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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복지를 원하신다면 (강국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9-27 09:59
조회
798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하는 세무 공무원이라면 보통 사람들보다 세금을 좀 더 친근하게 느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한 세무 공무원과 얘길 한 적이 있는데 이 분은 자기가 낸 세금을 “뜯겼다”고 표현했다. 세금 내기 좋아하는 국민을 둔 나라는 어디에도 없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유별나게 세금에 거부감을 보인다. 세금을 비유하는 낱말이 피와 폭탄이니 할 말 다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세금에 대한 나쁜 추억이 켜켜이 쌓인 역사였다. 역사 시험에 꼭 등장하는 게 조선 말기 ‘삼정의 문란’이었다. 갑오농민전쟁도 시발점은 세금 문제였다. 그뿐인가. 식민지, 전쟁, 군사독재와 외환위기,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 200여 년 동안 언제 한번 세금을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할 기회가 있었던가 싶다. 생존원리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인 나라에서 세금이란 그저 수탈과 착취를 달리 부르는 이름에 불과했다.


  조선총독부가 거두는 세금에 저항하는 것은 독립운동이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발표한 결의문에서 두번째 요구사항은 바로 “서민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국민경제의 밑받침인 근로대중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라”였다. 서슬퍼런 유신정권이 1977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부가가치세를 시행할 당시엔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 상인들이 철시를 했다. 부마항쟁 당시엔 시위대 손에 불탄 관공서 중에는 세무서가 있었다. 조세저항이 민주화운동인 시절이었다.


  ‘혈세’(血稅)라는 낱말은 한국에서 세금이 갖는 역사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무척 오래된 말 같지만 사실 혈세는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에서 나온 용어다. 그 뜻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혈세는 원래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병역 의무를 뜻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조선인들은 혈세를 내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조선 사람들은 징집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땅에선 이미 1920년대부터 ‘민중의 고혈을 빠는 세금’이라는 용례가 신문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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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세금폭탄은 또 어떤가. 정치인 중에선 한나라당 당대표 시절 박근혜가 최초로 사용해 대박을 친 ‘세금폭탄’은 조세에 대한 거부감을 제대로 건드렸고, 조세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켰다. 세금폭탄은 조세문제를 갈등의 최전선으로 만들어 버렸다. 세금폭탄 공격 덕분에 정권 탈환에 성공한 이명박 정부는 임기 첫해부터 ‘부자감세’ 비판에 휘청거려야 했다. 박근혜 정부는 또 어떤가.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대목이 많았던 연말정산 개혁조치는 ‘서민증세’ 논란으로 빛이 바랬다.


  국민들이 세금에 그토록 적대적인 건 사실 그동안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것에서 오는 부정적인 학습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천명한 것은 무척이나 긍정적이다. ‘증세 없는 복지’를 주장했던 박근혜 정부는 결국 비과세감면 정비와 담뱃값 인상 등 각종 ‘복지없는 증세’를 열심히 해놓은 덕분에 문재인 정부는 상당한 세입증가 효과를 누리는 것도 좋은 여건이다.


  제구실을 하는 국가란 어떤 국가일까.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헌법을 뒤져보면 답이 나온다. 헌법에는 인권증진(제10조), 고용 증진과 적정임금 보장(제32조 제1항), 사회복지와 재해예방·재난안전(제34조), 환경보전과 쾌적한 주거 보장(제35조), 소득분배 유지와 경제민주화(제119조 제2항) 등 국가의 의무로 가득하다. 다만 역대 정부가 ‘국민들이 세금 내기를 싫어한다’거나 ‘증세에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알리바이 뒤에 숨었을 뿐이다. 국가의 의무를 다하려면 돈이 든다. 우리가 내는 세금이 우리나라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는 여러 선거를 거치면서 국민적 합의에 거의 도달한 문제다. 그러려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하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부가가치세율이 25%(한국은 10%)를 넘나드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높은 복지지출 수준은 높은 조세 수준을 요구한다. 북유럽 복지국가는 높은 복지 수준을 위해 높은 조세수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높은 직접세만으론 충분하지 않으니까 간접세 수준도 높다. 그렇게 모든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징수해서 모든 국민들을 위한 복지지출에 돈을 쓴다. ‘보편복지’는 언제나 ‘보편증세’와 짝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냐’에서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우리나라를 나라답게 가꾸자’로.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