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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말[死語] (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6-20 18:31
조회
443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6.13 전국동시지방선거 운동이 시작되자마자 저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제1 야당의 선거 구호가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중간에 ‘나라’에서 ‘경제’로 단어가 바뀌었지요. 그것이 나라든, 경제든 상관없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통째로 넘겨야겠냐는 말이었으니까요. 그동안 그들의 말을 살펴보건대 선거구호 문장에서 생략된 그 ‘누구’는 분명 ‘좌빨’ 혹은 ‘빨갱이’ 아니면 ‘종북’쯤 되는 단어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냐 마냐 하는 중대한 선거다, 자신들에게 표를 던지지 않으면 빨갱이들 손에 나라가 망한다라는 말이었겠지요. 아무리 선거판이라 해도 그렇지,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당에서 배출한 두 전직 대통령이 죄수복을 입고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마당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습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거 당일, 투표를 마치고 출구조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이런 기사도 보게 되었습니다. 지난 정권에서 청와대 대변인까지 역임(!)했던 국회의원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민경욱 자유한국당(인천 연수구을) 의원이 투표 중인 방송인 유재석씨를 비판하는 게시글을 공유했다. 그가 공유한 글은 “재석아 너를 키운 건 자유민주국민들이다. 이미 너의 사상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 다신 인민국민 날라리들은 꼴도 보기 싫다. 너도 북으로 가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유재석이 더불어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 모자를 쓴 점을 못마땅해한 것으로 보인다.
 민 의원이 13일 공유한 게시물에는 흰 셔츠를 입고 파란 모자를 쓴 채 투표장에 나타난 유재석씨의 모습이 담겼다. 그는 이 게시물을 공유하면서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채만식 선생의 소설 <도야지>의 시대배경은 해방공간입니다. 1948년 미군정 하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세워지는 때, 제헌의회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불원한 장래에 사어(死語)사전이 편찬된다고 하면 빨갱이라는 말이 당연히 거기에 오를 것이요, 그 주석엔 가로되,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孔孟敎人),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밖에도 000과 0000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그리고 차경석의 보천교나 전용해의 백백교 등도 거기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채만식 <도야지> 중에서


 1948년에 10월에 발표된 소설임에도 ‘빨갱이’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게 될 것이라는 작가의 예견(?)은 놀랍기만 합니다. 하지만 ‘멀지 않은 날에 죽은 말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무려 60년 동안이나 같은 식으로 우려먹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진 출처 - MBN


 이번 선거에 참패한 ‘통째로 넘긴 당’은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는 처절한 반성을 통해 새로워지겠다고 거듭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그 당에서 출마, 서울의 한 구청장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의 사례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물보다 정당을 택한 민심, 반성하고 새롭게 뛰겠습니다. 28.1% 고맙습니다.’


 그리고 ‘빨갱이없는나라만들기국민운동본부’ 대표를 지냈다는 경기도의원 낙선자인 한 후보는 고양시의 어느 사거리에 크게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이재명 같은 자를 경기도지사로 당선시킨 여러분, 저 최성권 낙선 시켜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경기도의원 낙선자 최성권 드림’


 북미 대화가 성사된 직후 소위 ‘태극기 집회’ 사진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그중 서너 명이 성조기와 트럼프 사진이 아닌 일장기와 아베의 사진을 들고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다른 손에는 한미동맹이 아니라 ‘한일동맹’이라고 쓰인 피켓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미국 대통령 트럼프도 빨갱이가 된 걸까요? 어쨌거나 아무리 그래도 ‘불원한 장래’에 빨갱이라는 말은 분명 사어(死語) 사전’에 실리게 되겠지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