륙에 평화가 있다.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평화를 찾아 가는 일이야 말로 새로운 미래에 대한 도전이다. “대륙의 꿈은 북한을 넘어서지 않으면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말을 신뢰한다. 전쟁에 대한 공포, 양 체제의 반목으로 인한 대립, 즉 분단에서 기인한 각종 불완전 요소가 상재하는 상태에서 대륙과의 소통은 궁극적 평화의 길에 이를 수 없다.  북한은 금단의 땅. 비밀의 전진 기지였다. 70년을 미국과 전쟁했으니 사회 기반 시설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 고기 잡는 어선 한 척의 숫자까지 군사력이고 곧 군사 비밀이었다. 그들이 공식 매체를 통해 발표하는 사항이 아니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제국이었고 더 궁금한 사항들은 행간을 통해 짐작할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의 비밀은 평가에 있어서 양극화되기 마련이다. 지극히 신비화 되거나 철저하게 악마화 된다. 마치 천국과 지옥처럼.  80년대 중 후반, 일부 학생 운동권 세력에 의해 북한이 신비화 된 적은 있으나 그 세력들은 거의 감옥에 갔고 철저한 악마화는 남한 사회에서도 일반적인 일이었다.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과 북 정상이 실질적인 한반도 종전 선언을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의 골간이기 때문이다.  두만강 철교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 올라갔다. 건너편 나진 선봉이 훤히 내다보이는 러시아 국경 하산(Хасан)에서였다. 딱히 국경이라고 느끼기에 너무도 허술한 경계선에 놀랐다. 각진 삶을 사는 이들에게 경계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어서 경계를 조금이라도 허락하는 순간 목숨이 달아나는 듯 한 공포에 젖어든다.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남과 북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지뢰를 묻어놓고도, 빛나는 청춘들에게 살인 무기를 들려놓고도 당연하게 살았다. 그러나 두만강 국경엔 설치한지 4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철조망은 녹이 슬었고 초소가 있으나 총을 든 병사는 없었다. 바람을 거슬러 날개 짓 하는 한 무리의 새떼들은 대륙으로 향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칡꽃 몽우리는 향내 없이도 강 건너 아이들의 놀이터로 달려갔다. 하산역으로 굉음을 울리며 들어오는 화물 열차를 보았다. 기관차의 방향이 북쪽이니 북한의 나진 선봉을 지나 두만강 철교를 건너온 것이 틀림없다. 속도는 약 시속20km를 넘지 않는 듯 보였다. 기차의 칸 수를 일흔셋 까지 세다가 숫자를 잃어버렸다. 그 뒤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기차의 꽁무니에 걸터앉아 나도 평화가 되어 대륙의 어디든 따라가고 싶었다. 사진 출처 - 평화방송  좋던 싫던 친해져야만 한다는 게 실감났다. 무기를 더 쌓아야 평화가 온다는 이 땅의 신념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너무 간단했다. 서로 바라보고 얘기하고 웃고 손잡아야 평화였다. 내가 본 그 국경의 평화는 조, 러 양국이 눈 붉히고 싸울 일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평화의 시대, 대륙의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은 서로 친해지기 위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상례다.  굶어 죽는 사람이 넘쳐 망한다.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 때문에 망한다 했지만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북한의 모습은 활기차다. 평양의 거리는 높은 건물에 휘황찬란한 조명이 번뜩이고 각 도시엔 북녘 동포의 웃음이 넉넉하다. 거기도 당연히 사람이 사는 곳이니 여타의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비길만한 발전의 모습이 없을 리 없고 그것으로 신기해 할 필요는 없다. 다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분단 70여년 더욱이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30여년 마땅한 우방에 기대지 않고도 그 세월을 견뎌온 북한 사람들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다  모두들 “북한이 변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설마 북한만 자신이 원하는대로 변하고 자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겠다는 궂은 심보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교류와 소통은 당사자 간의 호흡을 주고받는 일이다. 더 좋은 향기를, 더 많은 웃음을 나누기 위해 쌍방 간에 노력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10만의 평양시민들에게 호소했다. 평화로 새 시대를 열어 가자고. 뜨거운 박수로 그들은 화답했다. 서로 덕담을 했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벌써 아득한 이야기로 변했지만 그날의 뜨거움은 언제나 유효하다. 제 2차 북미회담의 미합의로 인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답보는 곧 언론과 여론의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또 하나의 겨레를 맞이하기 위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평화로 가는 길이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9-03-21 | hrights | 조회: 230 | 추천: 8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남이란 말이 있다. 한국남자의 줄임말이면서 ‘가부장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문화와 사고’를 가진 한국의 남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다. 이 말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당연하다. 누구든 혐오 표현에 불쾌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지난 연말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한국, 남자>라는 책을 홍보하며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라는 제목의 이메일 광고를 내보냈을 때 많은 남자들이 자신을 ‘한남’ 취급하는 데 항의하며 회원 탈퇴했던 소동이 있었다. 이 소동은 예스24 측이 사과문을 게재하는 걸로 마무리되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와 한남 담론이 얼마나 예민한 주제인지를 보여준 사건이라 할 만하다.  많은 남자들이 ‘한남’이라는 말에 불쾌감과 억울함을 토로한다. 하지만 오래 동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수많은 ‘...녀, ...년’으로 비하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왔다. 남성혐오의 언어로 한남이 등장한 건 최근이지만 지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여성혐오의 언어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쓰여온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여성혐오의 주체는 물론 남성이다. 최태섭의 책 <한국, 남자>는 이른바 한남을 조롱하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의 남성성, 남성문화가 형성되고 변화해 온 역사를 통해 지금 한국 남자들이 ‘한남’이라는 단어 앞에서 느끼는 불쾌감과 모멸감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사회학적 연구서에 가깝다. 최태섭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청년 세대가 겪고 있는 착취와 소외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다양한 책과 글을 써온 사회학자이자 문화비평가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잉여 사회> 등 저자가 낸 책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청년세대의 문제가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지를 청년세대 자신의 시선으로 분석한 책들로 주목받은 바 있다. <한국, 남자>는 저자 최태섭이 지금까지 천착해 온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가 처해 있는 현실, 불안과 좌절의 의미에 대한 일련의 연구 작업의 연장에 있다. 사진 출처 - yes24  이른바 남성성의 문제, 혹은 위기는 단지 한국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인구문제, 노동시장 구조의 변화 등 사회적 혹은 문화적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여주긴 하지만 지금 ‘보편 인류’였던 남성성이 크게 도전받고 있는 양상은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속에서 한국의 남성성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변화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 전쟁과 군부독재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장기 불황에 이르는 동안 ‘남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분석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남성성의 맥락에서 새롭게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젠더 갈등이 어떤 연원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남자 자신도 잘 모르고 있던 남자, 혹은 남성성에 대해 객관화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남자인 나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환기하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젠더 갈등은 오래 동안 젠더 권력을 누려온 남성들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충분히 사유하지 않으면 풀리기 어렵다. 이 책에서 그려내는 남성성의 역사를 보면 남성성의 권력 자체도 사실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 속에서 구조적으로 호출되고 이용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성 권력은 사실 권력이 아니라 굴레이고 억압이었으며 지금 한국의 남성들이 겪고 있는 곤란함이 여성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른바 젠더 갈등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의 주체로, 또 타인과 연대하고 돌보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은 그런 사유의 한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9-03-13 | hrights | 조회: 212 | 추천: 5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최근 한 시사프로에서 청소년의 자해에 대해 “그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그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고단한 현실 속에 고립되어 자신의 신체를 해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소시키는 것” 이라 했다.  2018년 여름부터 학교에서 자해를 시도하는 학생들이 갑자기 일시적인 유행처럼 증가했다. 그 중 원인으로 대두되었던 것이 청소년들이 출연해 랩 실력을 겨루는 TV프로그램에서 본 한 래퍼(Rapper)의 손목 자해 흔적이다. 상흔이 래퍼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자해는 멋있다’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 행위로까지 이어지고,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어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에 인증 사진을 남기거나, 구체적인 방법이 공유돼 부추기는 현상까지 나타난 것이다. 이때 제대로 된 공감에 대한 고민이나 매뉴얼조차 갖추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 자해 청소년을 지도하는 일이 상담교사와 담임교사의 재량에 맡겨지는 현실이다 보니 학생과 교사 모두 괴로운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진 출처 - © 2018 Paediatric Foam  손목에 붕대를 감고 다니던 여고 2학년 선우(가명)도 한 달에 한 번씩 손목에 30개가 넘는 흔적을 망설임 없이 보여 주며 “이런 행동이 뭐가 문제가 되냐? 엄마와 친구들도 알고 있지만 잘 지낸다. 상관하지 말라”고 소리치곤 했다. 그런 선우의 모습에 당황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이런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다’는 식으로 충고하며 눈감아 버렸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너무나 쉽게 나의 기준과 경험으로 했던 충고는 선우에게는 또 하나의 상처였을 것 같다.  자해하는 자녀를 둔 한 부모는 방송에서 "자해라는 건 내가 정말 죽기 위한 게 아니고 나를 봐달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다." 라고 했다. 이 부모의 말처럼 자해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힘들었던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들어주고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을 가질 때 상처를 가진 아이들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나와서 치료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는 우리에게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공감은 연고이자 치료제다.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과 훈계는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한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시작되는 순간 소통은 불통으로 바뀌고 상대는 마음의 문을 닫고 문고리가 열리지 않도록 굳게 문을 걸어 잠근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당신이 옳다」중에서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9-03-07 | hrights | 조회: 221 | 추천: 3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거짓정보와 허위가 판치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5․18망언’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과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국가의 차원에서도 분명하게 공인된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폭동”으로 날조하고, 목숨을 내놓고 민주주의를 사수한 시민들과 말할 수 없는 아픔의 세월을 보낸 유가족을 “괴물집단”으로 매도하는 일이 21세기 대명천지에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광주폭동’으로 날조했던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은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여당이었던 김영삼 정부 때 내란 및 군사반란으로 단죄 받았다는 사실을. ‘5·18’의 역사적 성격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고 법정기념일로도 지정한 것도 1997년의 일이다. 지 아무개 씨가 주구장창 떠드는 ‘북한군 개입설’은 전두환 정권조차 제기하지 못했던 허위선동으로 이미 법원 판결을 통해서 근거 없음으로 판명 났다. 박근혜 정부의 국방부조차 “5·18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마무리한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소속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은 “우파는 5·18 문제만 나오면 꼬리를 내린다. 힘 모아 투쟁하자”,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으로 세금을 축낸다. 명단을 공개하라”는 따위의 망언을 쏟아냈다. 망언을 한 사람과 장소를 감안하면 충격은 경악으로 변한다. 시정잡배도 아닌 국회의원이, 음습한 밀실이 아니라 신성한 민의의 전당에서, 다름 아닌 자기 나라 역사와 국민을 능멸하다니. 밥값 못하는 얼빠진 인간도 더러 있는 게 세상이라도 해도, 나랏밥 축내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국회에 있다는 건 세상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은 더욱 기괴하게 전개되었다. 명색이 당 대표와 최고위원에 출마한 사람이 국회에서 피땀으로 일궈온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능멸했음에도, 자유한국당은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짓밟는 망언을 ‘다양한 의견’으로 치부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존재할 수 있다”고 했고, 김병준 비상대책위원장은 11일 해당 의원들의 징계 요구에 대해 “보수정당 안에 스펙트럼과 견해차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자체가 보수정당의 생명력”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그것은 충분하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어 보인다. 김병준 위원장은 스스로 당을 대표해 사과한다면서도 망언 의원들에 대한 윤리위 처리 문제를 어이없게도 원내대표에게 떠넘겼다. 한국당이 추천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 후보 3명 중 2명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거부한 데 대해 반발하고 나선 건 더 어처구니가 없다.  문제가 된 자유한국당 추천 진상조사위원들은 이미 추천할 때부터 극우이념 성향으로 부적격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인물들이다. 한 사람은 군 출신 보수인사로, 군이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주요세력이란 점에서 과연 제대로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한 사람은 기자 출신으로 1996년 <월간조선>의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와 과장”이라는 기사에서, 이미 사실로 밝혀진 계엄군의 중화기 사용, 공수부대원들의 성폭행 의혹 등에 대한 보도가 과장·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거 경력과 발언을 토대로 ‘5·18민주화운동’관련 단체들도 이들이 진상조사위원으로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자유한국당에 재추천을 요구한 바 있다. 따라서 청와대의 임명거부와 재추천 요구는 역사의 진상을 편견 없이 공정하게 규명하자는 시민들의 열망에 부합하는 당연한 조치인 셈이다,  자유한국당이 ‘5․18망언’을 진정으로 반성한다면, 망언을 한 의원들에 대한 엄중한 단죄는 물론이고 진상조사위원의 즉각적인 교체와 같은 행동을 취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모독한 의원들에 대해 얄팍하게도 당규를 내세워 보호막을 제공했다. 잘못된 추천을 반성하기는커녕 “한국당과 국회를 무시”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식의 대응을 고수한다면,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석방 운운하며 탄핵 이전으로 회귀할 것을 꿈꾸는 반(反)헌정세력일 뿐만 아니라 ‘5월 광주’를 유린한 전두환 군부독재로의 퇴행을 기도하는 반(反)역사세력으로 고착되고 기억될 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가 저들에게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라는 씁쓸함이 몰려온다. 옳고 그름은 정의가 아니라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 마음의 진정성이 아니라 형식적 제스처(gesture)가 표를 얻는 데 효과적이라는 믿음, ‘눈 가리고 아웅’식 대응으로도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경험, 혹세무민에 능수능란한 아군 언론이 있다는 현실의 세계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정의와 진실과 정공법과 정도(正道)를 말한들, 그게 먹히기나 하겠는가! 당장 그들에게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란 수학문제가 아니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풀리면 밑지는 사람들이 방해하기도 하는, 그게 일반적인 세계다. 그럴지라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주인이기에 자기 살림이 결딴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여 막스 플랑크(독일의 물리학자, 1858~1947)가 ⌈과학 자서전⌋에 남긴 말을 빌려 긴 호흡의 희망을 상기하고 싶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새로운 세대가 자라남으로써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9-02-20 | hrights | 조회: 328 | 추천: 4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다가오는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민족과 민중이 걸어가야 할 미완성의 꿈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  대결과 불신으로 얼룩진 한반도에 긴장완화와 평화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르익고 있다.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이 완전히 무장 해제됐고 비무장지대(DMZ) 내 전방 감시초소(GP)에 대해서도 동시에 시범철수를 했다. 한강하구 공동이용수역에 대한 남북공동수로조사 결과를 반영해 만든 해도가 북측에 전달됐다. 작년 말 남북은 도로·철도 연결 착공식을 열었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긍정적 전망이 밝아지고 있다.  세기적 숙적인 북미 간의 분위기에 세기적 대전환이 일고 있다. ‘투자의 귀재’라는 미국 투자가 짐 로저스의 올 3월 북한 방문 가능성이 보도되고 있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획기적 진전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짐 로저스는 대북투자 낙관론을 가진 미국의 투자가로서 “대북 투자 대박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가 모은 전 재산을 북한에 투자하고 싶다”고 최근에 발언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윗에서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의 지도력 아래 위대한 경제 강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에 해당하는 발언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종전선언을 넘어 평화협정으로 가는 합의안이 도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최근 한미연합사령관은 평화협정 체결 후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상식적 발언이고 우리 민족, 민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프로세스의 최종 단계에 해당한다. 2월 13일 오전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금강산 새해맞이 연대모임' 참석자들의 해맞이 행사가 열린 해금강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바야흐로 한반도의 주인공인 남과 북의 우리 민족, 민중이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꿈이 현실로 무르익어 가는 때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할 일이 많다. 여전히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오해와 불신의 늪이 있다. 또한 적대와 대결이 난무하는 낡은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세력이 망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북한이 경제 강국이 되고, 군사분계선 일대가 말 그대로 비무장화되고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전쟁이 사라지며 남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북한의 경제가 발전하고 한반도에서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남과 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혹시 뿌리 깊은 적대와 불신에 사로잡혀 한반도를 달구는 새로운 변화에 체질적 거부감을 갖고 적화통일의 악몽에 잠 못 이루는 국가보안법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동족에 대한 최대한의 제재와 압박이라는 당치 않은 경제제재가 사라지고 외국군대가 철수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우리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남북공영발전의 시대를 맞이하고 자주적 평화통일로 비약적 경제부흥으로 도약하는 통일국가를 달성할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꿈은 결코 되돌릴 수 없고 실질적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반드시 실현해 내야 할 당면의 과제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9-02-14 | hrights | 조회: 356 | 추천: 12
-강사법 개정과 대학, 교수-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그렇게도 기를 쓰고 보내려는 대학의 민낯을 보여주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대학 교육자가 교육을 담당하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달 중 시행령 예고를 앞두고 있는 강사법의 주인공, ‘시간강사’ 얘기다.  역사를 공부한 나의 짧은 식견으로 볼 때 몰락은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작은 조짐들이 있다. 대개 많은 경우 어리석어서 그 조짐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결국 조짐은 어느 틈엔가 홍수처럼 손쓸 틈도 없을 만큼 커지고, 모른 척했던 ‘생각 없는 자들’을 덮친다. 강사법 개정에 즈음하여 대학과 교수사회가 보여주는, 작태라는 어감으로도 감당키 어려운 타락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상식과 협잡  음지에 은폐되어 있던 '대학교원 강사'의 참혹한 처우가 공론화되어 강사법 개정이 논의, 추진된 지 30년째다.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표류하던 강사법은, 한해가 저물어가던 작년 11월 들어 강사의 교원신분보장, 처우개선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도출할 수 있었다. 대학 교육의 30% 이상을 담당하면서 '교원'조차 아니었던 신분, 평균 800만원이라는 연봉 아닌 연봉을 조금씩이나마 정상화, 현실화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학 중 임금지불이나 임용조건, 처우 등은 정관이나 학칙에 맡겨져 있어 대학이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사법 시행에 즈음한 대학의 대응은 사회의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보기 힘든 꼼수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4대보험을 제공하지 않기 위해 강사들에게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면 강의초빙교수로 채용해주겠다고 제안하거나, 학부 졸업에 필요한 졸업학점을 축소함으로써 강사 인건비를 줄이거나, 강의 당 폐강 기준을 20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등(KBS 보도) 강사법의 시행이 목표로 했던 교육의 질 향상과 강사 처우 개선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잘난 자들  올해 들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와 강사노조, 대학 등으로 구성된 ‘대학 강사제도 개선 협의회’의 합의안 가운데, 대학평가지표에서 강사지표를 빼달라는 집요한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책동은 국립대나 사립대, 이른바 명문대나 아닌 데나 마찬가지이다. 한국 대학이, 대학 행정가들이 어쩌다 이렇게 측은한 존재들이 되었을까?  강사라는 위상은 대학교육에서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비록 강사 지위의 열악한 구조로 퇴색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사는 역사학, 법학, 의학 등 해당 학문의 새로운 세대들이자, 정규직 교수들의 동료이다. 학생들에게는 해당 학문이 사회에 갖는 가치와 기여를 전달하는 엄연한 교육자이다. 또한 가족과 함께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다. 허나 이들 학문의 허리이자 동시대 시민들은, 그들의 터전인 대학과 동료이자 선배이며 스승인 정규직 교수들에게 외면 받으며 학문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던져야 했다.  강사법 시행을 앞둔 지난해 11월 20일, 서울대 단과대 학장과 대학원장 22명은 강사법 개정이 “대학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국회의장 등에게 보냈다. '강사법으로 유발되는 재정적 적자'에 대한 우려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고생하는 학문혁신세대인 시간강사들에 대한 처우와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는 원칙에 동의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고생하는 학문혁신세대'의 현실을 개선할 어떠한 조치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말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사진 출처 - 미디어숨 대안과 실증  이들의 공허한 말이 나는 왜 이리 측은할까? 학문과 교육과 동시대인들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결여한 지식인들의 빈 깡통 같은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대학 등록금과 정부지원금으로 평균 1억 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교수들과 직원들에게 연봉 800만원의 강사의 삶은 정녕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일까?  아니라고? 그러지 않다고? 공감하고 있다고? 그럼 제안 하나 하자. 얼마 전 동료교수의 말에서 얻은 힌트이다. 대학 별로 교수들이 연봉의 10%를 삭감해서 그 재원으로 강사처우를 개선하는 데 쓰자. 세세한 방법은 각자 찾자. 《참고자료》(고려대학교 강사법관련구조조정저지 공동대책위원회 2018년 11월 22일 문건)를 바탕으로 논증 겸 사례를 연구해보자. 물론 반론도 환영한다. ○ 2017년 고려대학교 결산안을 바탕으로 추산한 결과, 전체 수업의 약 30%를 담당하는 시간강의료는 서울, 세종, 의대를 모두 포함하여 101억 정도(서울 83억, 의대 1억6천, 세종 16억). - 101억 원은 고려대학교의 2017년도 총 수입인 6,553억 원 중 1.55%이며, 산학협력단 예산 약 3천억 원까지 포함하면 이 비율은 1%로 떨어진다. - 다시, 101억 원은 전체 교원보수 약 2,296억 원 4.43%. 이에 반해 대학 측에서 강사법 개정으로 추가되는 비용의 추정 최대치는 55억 원으로, 2017년 기준 학교 총 수입의 0.8%.(55억 원인 시간강사료의 인건비는 또한 교수 수당인 ‘교원각종수당’ 296억 원의 약 1/3에 해당) ∴ 고려대의 경우, 추가 증가 비용 55억 원은 교원보수 2,296억 원의 약 2.4%이므로, 10%가 아니라, 3% 이하만 삭감해도 강사법 정착에 문제가 없다. 이건 정부지원금을 뺀 수치이므로 그걸 보탤 경우 실제 수치는 더 내려갈 수 있다.  이 정도의 노력으로 제자이자 후배들이 편히 또 그들의 후배이자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다면, 대학이 몰락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학자의 체면을 살릴 수 있다면, 무엇보다 양심이 조금 편해질 수 있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대부분 속으로 이 10%를 삭감하지 않을 이유부터 찾으리라는 것, 잘 안다. 또 구조적인 해결이 중요하네 어쩌네 하며 쌈짓돈이 줄어들 것을 걱정할 수도 있다. 허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대학이 측은할 정도로 천해져있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연변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9-01-23 | hrights | 조회: 485 | 추천: 18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연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썩소’가 화제에 올랐다. 썩소는 고3 때 나의 담임선생님 별명이다. 그는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 같은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폭력 교사’였다. 얼굴이 심하게 얽은 분이었는데(그때는 그걸 곰보라고 불렀다), 아주 가끔 웃을 때면 하얀 치아가 검은 얼굴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뤘다. 미소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웃을 때 그러하듯 영 어색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썩은 미소’, 줄여서 썩소였다.  어느 날 썩소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는 수업을 하지 않고 자습을 시켰다. 그는 이어폰을 꺼내 휴대용 라디오를 들었다. “쉿! 지금 각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는 강시 같은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우리를 침묵하게 한 뒤 이어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당시 각하는 전두환이었다. 나중에 추론해 보니 그 방송은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4·13 호헌조치’ 담화문 발표 방송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경기도 한 위성도시의 삼류 학교였고, 우리는 6월 항쟁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던 무지렁이들이었으며, 선생님은 요즘 말로 하면 ‘전빠’였다.(이 분이야말로 전두환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믿어의심치 않으실 분이다.)  썩소 선생님은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분이라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례적으로 길게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울산에서는 너희들보다도 공부를 안 한 무식한 놈들이 대졸자들 만큼 월급을 올려달라고 파업을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느냐.’는 취지였다. 현대차라는 고유명사도 거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나중에 알고보니,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의 일장훈시는 내 인생 최대의 화두로 남았다. ‘공부 안(못) 한 사람은 월급을 많이 받으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이 질문에 우리 사회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입시 제도를 수십번 바꿔도 입시 경쟁이 줄어들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현상의 원인도 이 질문과 관련이 있다. 화제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의사 아버지의 승진 경쟁보다도 자녀들의 성적 경쟁이 더 중요한 일처럼 묘사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우리 사회가 확립한 대답과 관련이 있다. 미국의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에 올라왔던 만화. 한국인의 육체 노동 경시 풍조를 풍자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속한 세대는 썩소 선생님이 메시아처럼 떠받들던 전두환-나는 이들을 아버지 세대라고 부른다-을 상대로 싸웠지만(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성과를 이뤘지만), 이들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체제의 규칙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식들에게 전수했다. 그냥 전수만 한 게 아니라 그 규칙에 뼈와 살을 붙여 훨씬 공고한 시스템을 완성했다. <스카이캐슬>의 7년 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방송사의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본 사람이라면 <스카이캐슬>의 설정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학부모를 쥐고 흔드는 강남의 초엘리트 사교육 권력이 더 강력해진 캐릭터(입시코디네이터 김주영)로 돌아온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은 초등학생에서 고3과 중3으로 자랐고, 사교육 시스템은 복잡해진 입시제도 만큼 더 치밀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서울대 의대를 강요하는 부모를 상대로 복수를 기획하고 감행할 정도로 끔찍한 인간성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공부 강요하는 부모를 자식이 살해하는 일은 실제로 왕왕 일어난다.)  다들 알다시피 사교육 시장의 주요 공급자와 수요자는 이른바 86세대다. 86세대 일부는 한때 대안학교 붐을 일으키며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자 시도했으나, 이제 대안학교조차 서울대에 몇 명 보내느냐가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돼버렸다. 조희연 교육감의 최근 발언을 보라.(“서울대 의대 두 명 보냈다.”) 물론 혁신학교의 학력 저하 주장을 반박하느라 나온 말이긴 하지만 이 시대의 욕망을 정확히 반영하는 장면이다. 학력숭배(간판숭배)는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가 된 지 오래다. 썩소 선생님의 소신은 이 시대의 종교가 되었다. 이제 더이상 사람들은 학력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노력과 능력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력에 따라 직업과 연봉이 달라지고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오로지 평가 과정의 공정성이다. 평가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경쟁은 당연한 것이고 승자독식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게 86세대만의 탓은 아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경쟁주의 세력은 전교조로 대표되는 참교육 진영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예봉을 꺾었고, 이명박 정부 들어 학력경쟁을 초등학교로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내의 자격>이 <스카이캐슬>로 진화한 지난 7년 동안 이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내의 자격>의 대결 구도-국제중 전문 입시학원 대표 홍지선(이태란) vs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윤서래(김희애)-에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윤서래를 응원했었다. 돈과 성공에 눈이 먼 홍지선과 착하고 인간적인 윤서래 사이에서, 윤서래가 비록 불륜의 주인공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윤서래를 지지했었다. 그런데 <스카이캐슬>은 좀 다르다. 딸 예서의 서울의대 입학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서진(염정아)과 역시 사교육을 시키지 않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이수임(이태란)의 대결 구도에서 시청자들은 맘 편히 이수임을 응원하지 못한다. 한서진이 감추려던 과거(시장에서 내장과 선지를 팔던 집 딸이었다는) 치부를 드러낸 이수임을 비난하는 시청자들도 꽤 있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진 이 설정은 사교육이 우리 안에 더욱 깊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메타포가 아닐까. 사교육을 줄이고 획일적인 입시 교육에서 벗어나자는 참교육의 이상은 점점 더 딴 세상 이야기가 되어간다. 문재인 정부도 그런 방향으로의 교육 개혁은 꿈도 꾸지 않는 것 같다. 이대로 가면 학력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 역시 더욱 커질 것이다. 아이들은 더욱 심각한 입시 지옥에 빠져들 것이고, 부의 편중 또한 심화할 것이다.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체제의 작동 원리로 설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사슴은 뿔로 싸우고, 기린은 목으로 싸우듯이, 지능이 발달한 인간이 머리로 경쟁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러나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 경쟁을 죄악시했던 사회주의가 지나친 획일주의로 망했듯이, 경쟁만을 최고의 덕목으로 떠받들며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는 바로 그 획일적 경쟁주의 때문에 망할 수 있다.  교육과 노동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입시경쟁 완화의 근본 대책이 노동 및 분배 정책에 있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이 낡은 주장조차도 제대로 인식하고 실행에 옮기려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대신 이렇게 저렇게 교육 정책을 바꾸는 대증 요법에만 치중해 왔고, 그 실패 앞에서 자못 허탈한 심정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것 아닌가. 또는 <조선일보> 따위의 논리에 굴복했다는 치욕감에 아예 잊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노동 존중론이 나의 이 낡은 주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낀다. 최저임금 천원 올렸다고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이 여전히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후진적 풍토에서 육체노동의 사회적 가치와 평가를 높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 나라의 하드웨어를 바꾸는 데 성공했듯이, 운영체제에 해당하는 교육과 노동 정책도 바꿀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세대의 마지막 과제가 아닐까.  한 가지 유념할 것은, 정책을 바꾸는 것보다 인식을 바꾸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공부도 못(안)한 것들이 어따 대고….’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 천박한 인식이 지금 우리와 무관한 것이라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이 인식을 바꿔내는 것이 진정으로 전두환을 이기는 길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9-01-16 | hrights | 조회: 503 | 추천: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