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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와 감세의 정치학 (강국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2-12 18:49
조회
471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틈만 나면 반만년 이어온 역사를 강조하는 것과 달리 한국 사회는 역사적 맥락에 참 둔감하다. 사회현안을 둘러싼 토론에서 역사적 맥락을 따지는 건 꽤나 낯선 모습이다. 몇 년 전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초(史草) 폐기 소동’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조선 시대 사관이 현장을 기록하는 게 사초다. 그걸 다 모은 뒤 정리해서 실록을 만든다. 실제 조선시대에 사초를 폐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건 심각한 중대범죄다. 그게 조선시대 법이었다. 


 당시 실록을 편찬하고 나면 자하문 밖 세검정 차일암에서 사초를 모두 물에 빨아 내용은 없애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그걸 세초(洗草)라고 한다. 혹시라도 사초 내용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조선시대 법이었다. 그런데도 21세기 한국에선 느닷없이 ‘연산군도 하지 않은 사초 폐기’라는 황당한 주장을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내놓았고, 그게 또 어느 정도 먹혔다. 한마디로 뿌리 얕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쪽팔린 자화상이다. 


 세금인상 문제는 갈수록 중요한 정치쟁점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안은 거센 논쟁 끝에 국회 문턱을 넘었다. 그나마 정권 초기이고 ‘선별증세’에 대한 지지여론이 높은데도 이 정도였다. 이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선은 남북관계보다는 오히려 세금문제다. 세금을 기준으로 해서 노무현 정부는 세금폭탄,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 박근혜 정부는 서민증세로 시대구분이 가능할 정도다. 



지난 6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2018년도 예산안 및 부수법안 처리를 위해 열린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야당에선 증세를 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그럼 다음 인용문은 어떤가. “세금 안 내고 국가가 발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금 없이 국가를 튼튼하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세금 안 내고 우리가 경제 건설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도 없는 것이며, 여러분들 자녀들에 대한 의무 교육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71년 대선에서 야당후보였던 김대중이 내놓은 감세 공약을 비판하면서 박정희가 수원유세에서 직접 했던 발언이다.


 사실 박정희야말로 한국현대사에서 첫 번째 증세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장본인이다. 국세청을 처음 설립한 것도 박정희였다. 종합소득세와 부가가치세도 모두 박정희 정부 작품이다. 당시는 산업화를 위한 자원동원을 위해 세수증대에 몰두했던 시기였다. 첫 국세청장 이낙선은 세입 700억 원 달성을 독려한다며 자동차 번호판에 ‘700’이라고 써놓고 다녔다. 하지만 당시 증세정책은 ‘복지없는 증세’였다. 국민들은 동원대상일 뿐이었고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권위주의는 국가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었다.


 유신체제는 폭압적이지만 또한 취약했다. 세입확대를 통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부문의 자본축적 지원을 위한 감세정책으로 조세정책의 초점을 바꿨다. 1974년 1월 14일 ‘긴급조치 3호’는 상징적이었다. 대통령 뒷담화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른 긴급조치와 달리 긴급조치 3호는 소득세 면세기준을 월 1만 8000원에서 5만 원 이하로 대폭 올렸다. 소득세 납세자의 85%가 소득세를 내지 않게 됐다. 그렇게 박정희 정부는 ‘복지없는 감세’로 돌아섰다.


 아시아 최초로 1977년 시행한 부가가치세는 박정희 정부 조세정책이 갖는 모순을 보여준다. 사실 엄청난 증세정책이고 조세저항과 여론악화도 상당했지만 막상 조세부담률은 1976년 16.1%에서 1979년에는 16.7%로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각종 공제 인상과 비과세소득 범위 확대와 함께 부가가치세를 시행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부가가치세는 ‘감세를 위한 증세’였던 셈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열어제낀 ‘감세 국가’는 오랫동안 한국의 국가정책의 근간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열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집권한 노태우 정부 전반기와 대통령이 나서서 증세문제를 공론화하려 시도한 노무현 정부 후반기가 예외였을 뿐이다. 아직까지는 문재인 정부가 오랜 관성을 깨려는 명확한 시도를 갖고 있는지 확신이 서진 않는다. ‘핀셋 증세’라고 이름붙인 ‘선별증세’는 부자들한테만 세금을 더 걷으니 좋은 정책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치적 갈등에 비해 실제 세입은 기대에 못미친다는게 치명적이다.


 어쨌든 박근혜조차 ‘증세 없는 복지’를 천명했을 만큼 이제 복지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리고 박근혜조차 실제로는 각종 증세정책(금융소득종합과세 인상, 소득세 최고세율 인상, 연말정산 개혁 등)을 했을 만큼 이제 증세는 불가피하다. 대선을 통해 확인된 정의로운 국가, 나라다운 나라, 더불어 잘사는 나라는 모두 더 많은 ‘국가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그러려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우리가 더 많은 세금을 내지 않으면 나라다운 나라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세금을 더 내고, 이건희 손자에게도 억지로라도 무상급식을 먹게 해야 한다.


 두 가지 비교를 해보고 싶다. 한국은 부가가치세율이 10%인 반면 복지국가라는 북유럽 국가들은 25%(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와 24%(핀란드)나 된다. (모든 국민한테서) 부가가치세를 더 걷어서라도 더 많은 재원을 마련해 그 돈으로 (모든 국민을 위한) 복지에 쓴다. 인권선진국일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인권후진국일수록 세금을 더 적게 내는 이유를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싶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