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촛불은 저 언덕(우금치)을 넘을 수 있을까 (김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52
조회
456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촛불 집회를 뒤로하고, 오랜만에 지인들과 동행 방문한 장소가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 전적지’였다. 햇볕 한 움큼도 들지 않는 음습한 자리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서 있었다. 위령탑이 부서져 내리며 빨간 벽돌이 뼈처럼 드러나 있는 모습에서 이루지 못한 미완의 혁명, 그 얼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서해성 작가는 위령탑이 서 있는 장소가 동학농민혁명군이 전몰당한 장소가 아니라,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혁명군에게 총을 쏘아대던 장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동학혁명위령탑이 혁명 전사들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장소가 아니라 참살당한 영혼을 구금 유폐한 장소처럼 보였다.


20170222web01.jpg사진 출처 - 구글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었으며,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널리 백성을 구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운동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이라고 다 인간이 아니었던 세상.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던 천대받던 민초들도 다 같은 인간이고, 모든 인간을 하늘처럼 귀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평등사상을 이 땅에 실현하려던 혁명운동이었다. 그러나 120여 년 전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부패한 권력과 일본군 앞에 무릎을 꿇었고, 선혈만 낭자한 피고름으로 남았다. 그리고 국가도 주권도 잃어버렸다.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헌정유린과 권력 남용을 일삼으면서 주권자인 국민을 개·돼지 쓰레기 취급하다가 탄핵소추 되었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에 대한 사망선고를 앞 둔 시점에 후안무치하고 무도한 자들이 벌리고 있는 광기들이 가관이 아니다.


석고대죄 해야 할 자, 단죄 받아야 할 자가 누구인데, 거꾸로 시민이 벌 받는 사람처럼 주말엔 광화문으로 출석해야 한단 말인가. 주말을 빼앗긴 고단한 삶의 촛불은 변함없이 타오르고 있는데, 그 끝이 무엇인지도 참으로 우려스럽다.


부패하고 더러운 권력을 처단하여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며, 차별과 배제 특권 없는 평등 세상을 갈구하였던 120년 전의 동학혁명과 촛불혁명의 함성이 놀랍도록 닮아있다.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 같은 간신들이 감옥에 갔다는 사실은 동학혁명보다 한발 앞선 전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 모리배들이 일부 구속되었다고 촛불의 꿈이 완수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시민은 알고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 촛불혁명의 꿈. 정의를 짓밟은 자들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시민의 바램이다.


라틴어에 기원을 둔 평등은 공정, 정의를 의미한다. 평등한 세상,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 권력과 부를 가진 자만이 인간 취급 받는 세상을 배척하자는 것. 법률 앞의 형식적 평등을 넘어서자는 것. 그래서 부자와 빈자 사이에 자유의 불평등한 향유가 발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인격적으로 존엄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세상. 그것은 한낱 꿈으로 끝날 꿈에 불과할까.


국민의 대표기관인 2월 임시국회를 보면 촛불의 꿈이 어찌 될 것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상법, 고위공직자수사비리처 신설 법안, 공영방송 정상화 법안 등이 꿈의 계단을 올라가는 첫 걸음마가 될 것이다. 첫 계단도 올라서지 못한다면 120년 전의 함성처럼 혁명은 미완의 변주곡으로 끝나 버릴 것이다.


20170222web02.jpg사진 출처 - 구글


서해성 작가의 혼이 담긴 한마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들은 저 언덕(우금치)을 넘지 못했다.”.....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저 언덕을 넘을 수 있을까.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2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