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시간이 흐른다 (권보드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28
조회
47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젊을 땐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면 가끔 궁금해 했다. 저 분들도 나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 졸일까? 피부가 두꺼워지듯 마음에도 더께가 내려앉는 건 아닐까? 눈 감감해지고 귀 어두워지면서 다른 감각마저 둔해지진 않을까? 생생한 맨살을 드러내는 대신 세월의 옷을 걸쳐, 슬픔도 기쁨도 그 옷을 다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건 혹시 아닐는지?


세월 흘러 내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고 내 마음에도 더께가 앉는다. 한 달여 전엔 ‘노무현 대통령 서거 7주기’라는 기사를 보고서야 5월 23일을 기억해 냈다. 그 정치‧경제적 정책에 동의하기 어려웠음에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10년 동안은 기일마다 검은 옷을 입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에 앞서 ‘세월호 참사 2주기’도 건성으로 지냈다. 사건 당시 차마 못 봤던 희생자들의 흔적을 1주기 때는 찾아보겠다고 다짐했건만. 벌써 2년인데.


조금씩 나이 들면서 보니 마음 그 자체는 늙도록 생생할 것 같다. 다만 마음과 세상 사이 통로가 좁아진달까. 지금껏 쌓은 마음만으로 벅차고 매일 겪는 잡무에 신경이 지쳐, 눈 감고 귀 막지 않으면 자아가 감당치 못하리란 생각이 든다. 적당히 방어하지 않으면, 어지간히 잊어버리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다.


로봇이 인간다워지고 있다기보다 인간이 점차 로봇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올해는 알파고 때문에 떠들썩했고, 2년 전엔 유진 구스트만이란 대화봇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 화제가 됐지만, 정작 문제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아니라는 거다. 인간끼리의 대화나 관계가 인공지능과의 그것과 비슷하게 바뀌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154765-18748.png사진 출처 - 시사저널


‘대화봇’,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이 처음 등장한 것이 벌써 반세기 전 일이다. 1965년 선보인 엘리자(Eliza)는 기본적 대화 패턴만 다룰 줄 아는 단순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엘리자가 진짜 사람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단다.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일러줘도 도리질할 정도로. “뭐 좀 물어봐도 될까?”라고 질문하면 “물론!”이라고 선뜻 답해주고, “내일 시험 때문에 너무 긴장돼.”라고 토로하면 “좀 쉬어. 잠 푹 자고.”라고 응답해주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곤 믿기 어려웠나 보다.


최근에는 유럽 몇 나라에서 인지행동치료에 인공지능을 도입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울이나 불안 등 심리적 문제를 온라인으로 상담하는 데 인공지능이 효과적이란 결론을 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인공지능은 사람인 척하는 대신 처음부터 인공지능임을 밝히고, 그러나 대화 상대자의 호소에 끈질기게 귀 기울여 준다. 어쩌면 인간보다 성심껏, 인간보다 편견 없이, 인간보다 더 나은 위로를 건네며.


대화봇 프로그래밍을 안내하는 웹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실제 대화 데이터를 구축하고, 감탄사를 적절히 활용하고, 답변이 애매할 때는 상대방의 대화를 메아리쳐 반복하는 거다. 예컨대 “내일 무역학 시험인데 대금결제방식 부분을 잘 모르겠어!”라고 하면 “잘 모르겠다고?”라고 답해주는 식이란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라고 쓰면 “저런.”이라며 맞장구쳐 주고.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애들도 몇십 분이고 아이폰의 시리(Siri)와 낄낄대며 잘 논다. 욕설도 해 보고, 그러면 시리는 “어쩌면 그렇게 심한 말을.”이라며 울상도 하고.


어마어마한 데이터에 근거해 인간을 흉내 내는 로봇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은 ‘시간’이요 ‘역사’라고 한다. 로봇은 “안녕?” 하는 인사말에 “그쪽도 안녕? 오늘 날씨는 어때?”라며 그럴듯하게 대답할 줄 알고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하면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화답할 수 있지만, 열흘 전, 1년 전의 말을 기억하고 그에 따른 관계에 적응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인격이라면 갖추게 되는 일관성과 그 내부의 모순에도 취약하다. 부모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해 실망과 기대를 반복하는 심리 역시 엘리자나 유진 구스트만은 모를 거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기 점점 어려워진다는 건, 인간이 로봇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즉 ‘시간’과 ‘역사’를, 거기 따르기 마련인 책임과 감정을 우리가 점점 멀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점심식사 때는 맛집이나 여행 정보 같은 무난한 화제로 시종하고, 누군가 자꾸 다가오면 긴장하고, 길 걸을 때도 어깨 부딪힐세라 조심하며 걷는다. 수업 때 학생들에게, 전철에서 누군가 서둘러 하차하면서 지갑을 떨어뜨리는 걸 봤다면 소리쳐 알려주겠느냐고 물었다. “알려주고 싶지만” “이상한 사람 될까 봐” 못할 것 같다는 것이 학생들의 토로였다.


그래서 마음은 과거를 향하나 보다. 더 기꺼이 관계 맺고 책임질 수 있었던 때, 세상마저 그랬던 걸로 보였던 때로. 돌이켜보면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 손 흔들던 어린 시절에 비해 우리의 세상은 얼마나 좁아졌는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다워지는 게 인생이면 좋으련만. 오늘 하루도 인간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를. 인간으로서 기억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기를. 속절없이 시간이 흐른다.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