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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보 덕질기 (권보드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1-15 14:52
조회
23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쉰이 다 돼서 생전 안 하던 아이돌 덕질에 빠졌다. 앨범도 안 사고 댓글 한번 달아본 적 없으니 ‘프로 덕질러’들이 보기엔 우스운 수준이겠다만. 연예인을 좋아하기는커녕 TV도 변변히 보지 않고 살아온 인생으로선 신기한 경험이었다. 대체 중독 소양이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뭐든 데면데면으로 일관해 온 성격으로서도 그렇고.


  덕택에 당최 알 수 없었던 ‘빠순이’들의 속내를 조금은 짐작하게 됐다. 이번 학기는 유난히 현생(현실 인생)이 바빠 쉴 짬이 드물었지만, 밤이면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인터넷을 뒤지곤 했다. 맘에 박힌 아이돌의 사진과 동영상을 찾는 것도 즐거웠지만, 비슷하게 열광하는 사람들의 글을 살피는 게 더 재밌었다. 얼라, 빠순학 개론? 그러고 보니 그 세계도 넓디넓다. 지금 같은 아이돌 팬덤이 시작된 게 H.O.T.와 젝스키스가 등장한 무렵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20년. 그 때부터 줄기차게 덕질을 해온 사람들도 적지 않은가 보다.


  한 서너 달, 그 사이 세상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렇잖아도 귀 닫고 살던 걸 더더구나 닫았다. 전쟁 상황에서도 아이돌 팬들은 각자 좋아하는 스타를 더 걱정하려나, 그 사람을 떠올리며 겨우 잠을 청하려나 생각해 보긴 했다. 대부분 여성인 아이돌 팬 중에는 그야말로 ‘덕질을 위해 현생을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이돌 얼굴을 보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가고, 콘서트마다 예매 전쟁을 벌이고, 밤새 줄 서 무료 공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대체 웬 한가한 사람들인가 했더니, 멀쩡하게 정치를 토론하고 문화를 사랑하고 직업에 열심인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20171115web02.jpg사진 출처 - 시사인


 

  사랑의, 친밀성의 이 새로운 형태는 뭐지? 내가 경험하면서도 그 갈피를 다 잡진 못하겠다. 지금의 팬덤은 근대 대중문화와 더불어 출현했던 스타덤과는 크게 다르다. 스타덤이 환상을 소비한다면 팬덤은 환상과 현실 사이 줄타기를 욕망하고, 스타덤이 스타와의 수직적 관계를 중시한다면 팬덤은 팬들 사이 수평적 관계를 통해 스타를 경험한다. 20년 사이 한국에서 팬덤은 무럭무럭 자라나 감정을 훈련하고 관계를 학습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돼 버리지 않았나 싶다. 작년의 촛불집회 때도 그렇고, 굵직한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응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팬덤의 행동양식이 눈에 띌 때가 있다.


  아들 같아서 좋은 것 아녜요? 절대 아니라고 손을 흔든다. 바람피우고 싶은 마음 아뇨? 그건 더더구나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스타가 광고하는 상품을 사고 스타가 나온 잡지를 구매하지만 직접 만나고프진 않고, 스타가 즐거워하는 걸 보는 게 너무나 좋지만 그와 생활을 접하고픈 마음은 없다. 그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게 좋다. 이해관계 없이 좋아할 수 있어서 더 좋다. 그러고 보면 뭔가를, 누군가를 이렇듯 좋아해 본 게 얼마만인가.


  이 마음이 지속되고 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유지된다면 가족을 만들지 않고도 살 수 있으려나. 1987년 이후 지켜봐 온 한국 사회의 변화 중 ‘혁명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그야말로 세계의 근간이 바뀔 수 있겠구나 싶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근 젊은 여성들의 가족 거부다. 명절증후군과 출산율 저하에서부터 페미니즘 논쟁 재점화까지 다양한 상황을 거쳐 온 결혼의 거부, 가족의 거부야말로 장기적 삶의 형태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10년, 20년으로 그칠지, 그 이상 지속돼 그야말로 개인-가족-사회-국가라는 근대적 시스템을 흔들게 될지, 점치기는 아직 이르지만, 어느 쪽이든 젊은 여성들의 가족 거부가 오래 갈 영향력을 미치리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팬덤이 이런 상황의 예고이자 징후이기도 하려나. 덕질이 곧 현실도피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혹시 나는 지금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오래된 관성대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저항할 의욕은 없이 새로운 감정과 관계를 더듬어 보고 싶은 건가. 괜시리 잡생각이 많아지지만, 분명한 건 지금도 그 아이돌의 얼굴을 생각하면 흐뭇해진다는 것. 이것 참, 이제 게임에 빠져보기만 하면 젊은 세대를 좀 더 알 것도 같은데.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