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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2-13 16:13
조회
646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책 읽고 말하기를 업으로 삼기 시작할 무렵,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책의 세계가 현실 세계에 지지 않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었다. 신의 섭리나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힘으로 거짓과 기만을 타파하고 정의롭고 계몽된 사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힘이 아니라 말로, 물리적 탄압이 아니라 합리적 대화로, 이성적 논증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었다. 감춰진 진리가 드러나면,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그동안 무지와 편견을 조장했던 어둠의 세력에 대해 단죄(斷罪)를 외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라고 말한 독일의 어느 철학자의 말을,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어야 하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새겼다.


 역사에 관해 당구풍월(堂狗風月)한지 서른 성상(星霜)도 더 지난 지금은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꿈꾸지 않는다기보다는 꿈이 실현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더 이성적으로?) 되었다. 2018년을 한 달 앞둔 지금도 현실 세계는 여전히 책의 세계보다 힘이 세다. 책의 세계를 지배하는 명징하고 싱싱한 이성적 주장이 널리 알려지면,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되리라는 생각은 틀렸다. 이성적 논증으로 거짓 주장을 반박하면 사람들이 기꺼이 그릇된 주장을 버리리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거짓과 기만에 사로잡힌 편견인데, 누구는 그것을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들인다. 확신에 찬 사람이 바뀌기란 어렵다.


 왜 그럴까? 특히 정치적으로 보수를 자처하거나 보수주의적 정견을 지닌 사람들의 속내가 나는 궁금했다.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와 행동은 대체로 이해관계의 속셈에 따라 갈라진다는 학설도 들어 보았다. 가진 게 많고, 지킬 게 많은 사람일수록 정치적 보수주의에 경도된다는 언설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지킬 권력은 더욱 없는 사람들은 왜 ‘보수’(편의상 ‘보수’라고 쓰지만 ‘수구’라고 새기는) 정당을 지지하는 걸까? 명명백백한 사실을 보고도 저 지역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럴까? 오랜 세월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이데올로기 공세’나 허위의식 조장 탓이라는 해석에 일견 수긍하면서도 앓던 이가 빠지는 개운함은 얻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에 그들의 머릿속을 환히 들여다보았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주는 책 한권을 발견했다.



사진 출처 - yes24


 ⌈똑똑한 바보들-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 The Republican Brain:
The Science of Why They Deny science and Reality⌋. 원제와는 다소 다르지만 책 제목부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지정보를 확인해 보고서야 2012년에 번역 출간된 책이며, 저자인 크리스 무니(Chris Mooney)은 과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알았다.(부끄럽다!)


 저자는 보수주의자를 무작정 공격하거나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보수와 진보는 뇌부터 다르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다양한 과학적 실험 자료를 활용하여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뇌(심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굉장히 흥미롭게 분석한다. 이 책의 큰 전제는 모든 사람은 동기에 영향을 받으며 편향되게 사고한다는 ‘동기화된 추론’이다. 즉 자신의 신념을 지지하는 증거만을 선택하고,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는 증거들을 무작정 거부하는 심리현상을 말한다.


  ‘동기화된 추론’은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불편한 사실을 부정하고 반증이 나와도 버티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특히 내게 흥미진진한 대목은 명백하고 과학적인 사실을 갖고 반론을 펼칠 경우에 “백파이어 효과(backfire effect)”라고 불리는 현상을 촉발하기도 한다는 분석이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신념을 굳건히 견지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으며, 모순되는 증거나 논박을 보고 나면 더 집요하게 자신의 틀린 관점을 고집하는 현상”을 말한다(71쪽).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장문의 출생증명서를 공개했을 때 그의 미국 출생을 믿지 않는 자들의 행동이나 사담 후세인과 911테러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게 밝혀졌음에도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태도 등이 그렇다. 저자는 이처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는 보수주의를 “똑똑한 바보 효과”라고 부른다.(74쪽)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의 핵심적 ‘신념체계’는 뭘까? 저자는 “보수주의의 가장 깊숙한 요소”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규정한다. 아니, 그들도 변화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이 이전에 좋았다고 느끼는 것을 회복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다(133쪽). 역사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반동(reaction) 혹은 퇴행이다. 그 방향을 낭만적으로 포장한 자신의 상상 속의 과거이다. 그들은 이전의 상황을 선호하며, 그 이전의 상황이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일 필요도 없다. 존재했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열망하는 것이기만 하면 된다. 


요컨대,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잘못된 신념에 부합되지 않은 과학적 증거라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진보주의자보다 더 강하게 자신의 신념을 방어하며, 최소한 정치 분야에서는 합리적 논증으로 인해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더 적다!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언제나 평등을 증가시키는 진보적 변화와 정책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통선거권의 확립 운동 때도 그랬고, 여성참정권의 확보, 인종차별의 철폐, 인종의 혼인,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폐지 때도 그랬다. 그들의 욕망은 존재한 적도 없는 것을 회복하려는 희망이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인지부조화 타령을 읊어댄다.  


 책 한권 읽고 보수주의(자)를 심리적 차원에서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오해를 두려워 않고 말하자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똑똑한 바보가 된다. 똑똑한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고정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개방적 태도가 필요하다. “진보주의자들을 과학과 팩트에 더 가깝게 데려다 주는 것은, 그들이 동기화된 추론을 일반적으로 덜 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개방성을 갖고 복잡한 세상을 알아 가는데 흥미를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341쪽)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