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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희망 (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4-04 11:23
조회
572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의 다정함이 절대적으로 실감된다. 추위가 유난히도 길고 깊었던 겨울의 끝에서 맞이한 봄은 더욱 반갑다. 특히 올 봄은 자연만이 젊음을 되찾는 계절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활력을 되찾는 시절이 되리라는 기대까지 더해져서 희망차게 기쁘다. 자연이 부활하는 계절에 한껏 부풀어 오른 희망을 따라 두서도, 정처도 없이 생각의 길을 거닌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기본형태”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침내 그가 수인번호 716이 되었다. 기쁘다! 구속 직전 “지난 10개월간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고 토로했다는 데, 검찰이 진즉에 그의 고통을 줄여주지 않은 건 아쉽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후련하다. 물론, 구속이 곧 처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구속이 정의의 구현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거니까 부귀권세에 상관없이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사회가 존속되려면 이런 최소한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


 기실,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악을 행하면 더 크게 벌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살만한 처지에서 덕을 베풀진 못할망정 죄를 범하였으므로. 716은 수십 년에 걸쳐 그런 범죄행각을 벌여왔다. 상습적이다. 그래서 더 악질적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자신이 평생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왔는데 정치적 탄압에 의해 불의하게 구속된 것인 양 군다.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정직”이라는 가훈. “정직”이 정녕 가훈으로 내걸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가족 모두가 ‘탐욕 앞에 정직하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형제들, 아내, 아들, 사위 할 거 없이 거의 가족 모두가 범죄 혐의자라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단군 이래 이만한 가족은 없었지 싶다. 아니, 어쩌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초유의 가족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716이 국회의원, 서울시장, 대통령 직을 거치는 동안에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불법적 혜택을 받지 않았다면 몰라도, 특혜는 한껏 누렸으면서 이제와 가족이라는 관계를 내세워 슬쩍 면죄부를 받으려 든다면, 인정사정없이 오직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해야 할 줄로 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라는 자평. 이 표현은 “도둑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의 오기로 보인다. 증거가 없는 악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증거는 자기다. 정신이 어긋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설사 남은 모를 지라도 자기는 안다. 이건 380여 년 전에 데카르트 형님이 사고실험을 통해 논리적으로 뒷받침을 해 놓은 사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이에도 내가 이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것. 내가 이렇게 의심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스스로 의식하는 나는 여기에 분명히 있다는 것. 바로 그것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716이 자기네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하는 말을 어떤 식으로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사진 출처 - SBS


 게다가 아직까지는 716이 헌법을 유린한 반국가 사범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드러나지도 않았다. 구속영장에 나타난 그의 혐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 국고손실 · 조세포탈,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수뢰 후 부정처사, 정치자금 부정수수,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정도다. 이것만 보면 그는 정치사범이 아니라 경제 사범처럼 보인다.


 716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헌법 제69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서를 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러나 716은 국가를 보위하기는커녕 보란 듯이 국고(國庫)를 탈탈 털어가려고 온갖 궤변과 꼼수를 다 동원했다. 조 단위로 나랏돈을 해먹은 언필칭 자원외교의 사기극과 멀쩡한 강을 살리겠다며 4대강과 그 주변 생명들을 해친 반(反)생태적 범죄에 대해서도 철저히 따져서 죗값을 물게 해야 한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716이 대선에서 내걸었던 747공약은, 당시 풍자적으로 회자되었던바 그대로였다. (대통령이 되기만 해봐라, 내가) ‘칠(7) 수 있는 사(4)기는 다 칠(7)꺼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불의와 파괴에 국가적 사업이라는 이름을 들이대면서 합법적인 정책으로 만든 것이다. 사악하게 얻은 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협잡(挾雜)과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마치 그것에 옳은 일인 양 치장했다. 사익을 공익으로, 불의를 정의로, 악을 선으로 탈바꿈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시켰던 것이다. 같은 정파에 나온 그의 후임자가 503이 된 것은-비록 수인번호는 먼저 달았지만- 일견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먹어도 탈나지 않는데 나도 이쯤이야 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법률적으로는 716에게도 마땅히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돼야겠지만, 양의 탈을 쓰기만 하면 탐욕스런 늑대들이 우화의 세계가 아니라 공적 현실에서 활개 치게 만든 역사적 유죄를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만큼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을 몰아내자는 것, 그게 적폐청산의 한 축일 것이다. 비리나 부정, 불의와 탐욕 같은 악습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고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만들 수는 없는 노력이다. 불의한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그런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기를 꿈꿨던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정실과 탐욕이라는 이 두 가지 악이 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리면 곧 모든 정의의 파괴자가 된다. 사회의 가장 강력한 접합제인 정의가 파괴되는 것이다.” ⌈신국론 De Civitate Dei⌋의 저자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교부(敎父)였던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없애버린다면 국가는 도둑집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설파한 바 있다. 과연 그렇다! 만백성의 십시일반으로 채운 나라 곳간을 터는 일을 본업으로 삼은 자들은 도둑놈들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 부를 것인가? 그런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엄벌하여 아예 뿌리를 뽑자는 적폐청산을 정의구현이 아니라 한사코 정치보복이라고 읽는 자들도 있다. 십중팔구, 제 발이 저린 자들이거나 탈이 벗겨질 것을 두려워하는 이리 같은 무리들이다.


 그들이 뭐라 하든, 만인이 만인에 대해 이리 같이 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봄이다. 비단 적폐청산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해빙과 미투(Me too)운동의 전개도 긍정적 기대를 마음을 밝고 환하고 따뜻하게 해준다. 흔히 봄을 희망에, 여름은 실행에, 가을을 결실에, 겨울을 휴식과 준비에 비유해 왔다. 사계절의 변화를 농사짓는 일에 연결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때의 기본 감각이다. 물론 인생은 곡식이 자라듯이 그렇게 철따라 매듭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자연의 계절과 인생의 계절이 꼭 일치한달 수는 없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봄에만 좋은 일이 있고, 가을에 꼭 풍성한 결실을 거두리란 법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봄은 봄에 즐겨야 한다는 마음을 거두고 싶지 않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