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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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선거일 직전 ‘국민의당’과 전격 합당한 뒤 ‘국민통합’을 내세우며 간발의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운동 중에는 “국민이 키운 윤석열, 내일을 바꾸는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당선 소감으로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오직 국민만 믿고 오직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국립현충원에 참배하면서 “국민과 함께 통합과 번영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그 뒤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당선인 직속으로 ‘국민통합특위’도 꾸렸다. 선거 전후해서 가장 많이 한 말이 ‘국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일견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해야 할 무난한 말들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국민’이 무엇인지, ‘그 국민’이라는 말이 누구를 지향하고 있는지, 그 실질을 진정성 있게 고민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국민의 뜻’ 운운하는 말이 워낙 광범위해서 곰곰 따져보면 아무 뜻도 아니거나, 자기에만 유리한 ‘나의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넘쳐나는 곳에 ‘국민’이 없을 수 있다는 역설을 의식하고 있는지, 그 지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는 말에서 ‘위대한 국민’이 자신의 지지자를 지칭하는 것인지, 국민 자체가 위대하다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만일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이 위대하다면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요원한 것일 테고, 국민 자체가 위대하다면 아무 말도 안 한 것이거나 그저 동어반복을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직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지만, 그때 ‘따르겠다는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어떻게 파악하고 구분한다는 것인지도 마찬가지이다. ‘뜻’만 명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따르겠다’는 말도 그 범위와 행위의 정도가 애매하다. ‘국민’, ‘뜻’, ‘따르기’ 모두 확정적인 개념들이 아닌 데다, 너무나 원론적이고 거창해서 사실상 아무 뜻도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이현령 비현령’일 수 있는 말들이다.  “국민과 함께” 통합을 이루겠다지만, 그때의 “함께”가 어느 정도인지도 대단히 추상적이다. “국민통합”도 ‘통합’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국민 전체가 아닌, 일부는 소외시키는 ‘분열’일 수도 있다. 국민을 통합하려면 다양성을 존중하며 비판자까지 껴안을 수 있을 심층적 철학과 모범적 실천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까지 국민 전체를 포용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듯해서 미심쩍다. 행여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버리려 들지는 않을지 의구심도 든다. ‘국민’을 둘러싼 이런 문제의식은 “국민의 힘”이나 “국민의당”이라는,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며 딱히 메시지가 분명치 않은 당명을 정할 때부터 노정된 난제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막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은 일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국민’만이 아니라 어떤 언어를 쓰든 언어 자체가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指月]과 달을 구분하고 있고, 언어학자 소쉬르가 기표(記表)와 기의(記意)를 구분하고 있지 않던가.  ‘국민’이라는 글자와 그 글자가 연상시키는 이미지나 개념은 애당초 다르다. 글자와 개념이 구분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 연상하는 이미지와 떠올리는 개념도 다양하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나아가 말하는 이도 자신의 내적 의도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하고, 표현한다 하더라도 듣는 이에게까지 가는 과정은 더욱이나 멀다. 저마다 기대치가 다르고, 심지어 상반되게 이해하기도 한다. 이 마당에 ‘국민’이 아니라 무슨 언어를 쓴들 본래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자기 언어의 한계를, 때로는 무의미함까지 의식하고 있는지, 그저 자의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관건이다. 그런 반성적 의식 속에서야 가능한 한 명확하고 전체를 살릴 수 있을 방향성도 나온다. 거기서 진정성도 나온다. ‘사랑하는’, ‘위대한’과 같은 멋져 보이는 표현도 그 내용까지 멋지려면 말 속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진정성이 있으려면, 어떤 언어든 많은 이가 신뢰할 말을 고민해서 구체적이며 정확하게 써야 한다. 정확하게 쓰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어디로 가는지, 한 번 더 자신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기존의 개념을 되묻고, 해체하고, 다시 해체해서 가능한 모든 이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간격을 좁혀야 한다.  사회학자 김홍중이 발터 벤야민의 사상에 힘입어 ‘파상력’(破像力)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파상력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영상들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파괴하는 우상 파괴적 권능을 내포한다... 일체의 가상(Schein)이 가상임을 꿰뚫고 그 가상이 행사하는 환영적 위력을 분쇄함으로써 엄폐되어 있던 진상(眞相)을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사용하는 ‘국민’이라는 말이 그저 ‘기호’에 머무는 것은 아닌지, 거기에 허상은 없는지, 가상은 아닌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말에 솔직하고 진지해야 한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국민’이라는 말에 담긴 자기만의 이미지를 분쇄하고 파상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견지해야만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말에서 국민이 솔직함과 진정성을 느낀다.  진정성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말이 아니라, 어떤 실천을 어떻게 하는가에서 확보된다. ‘위대한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이 맞으려면, 그렇게 말하는 이는 국민 앞에서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국민이 위대하다거나 국민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은 낮추고 국민을 높이는 행동으로만 진정성이 입증된다. 자기만의 신민(臣民)이 아닌, 비판적 국민까지 전체를 높이며 살려야 한다. 남한의 국민만이 아닌 한반도 북쪽의 인민도,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심지어 세계의 상황을 읽고 가능한 인류가 상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 세계 안에서 세계와 엮여 존재하며, 결국 남과 북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처지 아니던가.  물론 누구든 전체를, 그것도 자기의 비판자까지 포용하며 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대로 다름과 차이 간에 상생을 도모하며 전체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는 어마어마한 역할을 담은 한국식 호칭을 붙이고 있지 않은가.  만에 하나 전체를 동시에 살리기 힘들다면, 더 고통받고 더 힘든 이들을 우선 살리고 높여야 한다. 아래로부터 밀어주면서 전체의 평균치를 높여야 한다. 이것이 평화에의 길이고 통합의 기초이다. 평화를 지킨다며 무력을 강화시키는 위압적 행위보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려는 지난한 노력을 전 세계와 함께 진정성 있게 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라야 인류의 축복 속에서 ‘국민의 뜻’을 반영하며 따르는 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자리는 간단하지 않다. 그의 영향력 안에는 너무나 많은 눈과 귀와 입이 있다. 그 어설픈 한 마디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저와 제 편만 생각하다 행여 통합이라는 이름의 분열로 가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들만의 국민’은 없다.  ‘국민의당’과 합당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국민의힘’ 당선인이 ‘국민’을 어떻게 대할지, 앞으로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이어갈지, 그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을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위대한 국민’이 할 일이다. ‘국민’으로 포장된 가상을 깨고 진상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이 진짜 ‘국민의 힘’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3-14 | hrights | 조회: 1080 | 추천: 12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크라이나의 교사이자 엄마인 올레나 쿠릴로. 그녀의 아파트는 러시아의 미사일 공습으로 파괴됐다. 유리 파편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녀는 푸틴에게 의미 없는 전쟁을 멈추라고 호소했다. “전쟁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잃게 만들고 노인, 평범한 사람,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아까운 생명을 잃게 한다.” 그녀는 러시아의 엄마들을 향해 이런 부탁도 했다. “제발 아이들이 전쟁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이 전쟁은 무의미하다. 이 전쟁으로 행복해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이 전쟁으로 부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국민 모두에게 비극이고 고통이다. 경제제재로 금리는 20%나 뛰었고 물가도 치솟고 있다. 달러 대비 루블화의 가치는 3분의 1로 떨어졌고 더 떨어질 거라 한다. 구글페이나 애플페이 같은 결재시스템도 러시아중앙은행이 스위프트에서 배제되면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피 흘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러시아 경제 시스템의 붕괴는 러시아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이번 전쟁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문명의 시대에 이런 의미 없는 전쟁을 목도하니 참담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말들은 많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신나치즘의 발현을 막겠다.’고 했고 다른 한편에선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리한 나토가입 추진이 러시아의 무력 침공을 자초했다는 분석도 있다. 수만 가지 이유를 댄다 해도 누구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무고한 생명의 살상, 인권 유린, 일상의 파괴를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쟁의 원인은 푸틴이다’ 올레나 쿠릴로의 명쾌한 진단이다. 푸틴은 러시아를 다시 소련 시절로 되돌리겠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푸틴의 제국주의 야망의 시발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프랑코 국립대학교 올레흐 오스타퓨크 교수는 ‘푸틴이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시민을 선동해 독재를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이라고 간파했다. 하지만 이런 푸틴의 야욕은 오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KGB 출신의 푸틴은 2000년 이후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하면서 20년 넘게 장기집권을 해오고 있다. 투표 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60~70%의 득표율을 보여줬다. 정보기관 출신답게 정적을 제거하거나 정치적 반대집단을 탄압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비판적인 언론인 살해 의혹 등 언론통제도 일삼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민주화의 바람이 때로는 혁명으로 몰아쳤지만, 러시아만은 무풍지대였다.  그래도 변화의 기미는 보인다. 전 세계 반전여론이 거센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곳곳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푸틴의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이 50% 정도 된다지만 체포와 처벌을 각오하고 ‘조국이 부끄럽다’며 전쟁반대를 외치는 물결이 번지고 있다. ‘사형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위협에도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러시아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다. 비록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았고 시민사회의 형성도 더디지만 요즘 같이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세상에선 러시아만 외딴 섬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출처 -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 HB가 트위터에 게시한 영상 캡처  쉽게 함락될 것 같았던 우크라이나는 결연한 항전 의지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이 가운데 내 눈길을 끄는 장면 하나. 돌진하는 러시아의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는 한 시민이 있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장갑차도 그를 피하느라 휘청거렸다. 그의 용기가 철갑전차를 흔든 것이다. 철옹성 같은 권력에 균열을 내는 것은 총과 칼만이 아니라 작은 촛불이었고 가녀린 재스민 꽃잎이었다. 푸틴의 손에 권력을 쥐여준 러시아 국민들의 냉철한 판단과 전 세계 평화세력의 연대만이 이 무의미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3-02 | hrights | 조회: 770 | 추천: 4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양에서는 역사의 시간적 흐름을 흔히 고대-중세-근세-현대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는 ‘고전고대’로 일컬어지고,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에서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멸망(1453)까지는 중세사로 여겨진다. 근세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서 1789년 프랑스혁명까지의 초기 근세(early modern)와 프랑스혁명에서 2차 세계대전(학자에 따라서는 1차 세계대전)까지의 후기 근세(late modern)로 더 나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문자(大文字)로서의 근대(the Modern)’란 시기적으로 바로 이 후기 근세 혹은 최근세(recent modern)와 겹친다. 따라서 서양사에서의 시기 구분에서 현대는 바로 지금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펼쳐진 당대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분은 많은 시대구분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절대적인 게 아니다.)  우리가 거(居)하는 현재 혹은 현대와 가장 가까운 역사 세계가 근대이다. 알다시피 근대를 빚어낸 주된 힘은 서양에서 나왔다. 근대에 펼쳐진 지리적, 경제적 세계화도 서양이 주도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양이 주도한 전 세계의 근대화에 강제로 편입된 쪽이었다. 자주적으로 근대에 진입할 역량이 모자라서 강제적으로 근대세계에 편입된 탓에, 우리에게는 시간을 두고 성공과 실패를 두루 경험하면서 근대의 전모(全貌)를 찬찬히 체득할 여유를 누릴 수가 없었다.  현실 세계에서의 부족, 혹은 결여를 메우려 할 때 필요한 게 꿈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충족된 것을 욕망하는 인간은 없다. 누구나 충족된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없는 것)을 꿈꾼다. 목이 마를 때 물을 찾지 갈증이 해소되면 물을 찾지 않는다. 역사 세계에서도 인간은 현실에 없거나 부족한 것을 꿈꾼다. ‘지금 여기’는 꼭 이래야만 하는가? 과연 눈앞에 펼쳐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게 뭔가 부족해 보일 때, 그래서 객관적 ‘현실’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주관적 ‘인식’ 사이에 괴리가 있을 때, 그 격차를 해소하는 방법도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서양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주로 회상이나 이주의 방식으로 현실과 인식 사이의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우선 시간의 차원에서는 회상(recall)의 방식을 취했다. 현실이 빈약하고 초라할수록, 고대의 인간은 풍요롭고 안락했던 과거를 상기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개인의 차원에서 ‘내가 왕년에는~’, ‘이래 봐도 한때는~’이라며 현실을 부정하듯이. 요순(堯舜)시절이나 ‘실낙원(實樂園) 이전’의 옛날에 대한 회상에 기대어 현실을 부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실 이전에 존재했다고 회자(膾炙)되는 ‘황금시대’에 대한 관념의 감상화(感傷化)가 시간의 차원에서 진행된 현실 부정이라면, 공간의 차원에서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이주(emigration)라는 형식으로 현실의 부족을 메꾸려 했다. 내 머리에 존재하는 ‘관념의 세계’를 지금 이곳에서 현실로 만드는 게 불가능하므로, 이곳을 벗어나서 관념의 현실화가 이루어진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본 무릉도원(武陵桃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율도국, 기회의 나라로의 이산이 바로 그런 예다.  중세 사회에서 현실과 인식의 차이는 <‘악(惡)’으로, ‘터부 taboo’로 처리되는 방법>과 <종교로 처리되는 방법>이 가능했다. 우선 중세 사회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이미지에 탐닉하는 자는 마귀에 들린 자, 병든 사람(미친 사람)으로 내몰렸고, 그들이 자기 생각을 행동에 옮겼을 때는 처벌되었다. 닫힌 사회에서 (현실) 부정의 정신은 터부시되어 박해를 받았다. 공동체의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그로부터의 박해를 면한 게 종교적 방법이다. 종교는 현실의 차원에서의 부정을 단념하고 현실을 스스로 초월하는 ‘초역사적 부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초월(transcendence)은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아예 벗어나려고 한다. 초월은 참되고 복된 삶은 허망하고 찰나적인 세속세계가 아니라 천상(天上)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역사 세계 자체를 뛰어넘음으로써 현실의 초라함을 극복하려는 초역사적인 꿈이 초월이다. 그리스도교는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현실의 차원에서 줄일 수 없다는 세계관의 표현이자 현존하는 현실을 ‘숙명(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실변혁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의 표현이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도 현실(세계) 부정의 계기는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소외-억압되었거나 비합리적으로 처리되었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  서양의 근대란, 현실에 대한 이런 식의 종교적 대응방식에 대한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인식의 차이를 (현실) 초월이 아니라 진보(progress)를 통해 줄이려는 게 근대의 특징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근대인은 좋았던 옛날은 이미 사라졌고,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으며, 아무나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생산력 증대와 (개혁이나 혁명과 같은) 사회변혁 시도를 통해서 현실과 인식의 격차를 ‘현실의 극복’=발전을 통해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고대와 중세에는 변수(變數)조차 못되었던 부정적 현실의 타파라는 계기를 아예 상수(常數)로 놓고 계산하려는 행동 양식이 생겨났다.  서양의 근대를, 회상이나 이주, 그리고 초월의 역사적-현실적 한계를 깨닫고 어제와 저곳의 바람직한 것들은 물론이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이상적인 것들까지도 ‘관념의 형식’인 정보나 지식으로 배우고 익혀서 실현하려는 시대라고 규정한다면, ‘성숙한 근대로서의 현대’를 살려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합리적 사유를 긍정적으로 전유하려는 노력이다. 막스 베버가 근대의 핵심적 특징을 탈주술화=합리화라는 말로 요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보름 남짓 남겨둔 현재, 공동선에 대한 헌신은 고사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개념조차 없는 무속신앙에 사로잡힌 자들이 정권을 쥐어보겠다고 버젓이 나대고 다닌다. 역겹기 짝이 없다. 아무쪼록 이번 대선이 사이비 중세가 아니라 ‘성숙한 근대’=현대로의 이정표로 기록되길 희망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2-02-23 | hrights | 조회: 830 | 추천: 4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례 1. 초등학생 세 명이 뚝방 공터에 족구장을 만들기로 했다. 시기가 문제였다. 여름 장마에 쓸려갈지 모르니 9월에 하자는 의견과 지금 만들자는 주장으로 갈렸다.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는데, 결과는 당연히 2:1. 하지만 이들은 족구장을 만들지 못했다. 2:1 중, 1이었던 친구가 삐졌기 때문이다.  사례 2. 웃말 아랫말 합쳐 100호 가까이 되는 그런대로 규모가 있는 마을이 있었다. 돌아가며 하던 이장을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투표로 뽑기도 했다. 불과 4표 차이로 A씨가 선출되었다. 떨어진 B씨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시했다. A, B씨를 지지했던 동네 사람들은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같이 술을 마시지도 않고 말을 섞는 것도 조심했다.  사례 3. 언제부턴가 대학 총장도 교수들의 투표로 뽑았다. 대학의 총장 선거 때가 되면 강남의 룸살롱이 들썩인다는 소문이 있었다. 선거가 혼탁 정도를 넘어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요즘은 주로 재단 이사회에서 대학 총장을 선출하며 교수들의 개별 투표는 드물다. 투표의 부작용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대학의 지배 권력이 총장 임면권을 회수한 결과이다.  바야흐로 후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대선 국면이다. 당연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투표가 중요하다. 향후 5년간 선출된 인물에게 이 나라와 사회의 운명 중 얼마를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자질이 있고 훌륭한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투표가 끝나면 향후 대통령 직무 수행에 관한 한 5년간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흔히 ‘민주주의’ 하면 미국을 떠올리지만, 미국의 독립선언서나 헌법 어디에도 민주주의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미국 건국자들은 ‘공화제’를 고대 로마에서 들여왔는데, 로마의 원로(元老)는 선출직이 아니었다. 1776년 메릴랜드 신헌법에 의하면 지사(governor)에 입후보하려면 5,000파운드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고 상원의원에 출마하려면 1,000파운드의 재산을 소유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90%의 주민이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미국의 ‘금권 정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치학자 R. 달, 인류학자 D. 그레이버는 미국에 민주주의는 없었다고 말했다.  선거=투표조차도 얼마나 큰 희생과 노력을 통해 얻어졌느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맞다. 1948년 여성참정권이 보장되기까지, 현대 사회에서 거의 유일한 정치 참여의 방식인 투표권=보통선거권마저도 2백 년이 넘는 지난한 싸움 끝에 손에 쥔 소중한 시민의 무기인 것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하지만 내가 앞에 세 사례를 제시하면서 품었던 두 가지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 이 선거가 나라의 운영책임자를 뽑는 데 적절한가, 계속 이 제도로 가야 하는가? 둘째, 나라의 운영책임자=대통령 외에 다양한 집단과 단체의 리더를 꼭 투표로 뽑아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현행 선거는 인류가 오랫동안 동의한 덕목을 배반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겸손이라는 덕목이다.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갖게 되는 성숙한 인격의 덕목 말이다. 현재 대선에서 입후보자는 단상에 나가 내가 잘났다고 내 입으로 말을 해야 한다. 그에 비례해서 상대를 헐뜯어야 한다. 거기에 언론과 검찰이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면 대선 경쟁은 적나라한 ‘물어뜯기와 물어뜯기기’가 된다. 과연 투표로 대변되는 정치 참여방식이 현실이나 규범의 측면에서 달성해야 할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투표는 공공연한 경쟁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등장한 표결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같이 아무 일이나 가지고도 경쟁했던 사회 말이다. 이런 사회에서 회의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은 대부분 무장을 했거나 무기 사용 훈련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스 투표는 군대 안에서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에 따르면 그리스 국가의 구성은 그 군대의 주요 무기 분류에 따라 결정되었다. 기병대라면 귀족정을 예상할 수 있다. 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무장 보병이라면 투표권은 중무장할 무기를 구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가벼운 무장의 보병, 궁수부대, 투석부대, 해군이 있다면 민주주의를 예상할 수 있었다.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의 군대는 다수결을 통해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했다.  투표는 두 가지 전제를 깔고 결정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첫째, 어찌 되든 소수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당해도 감수하고 다수의 견해에 따라야 한다. 투표는 설득의 단절이다. 상호 수용과 집단 결정에 도달하는 협의의 중단이다. 앞서 세 사례에서처럼 투표가 불화를 낳는 이유이다. 둘째, 투표는 투표의 결과를 강제할 수 있는 폭력을 수반하고 있다. 투표는 불화가 물리적인 반박이나 저항으로 바뀔 경우 진압할 수 있는 폭력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투표는 민주주의와 가장 멀고 허술한 의사결정 수단인지 모른다.  지금 투표에 몰두하고 있다면 돌아볼 일이다. 이 사회가 빈부의 불평등이 심각해서, 또 많은 사람이 정치, 경제, 문화에서 배제되고 있어서. 한번 결정되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강제력이 필요하고 그 강제력에 순응해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투표에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닌지 말이다. 이런 사회는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의 정치체제를 두려워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다시 물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다. 누가 발명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지적 전통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뜻이고, 집단적인 결정은 평등 속에서 유지되어야 하며,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평등한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제출했을 때 발휘될 창조성까지 포함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자유로움이어야 한다. 민주화를 기다리고 있는 집안, 동네, 학교, 회사, 작업장 등 곳곳에서. * 계발성에 가득 찬 글을 남긴 고마웠던 학자이자, 순진하고 유쾌한 웃음을 주었던 동료였던, 그러나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ber)의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정호영 옮김, 이책, 2015),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2016), 《관료제 유토피아》(김영배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6) 등에서 많이 베꼈습니다. 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빕니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2-02-16 | hrights | 조회: 1036 | 추천: 5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저는 제대로 할 줄 아는 잡기나 스포츠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전혀 없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열심히 하는 걸 재미있게 구경하는 쪽입니다.  재주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저는, 양반은 못 되지만 “뭐 하러 저 힘든 걸 몸소 하누? 아랫것들 시키면 되지!”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하는 편입니다. 며칠 전, 오랫동안 학원에서 일해 왔던 친구 A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오후 5시 OO 당구장으로 와라, B와 오늘 결판낸다.’  자영업자인 B 역시 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A의 문자 받았지? OO 당구장에서 보자.’  A와 B의 당구 시합에 저를 부른 것은, 그들이 이미 두 번의 시합을 벌였고 그때마다 제가 참관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남들이 벌이는 게임을 옆에서 지켜보며 굉장히 재미있어하는 속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겠지요.  올해 들어 1차전은 A가, 2차전은 B가 이겼으니 2022년, 그들의 통산 전적은 1대1. 삼세판 2선승제라 치면 오늘 시합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셈입니다. 특히 오늘의 승부에 A와 B 매우 특별한 것을 내기로 걸었습니다. 그들의 농반진반에 의하면 오늘의 승패가 ‘한국 정치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었습니다.  A는 닥치고 국민의힘 쪽 지지자이고 B는 무조건 정권교체 지지자여서, 두 사람은 이번 대선에 있어 대부분의 의견이 같지만 조금은 다른 견해 때문에 투닥이곤 했습니다.  대선 승리를 위한 야권 단일화에 공감하면서도 A는 윤석열이, B는 안철수가 대선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당구 시합의 이기는 쪽의 의견을 따르기로 합의가 되었고 제가 보기에 평소와는 다른, 좀 더 바보 같은 승부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정된 시간, OO 당구장에 저를 포함해 세 사람이 모였습니다. A와 B는 어느 쪽이 지더라도 그 결과를 깨끗이 받아들이기로 하고 페어플레이를 약속했습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드디어 삼판양승제, 3구 당구의 첫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서너 번의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둘의 게임은 팽팽했습니다. A가 점수를 얻으면 B가 따라붙고 B가 치고 나가면 A가 따라붙는 양상이었습니다. 그렇게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B의 한 수에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B가 본 적도 없는 요상한 기술을 구사, 어처구니없이 점수를 땄습니다. 소위 ‘후로쿠(fluke)’에 당해 화가 난 A의 평정심이 무너졌고 결국 첫 번째 게임은 B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어진 두 번째 게임은 허무할 정도로 일방적인 B의 승리. 첫 번째 게임의 분노를 삭이지 못한 A가 거의 자멸해버린 결과였습니다. 2대0으로 승부가 결정되었고 기세등등한 B가 던진 한마디에 A의 반발이 이어졌습니다.  “나의 승리, 단일화는 안철수 인정?”  “무슨... 후로쿠로 이겨놓고!”  “억울하면 룰을 바꿔줄까? 5판 3승제로... 어때?”  A는 계속 B를 놀렸습니다. 그쯤에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밥 먹고 생각합시다!”  득의만면한 B가 밥값을 내겠다며 당구장에서 가까운 곳에 맛있는 국숫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당구장에서 국숫집으로 가는 동안 A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B는 계속 윤석열이 왜 야권 후보가 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국숫집 가까이에 왔을 때 갑자기 B가 깜짝 놀란 듯 소리쳤습니다.  “어? 내 차 어디 갔어?”  당구장 근처 골목에 세워두었던 B의 차가 불법주차로 견인되었습니다. 당구 두 게임에 소요된 시간은 60여 분. B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자리의 노란 스티커 한 장에는 어디로 와서 벌금을 내고, 30분 당 얼마의 벌금이 추가되니 그리 알고 차를 찾아가라는 등등의 친절한 안내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어휴, 씨!”  B에게는 이제 당구의 승패도, 야권 단일화도, 맛있는 국수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풀 죽어 있던 A가 웃지 않으려 애쓰면서 B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빨리 가봐, 시간 늦으면 그만큼 돈 더 내야 한다고 써 있네...”  화가 나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B를 부랴부랴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서 A가 씩 웃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구는 뭐 모르겠고, 오늘 종합적으로는 나의 승리!”  그 말을 들은 제가 A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너의 승리는 결국 현 정권의 시스템에 힘입은 승리!”  A와 저는 국수를 먹고 헤어졌습니다. 물론 국숫값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A가 냈습니다. 우습지요? 하지만 무슨 떠벌이 전문가들에다가 법사니 무속인이니 하는 사람들까지 대선을 점치고 있으니, 비록 저는 아무 관심이 없는 그들의 이야기지만 당구로 점을 쳐보는 것도 우습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당구 시합에서도 그랬지만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자칭 애국자들의 이런저런 말들이 요란합니다. 아무튼 ‘잘 돼야 될 텐데...’ 말입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1-26 | hrights | 조회: 854 | 추천: 6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2022년 대통령 선거가 난데없이 굿판이 돼 버렸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 부인, 그러니까 영부인을 꿈꾼다는 사람이 “도사”니 “무당”이니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났다. 거기다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극도로 친하다는 무슨 법사니 도사니 하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보니 개판과 굿판 중 어느 게 더 좋은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로선 그 법사들의 신통력을 검증할 방법도 없고, 王이 될 생각도 없으니 손바닥에 낙서할 일도 없겠다. 더구나 똥침이란 함부로 장난치다 큰일난다(그리고 보복당한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법인데 무려 자기한테 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와중에도 매우 걱정되고도 끔찍한 건 따로 있다. 국민의힘이 네트워크본부를 허겁지겁 해산하는 계기가 됐다는 자칭 건진법사가 주변에 만들어준다는 부적에 눈을 의심했다. 한눈에 봐도 ‘천부경(天符經)’ 81글자를 붉은색으로 써놨다. 이것만 봐도 자칭 건진법사가 유사역사학(사이비역사학이라고도 한다)에 깊숙이 치우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겠다. 천부경이란 게 등장한 건 대략 일본 식민지로 떨어졌던 시기였다. 대종교에선 천부경이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이치를 표현한 신성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나. 정치를 위해 역사를 쪼물딱거리는건 언제나 동티가 나게 돼 있다.  천부경은 유사역사학의 최종 보스 같은 이른바 ‘환단고기’에 실려있다. 환단고기는 1911년에 계연수라는 사람이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천부경은 계연수가 1916년 묘향산 암벽에서 찾아내 탁본을 하면서 찾아낸 거란다. 1911년에 편집한 책에 들어있는 걸 어떻게 1916년에 암벽에서 찾아냈다는 것일까. 이미 거기서부터 도대체 앞뒤가 맞질 않는다. (환단고기 신봉자들과 고대사 시각이 가장 유사한 이북 정부가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찾아내 발표하지 않는 건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천부경이란 이미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믿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가 ‘조선사연구초’(1929)에서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때 천부경을 경전으로 떠받드는 대종교에 몸담았던 신채호조차 이 정도였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자칭 건진법사의 천부경 부적이 더 위험한 건 이게 단순히 무당 얘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천부경이, 그리고 천부경이 수록돼 있는 환단고기에 빠진 이들이 선출되지도 않고 감시받지도 않는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박근혜 정부에서 목격했다. 박근혜는 2013년 광복절 축사에서 환단고기를 인용해 역사학계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린 적이 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올바른 역사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국정교과서 소동이었다.  어떤 분들은 환단고기니 천부경이니 다 ‘논쟁’의 영역에 있는 것이고, 다양한 학설 가운데 하나이니 ‘취향 존중’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유대인들이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다는 괴문서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임나일본부설을 어떤 식으로 퍼뜨렸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건 따지고 보면 현실을 조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천부경이나 환단고기는 고대사 연구를 위한 사료가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를 횡행하는 유언비어의 그늘을 연구하는데 유용한 현대사 자료일 뿐이다.  유사역사학 혹은 사이비역사학을 신봉하는 이들이 위험한 건 이들이 단순한 옆길로 새버린 역사매니아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지극히 위험하고 퇴행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올바른 역사학이란 이름으로 다양성과 토론조차 인정하지 않는 파시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환단고기를 장려했던 게 박정희-전두환처럼 국정교과서를 강요하던 군사독재정부였다.  게다가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부동산에 관심이 너무 많다. 이거 매우 위험하다. 이분들은 헬조선의 근본 원인을 ‘우리나라가 땅이 좁아서’라고 판단한다. 이분들은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 정도 영토는 가져야 호연지기를 갖는 국민이 된다는 생각을 버리질 못한다.(그러면서도 중국 사대주의를 극렬 규탄한다) 그러다 보니 틈만 나면 드넓은 만주벌판 타령이고 치우천황이니 연개소문이 중국을 박살 내고 중국 땅을 정복했다며 정신승리에 여념이 없다.  이분들의 사고방식은 말 그대로 '지금 우리는 달동네에서 찌질하게 살지만,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는 만석꾼이었다'는 열등감 덩어리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 기준을 수천 년 전에 그대로 갖다 붙이는 걸 특기로 하기 때문에 2천 년 전 한사군을 현대의 식민지와 등치시키고, 2천 년 전 한사군이 평양에 있다는 걸 지금 현재 평양이 중국의 잠재적 영토라는 식으로 생각해버린다. 그러니 2천 년 전 한사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민족반역자나 할 소리라 생각하고, 한민족 영토확장을 위해 한사군이 요서 지방에 있어야 한다고 우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해외 부동산 투기를 청동기시대까지 확장하는 땅따먹기 놀이를 위해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반도 구석에 쳐박힌 달동네도 아니고 찌질한 나라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신승리 사관'과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집 크고 땅 넓었다'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이 천부경이나 환단고기 같은 짝퉁이 없어도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는 국민들이다. 물론 선무당이나 똥침도 필요없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1-19 | hrights | 조회: 1590 | 추천: 4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들이 억울한 수형 생활을 마치고 뒤늦게 상담을 요청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위 간첩 조작 전문변호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판결문을 읽어보자마자 단번에 단순 탈북자를 간첩으로 조작한 것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탈북자 간첩 조작의 진상을 규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북 악마화와 북맹을 조장하는 국가보안법의 지배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민중은 국가정보원과 안보경찰 등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날조하고 있는 탈북자 간첩조작을 진실로 믿기 쉽다. 국가보안법의 축적된 세뇌 효과에 기인한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피해자 유우성, 유가려 남매) 및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조작 사건(피해자 홍강철씨)의 국가보안법 무죄 확정판결을 계기로 수많은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진상규명에 유리한 환경과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안이한 판단이었다.  재심 무죄를 위해 큰 기대를 갖고 찾아온 탈북자 간첩 조작의 피해자들에게는 신속한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의 길은 갈수록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자고 희망을 설파하고 있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쳐버린 피해자 중에는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에 의한 탄압을 이유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분도 있다.  재심 무죄를 위한 유리한 국면이 열리기는커녕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이관을 앞두고 국가정보원과 안보경찰이 합작하여 조작한 가짜 탈북자 간첩 사건이 생기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다.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왜냐면, 북중 국경에서 북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는 범죄(밀무역, 인신매매, 대북송금, 비법도강, 비법통화 등)를 저지른 상습 범죄자를 보위부 비밀공작원으로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에서 비법월경이나 비법통화 등 탈북브로커에 종사한 범죄경력자를 북의 경찰이 그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정보원으로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북에서 단속 경찰에게 범죄정보를 제공하는 범죄자 정보원은 ‘보위부 스파이’, ‘보위부 눈깔’로 불린다. 한국에서 조직폭력, 마약 범죄자 등을 단속하기 위해 범죄 전과자들의 편의를 봐주며 범죄정보를 수집하는 ‘망원’으로 관리하는 것과 같다. 사진 출처 - <뉴스타파> 애니매이션 시사 다큐멘터리 ‘자백 이야기’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조작사건(피해자 홍강철씨)에서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합동신문센터 조사관의 증언이 위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준다.  “우리 한국에서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그렇게 정보원을 하다가 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탈북자 조사를 하다 보면 정보원을 하다가 왔다는 사람이 진짜 많습니다.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크게 중하게 생각하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조작사건(피해자 홍강철씨)을 계기로 그동안 수많은 간첩을 조작해왔던 상투적 수법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보위부 스파이’, ‘보위부 눈깔’을 보위부 비밀공작원으로 조작한 사건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어느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재판장과 피고인의 대화가 웃프다.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문 : 북에서 생계를 어떻게 유지했나요. 답 : 탈북브로커 일을 하면서 탈북하겠다는 사람들을 탈북도 시켜주고 돈 송금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생활했습니다. 문 : 피고인이 보위부로부터 그 당시 부여받은 임무가 국경에서 탈북브로커 일을 하는 사람들을 파악해서 보고하는 임무인데, 오히려 피고인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인가요. 답 : 예, 했습니다.”  피고인은 유죄판결을 받고 수형 생활을 마쳤다. 현재 재심 준비 중이다. 재판장과 피고인 사이의 우픈 대화는 어느 법정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다.  악마와 같은 탈북자 간첩 조작의 메커니즘은 굳건하다. 대명천지에 문명국가에서 존재할 수 없는 가짜 탈북자 간첩이 국가보안법 유죄 판결문에 나온다.  “고난의 행군 이후 재정이 부족해 공작원에게 지원할 공작금이 없어 탈북자로 위장한 여간첩을 중국에 파견해 성매매, 음란 채팅, 유흥업소에 종사시키거나 인신매매로 중국의 농촌에 팔아 공작금을 마련하여 활동케 하였다”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을 통해 중국에서 위조달러와 마약을 유통시키며 외화벌이를 하였고, 중국에서 한국인들과 탈북자들을 납치하여 북송하였다”  “국정원 등의 합동신문을 통과할 목적으로 뇌의 기억을 마비시키는 거짓말 탐지기 회피용 밴드 붙임 약물을 개발하여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을 남파시켜 탈북자 합동신문센터에서 거짓말 탐지기 조사 통과 후 한국사회에 정착하여 간첩 활동을 하려고 했다”  한국 민중은 위와 같은 판결문의 뒷배가 되는 파쇼악법 국가보안법의 살기등등한 폭압과 위세에 짓눌려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허위자백을 검증할 의지도, 능력도 상실한 지 오래다.  지금 이 순간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탈북자 위장 간첩을 파견하는 기괴하고 악마화된 북을 인식하도록 한국 민중은 수시로 강요, 세뇌당하고 있다. 한국 민중은 탈북자 간첩 조작사건의 국가보안법 유죄 판결문 보도내용을 진실로 믿어버리며 동족에 대한 공포와 불신감을 키우며 동족을 혐오하고 증오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의 지배력 앞에 저항하지 못하고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탈북자 간첩 조작의 진상규명은커녕 가짜 탈북자 간첩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다. 한국 민중이 국가보안법 노예의 사슬을 끊고 국가보안법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역량을 갖추어 나갈 때 비로소 국가정보원과 안보경찰 등이 날조하는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는 탈북자 간첩 조작은 근절될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1-12-29 | hrights | 조회: 1340 | 추천: 5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김씨의 결혼 전 사생활은 검증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일이다.”  “김씨가 유흥업소 접객원 ‘쥴리’로 일했다는 주장은 여성 혐오가 어떻게 정치적 동력으로 활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지난주 하루이틀사이로 <한겨레>에 실린 사설과 칼럼의 일부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의 이른바 ‘쥴리 의혹’은 검증 대상이 아닌 사생활이며, 여성 혐오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나는 그 배경에 특정한 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생활이 아니라 권력형 비리 의혹이다  ‘쥴리 의혹’이 왜 단순한 사생활이 아니라 공적인 주제인지부터 (다소 지겨울 수 있겠지만) 다시 따져 보자. 이른바 쥴리 의혹의 개요는 재벌(조남욱 삼부토건 회장)과 검찰(양재택-윤석열)의 결탁에 여성(김건희)이 동원됐으며, 김건희는 이렇게 소개받은 검찰의 권력을 뒷배 삼아 엄마 최은순(윤석열의 장모)의 사업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대택씨를 비롯한 숱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법률적 다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만약 피해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희대의 권력형 비리가 되는 셈이다. 검찰 권력을 활용한 스캔들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의 주인공들이 대통령 부부가 되겠다는데 이걸 사생활이라고 묻어버려도 될까. 윤석열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았더라도, 검찰총장이 아니라 평검사였더라도, 끝까지 파헤쳐 진실을 밝혀야 할 공적 의제임이 분명하다.  양재택 전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와 김건희씨의 특수관계는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고, 김건희씨가 양 검사에 이어 윤 검사와 사귀게 되는 과정에 조남욱 회장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 어려운 정도로 취재가 이뤄져 있다. 이들의 만남이 시작된 장소가 라마다르네상스호텔 6층에 있었다는 조 회장의 특별연회장인지, 같은 호텔 지하에 있던 나이트클럽 볼케이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이 호텔에서 ‘쥴리’라고 불리는 여성을 봤다는 익명과 실명의 인터뷰가 잇따라 나오고 있고, 이들의 기억은 김건희씨의 인상착의나 이력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김건희가 쥴리였고, 조남욱이 양재택과 윤석열을 소개해준 것이라고 100%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더 묻고 싶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진실을 밝히기 위한 취재에 나서야 할까, 아니면 사생활이라고 보호하고 여성 혐오라고 화를 내야 할까. 나는 당연히 취재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건희가 ‘위조인생’을 살았던 이유  김건희씨는 이른바 ‘쥴리 의혹’에 대해 석사, 박사학위 받느라 바빠서 “쥴리 하려고 해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회원 유지’를 ‘member Yuji’로 번역한 이른바 ‘유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등 엉터리 박사라는 점이 드러났다. 강사 또는 겸임교수 지원을 위한 각종 이력서는 허위 경력이 워낙 많아서 거짓이 아닌 걸 찾기가 더 힘든 지경이다. 인생 자체가 위조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런 거짓말쟁이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가 말하고 싶은 논점은 아니다. 대통령 부인은 예산이 투입되는 공적인 자리이지만, 이수정 교수 말대로 국모를 뽑는 선거가 아니므로, 백번 양보해서, 거의 완벽한 ‘위조인생’을 살아온 거짓말쟁이도 퍼스트레이디가 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김건희는 무엇을 위해서, 왜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사문서를 위조하면서까지, 경력을 만들고 학위를 따려고 발버둥 쳤을까, 라는 의문은 남는다. 원래 부지런해서였을까? 공부를 좋아했을까? 그렇다면 제대로 공부해서 진짜 경력을 만들지, 왜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남을 속이기까지 했을까. 정말 왜 그랬을까?  이것은 쥴리 의혹의 본질과 직결되는 물음이다. 나는 김건희가 어쩌다 접하게 된(그 입구가 조남욱 회장이었을 것이다) 상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학위와 경력이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서울법대 출신의 재벌 회장과 역시 서울법대 출신의 잘 나가는 검사들이 어울리는 상류사회에서 내밀 수 있는 명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위조한 경력으로 얻은 명함은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조남욱은 김건희를 ‘김 교수’라고 불렀고, 어느 순간 김 교수는 중앙일간지들과 유명 전시회를 공동 주최하는 반열에 올랐다. 김건희의 경력 조작은 신분 상승과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가져다준 성공적 사기 행위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김건희는 ‘스폰’을 받지 않고 베풀었다  나는 일부 진보 인사들이 쥴리 의혹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성형 수술에 대한 언급을 비롯해 여성 혐오적 성격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이로 인해 상당히 많은 사람이 쥴리를 술집 접대부와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다. 일부 여당 의원들이 볼썽사나운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당연히 비판할 만하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증거로 확인된 내용을 종합하면, 김건희는 양재택 검사로부터 이른바 스폰(경제적 지원)을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베풀었다. 해외 유학 중인 양 검사의 처자식에게 돈을 보냈고, 엄마를 대동해 셋이 함께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송금과 여행 모두 2004년에 있었던 일로, 정대택과 최은순이 한창 소송전을 벌일 때다. 일반적인 스폰 관계가 아니라 로비의 대가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조남욱과 김건희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호혜적 관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조남욱은 자신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데 김건희를 활용했고, 김건희는 조남욱을 통해 사회적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특히 김건희가 여기서 획득한 검찰 네트워크는 엄마의 비즈니스에 활용된 의혹이 있다. 요컨대 나는 김건희가 일반적인 술집 접대부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술집 접대부를 김 교수라고 부르거나 친구는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는다. 사실의 영역, 믿음의 영토  쥴리 의혹이 여성 혐오라고 주장하는 칼럼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른바 ‘쥴리’ 논란의 기저에는 젊은 여성이 ‘육체 자본’을 무기로 삼아 권력자 곁을 차지하고 있다는 편견이 깔려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편견’이라는 단어다. 지금까지 취재된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 ‘편견’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쥴리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거의 예외 없이 이 사안에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앞의 사설이 표현했듯이, 거론하는 것조차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관심이 없으니 내용을 잘 모른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추론의 영역인지 알 턱이 없다. 그런데도 편견이라고 용감하게 주장하는 것은 본인이 편견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무지를 믿음으로 뭉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의 대부분이 실은 다른 사람의 기억이다. 직접 보거나 겪지 않은 사실은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기억이 다를 때 발생한다. 누구의 기억과 주장을 채택할 것이냐에 이르면 사실은 믿음의 차원으로 전환된다. 누구 말이 더 신빙성 있느냐는 것이다. 타인의 말과 기억을 토대로 사실을 확인해 나가는 기자도, 법대에 앉아서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결정하는 판사도 결국 누구 말을 더 믿을 것이냐의 문제로 귀착된다. 엇갈리는 진술 속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결단이다. 자신이 평소 지니고 있는 신념이나 철학, 가치관이 투영될 수밖에 없는 행위다. 정대택과 김건희 가운데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역시 마찬가지다.  예의 칼럼은 24년 전 한 번 봤다는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며 의심하지만 <오마이뉴스>의 해당 기사 ‘김건희 “내가 쥴리 아니란 것 증명하겠다”…안해욱 “쥴리와의 만남 사실대로 이야기”(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95017)’에는 80대 체육인 안해욱씨가 이날을 특별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소상히 나와 있다. 태권도 대회가 서울 역삼동 국기원에서 열렸고, 대회 중 이틀 연속 라마다르네상스호텔 나이트클럽에 갔으며, “나이트클럽에서 술 먹다가 호텔 회장에게 초대받은 것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어떻게) 기억이 안 나겠나”라는 것이다. 태권도 대회가 열렸던 날짜를 증빙하는 자료도 있다. 사실이라고 믿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최은순과 정대택 중 누구를 믿느냐  결국 ‘정대택 사건’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정대택씨 말고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여럿 있지만 이른바 쥴리 의혹을 처음 제기하고, 관련 증거를 상당 부분 찾아냈으며, 지금까지 줄기차게 싸우고 있는 사람은 정씨가 유일하다. 쥴리 의혹의 신빙성 여부는 정대택의 기억과 주장을 채택할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내용을 아는 분들에게는 불필요할 수도 있지만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생각이 다른 분들과 토론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확인된 사실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잘 아시는 분들은 건너뛰셔도 된다.)  최은순과 정대택의 기나긴 송사는 2003년 ‘송파 스포츠센터’에 투자해 생긴 이익금 53억 원을 절반씩 나누기로 했는데 최씨가 돈을 주지 않는다며 정씨가 가압류를 청구했고, 최씨는 강요와 사기미수로 정씨를 고소하면서 비롯했다. 정씨는 똑같이 나누기로 약정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고, 최씨는 정씨의 강요로 약정서를 작성했다고 맞섰다. 사건의 열쇠를 쥐게 된 사람은 약정서 작성에 참여했다고 정씨가 주장하는 법무사 백아무개씨였다. 정씨와 백씨는 중학교 동창이다. 백씨는 약정서 작성에 참여한 적이 없다며 최씨 편을 들었고, 정씨는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백씨가 나중에 자신의 진술을 뒤집으면서 위증의 대가로 최씨로부터 정씨 몫인 26억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13억원을 받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소송이 벌어지던 시기에 최은순은 여러 차례로 나눠 백씨에게 2억원의 현금을 건넸고, 김건희 명의의 2억3천만원짜리 아파트를 사실상 무상으로 팔았다. 돈으로 매수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13억 원 모두를 받기를 원하는 백씨와 2억 원과 아파트만으로 거래를 끝내려던 최씨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진술 번복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건희씨가 추가로 가져온 1억원을 백씨가 거부한 적도 있다. 5번 기소당하고 2번 실형을 산 정대택씨  검찰의 개입 의혹은 여기부터다. 검찰은 백씨가 진술을 번복한 지 8일 만인 2005년 9월 30일 백씨를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백씨는 2년의 실형을 살았다. 정대택씨는 5번의 기소를 당하고 2번의 실형을 살았다. 정씨가 최씨를 위증으로 고소한 사건에서 최씨가 일부 혐의를 인정받아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도, 검찰은 정씨의 고소 내용 가운데 일부가 허위라는 이유로 정씨를 무고 혐의로 기소했다. 매우 이례적인 ‘인지 기소’다. 정씨가 두 번째로 실형을 산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뒤인 2017년 10월이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윤석열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지 한 달 만이었다. 이른바 검찰의 ‘고발사주’ 사건도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정대택의 주장이 사실일 거라고 내가 믿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대택과 최은순의 동업 관계다. 송파 스포츠센터에 먼저 관심을 갖고 투자를 준비했던 사람은 정대택이다. 최은순은 정대택이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투자자다. 둘이 함께 투자에 나섰다면 수익금을 나누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최은순은 정대택에게 한 푼도 주지 않았고, 재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준 법무사에게 현금과 아파트를 줬다. 백씨의 위증과 진술 번복 사유 역시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하다. 그런데도 검찰은 일방적으로 최씨 편을 들었다.  정씨는 십수 년 동안 검찰 권력을 상대로 싸웠고 그중 한 명이 검찰총장이 되고 지금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까지 되었는데도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단순한 집착이라고 보기엔 통한의 피눈물이 느껴진다. 나는 정대택 사건이 ‘유검무죄 무검유죄’의 전형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검찰을 구워삶아 진실을 왜곡하고 재판부마저 농락한 사건이라는 말이다. 또한 최은순-김건희 모녀가 법을 이용해 재산을 불린 방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내용은 <뉴스타파>의 보도 ‘윤석열 장모 사건…김건희 씨도 깊숙이 개입’(http://newstapa.org/article/_qx4L)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진보 언론의 고의적 태만  이상의 내용은 <MBC>를 제외하면 모두 비제도권 또는 신생 매체가 취재한 내용이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비롯한 기성 진보 언론은 무시로 일관했다. 이들 신문은 김건희 허위 경력 의혹에 대해서도 타사가 보도하면 수동적으로 따라갔을 뿐 새로운 사실 취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쥴리 의혹은 말할 것도 없다. 언론의 가치 지향은 무엇을 보도(취재)하는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보도(취재)하지 않는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정 정당에 유리한 사실은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 (역)정파성이 그 배경에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당지 아님’이라는 알리바이가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여 사실 취재와 진실 추구조차 게을리하는 고의적 태만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중도강박증이 유력 대통령 후보와 가족의 권력형 비리 의혹 자체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생활이 검증 대상이라니  <한겨레>의 중도강박증은 심각한 상태다. 기계적 균형을 지키려다 선을 넘기도 한다. 혼외자 문제로 민주당 선대위에서 사퇴한 조동연씨 관련 기사와 사설이 대표적이다.  “이번 조 위원장 사태가 벌어진 근본 원인이 민주당의 ‘부실한 시스템’에 있다는 지적이 많다. 영입 이벤트에만 몰입하다 보니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는 사안도 검증하지 못해, 결국 당사자에게도 피해를 줬다는 것이다. (…)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날 성명을 내어 “대선을 앞두고 마음이 급한 민주당이 외부 엘리트들을 영입해 상임선대위원장이라는 허울뿐인 자리에 앉히려다 사달이 났다”며 “부실한 시스템의 문제를 여성 혐오의 피해인 것인 양 어물쩍 넘어간다면 그것 또한 여성을 도구로 쓰는 것”이라며 민주당의 ‘검증 미비’를 비판했다.”  “무엇보다 조 교수의 ‘스토리’가 선거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기본적인 검증도 거치지 않고 요직에 발탁한 민주당 책임이 막대하다.”  (위의 기사가 인용한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의 대표가 며칠 전 국민의힘이 영입한 페미니스트 신지예씨였다. 본인은 얼마나 치밀한 사전 검증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중시해온 한겨레가 사생활을 검증하지 못했다고 정당을 비판하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정치와 사생활을 섞지 말라고 앞장서 싸우기는커녕 여야 모두를 비판하기 위해 (민주당 비판을 끼워 넣으려고) 최소한의 자유주의적 가치조차 던져버렸다. 이 기사와 사설은 조씨가 성폭행 피해를 밝히기 전에 보도한 것이다. 약간의 비약을 무릅쓰고 말하면, 결과적으로 한겨레는 성폭행 사실을 사전에 검증하지 못했다고 민주당을 비판한 셈이 되어버렸다. 성폭력 사건에서 원칙으로 적용되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따르면 한겨레는 이 보도에 대해 대오각성하고 공개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슬쩍 넘어갔다. 나를 제외하고는 내부에서 문제제기도 없었다. 이 글을 굳이 공개적으로 쓰는 이유다. 온 국민의 비난에 직면해 막다른 길에 몰린 여성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자녀의 인생을 걸고 폭로한 진실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민주당 정치인이 될 뻔 한 자의 인권은 짓밟혀도 되는 것인가.  김건희의 권력형 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사생활이라고 눈감고, 조동연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검증 미비라고 비판하는 이중성은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며 기회주의적이다. 독자들은 묻고 있다. 한겨레는 여전히 진보 언론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1-12-22 | hrights | 조회: 4550 | 추천: 70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 중심의 사회에서 지역은 늘 소외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지역은 없다. 처음으로 기초자치단체장 출신의 후보가 여당의 대선 후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이전투구 속에 정책은 실종됐고, 지역에 대한 담론은 아예 사라졌다.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 이르는 동안에는 균형발전, 지방자치, 지방분권, 자치분권 등과 같은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는데, 이번 대선에서는 아예 지역이라는 말이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전국엔 243개(광역 17개, 기초 226개) 지방자치단체가 있고 이 가운데 서울(25개)·인천(10개)·경기(31개) 등 수도권을 제외하면 177곳의 ‘지방’이 있다. 인구의 절반인 2,570만여 명이 ‘지방’에 살고 있으나 대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지난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나왔던 홍준표 의원은 경남 창녕 출신으로 경남도지사를 지낸 바 있다. 대선 당시 자신의 고향에서 ‘경남의 아들’이라고 유세하던 그의 홍보 현수막을 우연히 전주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전북사위”  그의 아내가 전북 부안군 출신이었던 것이다. ‘경남의 아들’이 ‘전북사위’가 되어 지역주민들에게 표를 구했던 모습은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모양을 바꿔 다시 등장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윤석열 후보는 충남 공주 출신인 아버지를 등에 업고 ‘충청의 아들’이라며 실체 모를 ‘충청대망론’을 외치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지역이 등장하는 때는 고작 이럴 때 뿐이다. 연고주의를 조장하며 지역주민들을 수단화할 뿐 대부분의 정책에 있어서는 지역을 소외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권한은 물론 자율성과 독립성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지자체 차원에서 조례를 제정하더라도 상위법이 우선시 돼 조례가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2015년 당진시는 주민자치를 추진하면서 조례를 제정해 모든 읍·면·동에 ‘주민자치회’를 구성하고 권한을 강화했다. 하지만 당시 ‘주민자치회’에 대한 법률이 제정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출범 1년도 채 안 돼 ‘주민자치위원회’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러다 상위법령이 마련되자 다시 주민자치회로 전환했다. 지역에서 주민자치회를 운영하든, 주민자치위원회를 운영하든, 국정을 혼란스럽게 할 일이 전혀 없는대도,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자치 모임에 대해 정부가 개입할 일이 전혀 없음에도 지역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보장받지 못한다. 사진 출처 - freepik  지역의 인구와 예산 규모가 늘고 행정 서비스의 범위도 넓어짐에 따라 지역의 공무원을 증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더라도, 이를 결정하는 것 역시 정부다. 매년 행정안전부에서는 각 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인건비 총액 기준을 제시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인건비를 사용토록 하고 있다. 총액인건비를 초과하면 다음 총액인건비 인상에 제약을 받는 등 정부로부터 불이익이 따른다.  방만한 인력 운영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이지만, 각 지자체의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급격히 도시가 확대되는 지역은 총액인건비에 묶여 인력난에 허덕이고, 인구가 줄어 지방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에서는 이미 정해진 총액인건비에 따라 인력을 운영해 인구 대비 공무원 수가 많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대도시에 비해 치안 및 소방 인력이 부족한 읍·면 시골 단위에서 사고가 나면 골든타임을 놓쳐 사고가 커지거나 사망에 이르는 일이 적지 않고, 집배원 인력 또한 부족해 월요일에 받아야 할 신문을 목요일에 받는 일이 지역에선 일상이 되어 버렸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을 내세웠지만, 여전히 지역은 정부에 종속돼 있고, 서울과 수도권의 변방에 불과하다.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행정부 수장과 의회를 손수 선출하고 있음에도 지역은 ‘(지방)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전히 ‘(자치)단체’에 머물러 있다.  언제쯤 지역주민이 ‘~의 아들’을 말할 때나 이용되는 게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적 주인이 될까. 지방자치와 균형발전을 말한 지 30년이 지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대선 후보들 지역, 자치, 분권에 대해 어떠한 메시지와 비전을 갖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1-12-17 | hrights | 조회: 835 | 추천: 5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길씨는 1937년 수원에서 오남매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가 하나, 오빠가 둘이 있었고 6년 후 여동생이 태어났다.  윤씨 성을 가진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정자(貞子)’라고 지으려 했다.  그런데 면사무소 서기가 딸에게 왜 ‘아들 자(子)’ 자를 붙이느냐며 ‘길할 길(吉)’ 자가 어떠냐 제안했다. 그렇게 출생신고 중 이름이 정길(貞吉)이가 되어버렸다. 남자 이름 같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모나지 않은 정길씨는 그게 뭐 어떠냐며 자랐다.  열세 살 때 전쟁이 났다. 온통 뒤숭숭했다.  아군이라지만, 마을에 미군이 들어오면 젊은 처자들은 장롱이든 어디든 집안 제일 깊숙한 곳으로 꼭꼭 숨었다. 미군이 젊은 여자에게 몹쓸 짓 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정길씨도 무서워 장롱 속에 숨었다. 미군이 물러갔다. 그런데도 정길씨는, 동시대 사람들이 그렇듯,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미국이 없으면 한국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성실하고 얼굴도 반듯하고 공부도 잘했던 고등학생 정길씨는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아들)도 대학을 못 보냈는데 셋째(딸)가 대학이라니 안 된다고 손사래 쳤다. 담임교사가 집까지 찾아와 정길이는 대학에 보내는 게 좋겠다고 설득했으나, 부모는 어렵다며 반대했다. 정길씨는 대학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일까, 나중에 자식들이 죄다 대학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부담스러운 내색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 스물두 살 때 다섯 살 위 수원 남자와 결혼했다. 마당이 널찍했고 한켠에는 벽돌식 이 층 건물이 있는, 제법 큰 집의 장남이었다. 집안이 괜찮다는 소리를 정길씨도 몇 차례 들은 바 있었다. 시어머니 자리가 결핵을 앓고 있어서 고생스럽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우려도 있었지만, 남자가 나름 괜찮았고, 양쪽 집안에서 얘기도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혼인의 길로 들어섰다.  정길씨를 기다린 건 시집살이였다. 시어머니가 환자인 것은 이미 알았지만, 환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깐깐했다. 큰 집 살림 뒤치다꺼리는 정길씨 몫이었지만, 으레 그래야 하는 거려니 했다. 말기 결핵 환자인 시어머니 입에서 피까지 받아내며 정성껏 간호했다.  결혼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아이 키우며 시부모와 남편을 봉양했고, 둘째 아들도 보았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아들이라고 시어머니가 좋아했다. 그 시어머니는 결혼 후 6년쯤 뒤에 타계했다.  시원섭섭할 새도 없었다. 세무서 근무하던 시아버지가 간장 공장을 해보겠다며 사업에 나섰다가 전 재산을 탕진했다.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사건이었다.  그즈음 수원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남편이 산림 공무원이 되는 바람에 서울로 이사했다. 방 두 칸, 부엌 하나가 딸린 종암동 전셋집이었다.  전 재산을 날리고도 며느리 앞에서 아들 뺨을 때릴 정도로 당당하던 시아버지가 몸뚱어리 하나만 가지고 정길씨네 전셋집으로 찾아 들어왔다. 성실한 정길씨는 시아버지를 환영했고, 그 뒤 딱히 하는 일 없는 시아버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22년여 모시고 살았다.  서울에서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번에는 은근히 딸이기를 바랐는데 또 아들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길씨는 성실하면서 억척스럽기도 했다.  공무원 남편의 박봉 월급을 관리하며 전세살이 4년 만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1960년대 후반 월곡동에 들어서기 시작한 8평짜리 서민아파트였다. 각층에 공중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였다. 그래도 내 집이니 좋았다. 직장을 찾아 상경한 남편의 제자까지 들여, 좁은 집에 일곱 식구가 복닥거리며 여러 달을 지내기도 했다.  예전 기억 때문이었을까, 기왕이면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잠실이냐 상계동이냐 고민하다가, 남편 직장이 있는 청량리까지 버스 한 번에 갈 수 있는 상계동을 선택했다. 훗날 자식들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했다며 웃으며 투덜대곤 했다.  아이들은 커가는데 공무원 남편 월급은 내내 박봉이라 정길씨도 돈벌이에 나섰다.  양손에 큰 가방을 들고 상계동 달동네를 가가호호 다녔다. 화장품 방문판매사원이었다. 수금해온 돈이 모두 엄마 몫인 줄 알던 자식들은 ‘오늘도 엄마가 돈 많이 벌었다’며 흐뭇해했다. 정길씨는 그저 웃었다. 화장품 판매사원으로 삼사 년 정도 지냈다. 정길씨는 훗날 ‘아모레 가방’을 들던 시절을 즐겁게 회상하곤 했다.  정길씨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병중에 기독교인이 되신 시어머니가 가족 모두 교회 나가면 좋겠다며 남긴 유언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서울로 이사 오자마자 바로 근처 교회를 찾았고, 그 뒤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니면서도 교회를 떠나거나 예배를 거른 적이 없었다. 그 영향으로 자식들도 어렸을 적부터 교회 분위기, 기독교적 세계관에 익숙해졌다. 정길씨는 무엇에든 열심인 데다 현명하기도 해서 교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  성실한 기질에 신앙까지 가미되면서 정길씨는 이 정도면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입맛 까다롭고 무정한 남편에 대한 푸념을 자식들에게 늘어놓기도 했지만, 남편이 정말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정길씨는 누구를, 무엇을 딱히 싫어하거나 하지 않았다.  좋지 않을 어떤 일을 맞닥뜨려도 딱히 ‘싫다’며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무언가 집안에 벌어진 어려운 일은 자신이 지고 가면 된다는 긍정적인 정서가 컸다.  정길씨는 현명하고 꾸준했다.  집도 한 칸씩 한 칸씩 늘려갔다. 이사할 때마다 마당도 건물도 조금씩 커졌다. 40대 중반에 상계동에서 50여 평 되는 마당집을 마련한 뒤 내내 그 집에서 살았다.  정길씨는 자식 자랑을 자주 했다.  아들들이 알아서 공부도 잘하고 부모 속 안 썩여서 행복하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 오십에 큰 며느리를 본 이후 둘째, 셋째에 이르기까지 며느리들 모두 착해서 좋다고 그랬다. 한 아들에 둘씩 손주 여섯을 두었는데, 온 식구라도 모이면 아들 며느리 앞에서 손주 자랑을 했다. 그런 말 너무 마시라는 자식들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소소하나마 자식에게 문제가 있어도 특히 남들에게는 자식들 좋은 얘기를 주로 했다. 설령 속으로는 불편한 느낌이 있었어도, 싫어하는 것이 일부 있었어도,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뭐든 딱히 거절할 정도로 싫은 것이 없었다. 할 수 있으면 자신이 감당하면 된다 생각했고 무엇에든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  정길씨의 팔자였는지, 남편도 몸이 약한 편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다. 시어머니에게 이골이 났을 법도 했지만, 남편의 뒷수발도 정길씨 몫이었다. 그래도 정길씨는 남편이 병치레를 하면서도 평생 공무원으로 큰 탈 없이 지낸 데 대해 감사했다. 남편이 술을 줄였으면 좋겠다고 푸념하면서도 식사 때는 남편을 위해 늘 술과 반주거리를 대령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정길씨는 늙도록, 아니 늙을수록 남편 뒷바라지하는 데 활동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다.  정길씨의 사회적 능력과 개인적 역량을 집안에 가두어버린 남편이 불만스럽지 않냐는 주변의 핀잔도 있었지만, 정길씨는 그게 자신의 몫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정길씨는 평생을 가족, 특히 남편 중심으로 살았다. ‘이 나이에 뭘’, ‘팔십 노인이 뭘...’ 하는 체념조의 말을 종종 했다.  정길씨는 2018년 7월, 남편을 87세로 떠나보냈다.  평생 몸고생을 시킨 남편이 없으니 일견 편안할 수도 있겠다는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정길씨는 인생의 중심이라도 잃은 냥 다소 무력해졌다. 전에는 남편의 행동거지나 까다로운 입맛을 두고 쓴소리도 하더니, 생전의 남편과 생활방식이 비슷해졌다. 심지어 입맛도 비슷해졌다. 생전에 남편은 먼지 들어온다며 창문을 꼭꼭 닫고, 정길씨는 답답하다며 문을 열자고 티격태격하기도 했는데, 남편이 죽자 정길씨도 문단속을 열심히 했다. 에어콘을 켤지언정 여름에도 거실 창문을 자꾸 닫았다. 남편을 먼저 보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을까, 남편과 운동 겸 다니던 산책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남편 입맛에 맞추던 음식 솜씨는 어디로 갔는지, 남편이 떠나자 식사는 대충 때우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늘 되뇌었다. 어렵게 사는 노인 이야기, 자식에게 용돈 받아 겨우 사는 친구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늘그막에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살 수 있도록 연금을 남겨준 남편을 매우 고마워했다. 그런 남편이 먼저 떠나 외롭고 때로는 무섭기도 하던 차에 외국 살던 큰아들이 코로나19를 피해 정길씨 집으로 들어오자 정길씨는 매우 든든해 했다.  정길씨는 자다가 죽으면 제일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냐는 물음에 “전~혀 두렵지 않다”며 단호하고 여유 있게 답하곤 했다. 죽으면 자식들이 화장해서 남편 곁에 묻어주는 정도는 하지 않겠냐며 체념과 초탈 사이 어디쯤 되는 발언을 종종 했다. 집 한 채는 자식들이 서로 나눠 가지면 된다는 무덤덤한 말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일요일 예배를 드리고, 노인반 모임도 하고, 다음 날에는 50년 지기 친구와 긴 통화도 하고, 저녁도 잘 먹고, 양치도 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방에 들어가 TV를 켜놓고, 방바닥에 누운 채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몸뚱어리만 남겨놓고 호흡을 거두었다. 2021년 11월 8일 자정 직전이었다. 병원에서는 심정지로 인한 사망이라고 진단했다.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특별한 삶을 혼자 마감했다.  남들은 정길씨의 죽음이 복된 죽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그랬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1-12-08 | hrights | 조회: 1131 | 추천: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