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신영복 선생님을 추억하며 (김창남)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16
조회
561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신영복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어느새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장례를 치루면서 3킬로 정도 빠졌던 내 체중도 다시 원 상태로 회복되었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늘 하던 대로 그럭저럭 살아간다. 여전히 ‘신영복 선생님 안 계신 세상’에 산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언제든 전화 드리면 반갑게 받아주실 것 같고, 찾아뵈면 늘 그랬듯 정감어린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시고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나를 웃겨 주실 것 같다. 영결식 날 김제동 군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냥 선생님 안 돌아가신 걸로, 늘 곁에 계신 걸로 생각하며 살고 싶다”던 말.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서너 군데 언론사에서 추도사를 청탁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추도사란 어느 정도 객관적 거리를 가진 사람이어야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 선생님을 부모처럼, 스승처럼, 형님처럼,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사실 상주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니 추도사를 쓸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 두 달이 넘어 지나 조금은 마음을 추스르고 신 선생님에 대한 개인적 추억을 떠올리며 몇 자 적어볼까 한다.


지난 20년 성공회대에서의 내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신영복과 함께 한 삶’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이 학교를 사랑하고 이 학교의 일원임이 자랑스러웠던 이유를 단 하나만 대라면 여기 신영복 선생님이 계시고, 내가 바로 그 분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이었다. 나는 늘 선생님이 하시는 일을 도우려 했고 가시는 길에 동행하고자 했다. 선생님은 모자란 나를 마다하지 않고 받아주시며 함께 해 주셨다. 하지만 언제나 지나고 생각해 보면 내가 신 선생님을 도운 게 아니라 그 분으로 부터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은 것임을 깨닫곤 했다.


신 선생님이 아직 퇴임하시기 전, 매일 아침 학교에 나오면 선생님 연구실에서 차를 마셨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교수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대화 소재를 갖고 계셨고 수많은 고전의 구절들과 징역살이의 일화들을 통해 숱한 배움을 주셨다.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지식과 기억들을 간직할 수 있을까, 늘 경이로웠다. 선생님은 어느 자리에서든 제일 재미있는 농담을 던지며 우리를 웃게 하셨다. 선생님과 함께 한 날은 딱 그만큼 즐거웠고 안 계신 날이면 딱 그만큼 허전했다. 수요일에는 함께 축구를 했다. “감옥살이 20년만큼 나이에서 빼야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다 싶을 만큼 선생님은 건강하셨고 축구 솜씨도 빼어났다. 우리 축구단은 선생님이 즐겨 쓰시던 붓글씨의 글귀를 따 ‘여럿이 함께’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내가 신영복 선생님과 함께 축구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며 부러워했다.


20160324web01.jpg사진 출처 - EBS


신 선생님 정년퇴임 무렵부터 동료 교수들과 함께 선생님으로부터 서예를 배웠다. 나는 수제자를 자처하며 서예회장을 맡았지만 재주도 없는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제자들이 선생님의 깊고 넓은 서도(書道)와 서예(書藝)의 경지를 흉내조차 내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할 수 있었지만, 그건 모두 게으른 제자들을 독려하며 한 자 한 자 써주다시피 하신 선생님의 헌신 덕분이었다. 물론 장학금의 대부분은 신 선생님 작품의 판매를 통해 얻어진 것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신 선생님이 퇴임하신 후 마지막 몇 년 간 인문학습원과 강연콘서트를 통해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영광이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습원 일을 선생님 곁에서 조금씩 돕기 시작하다 결국은 내가 인문학습원장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 밤늦게 강좌가 끝나고 나면 내 차로 선생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 언젠가 내 차를 타고 가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면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붙여서 피곤한데 김 선생 차를 타면 아무 말 안하고 갈 수 있어 편해요.” 무뚝뚝하게 앞만 보며 운전하는 내 성격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선생님은 언제 누구와 함께 하든 상황에 가장 적합한 말씀으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시곤 했다.


2009년 무렵부터 선생님과 더숲트리오가 함께 하는 강연콘서트를 다녔다. 두 번의 전국 투어를 포함해 수십 번은 더 다닌 것 같다.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 선생님은 늘 진심을 다해 강연하셨고 강연 끝내고 피곤하신 가운데에도 싸인을 받고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내 주셨다. 강연콘서트를 함께 다니며 선생님의 강연을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 선생님의 강연은 듣고 또 들어도 매번 재미있고 감동적이어서 똑 같은 얘기에 똑 같이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짠해지는 경험을 숱하게 했다. 지방 강연을 가면 늘 선생님과 내가 한 방을 썼다. 그렇게 오랜 세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단 한 번도 선생님이 허튼 소리를 하시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단정하고 겸손하고 누구에게든 진심과 배려로 대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수양, 어느 정도의 내공이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감탄하곤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거동 못하고 누워계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마비가 다리 쪽부터 위로 올라오고 있어. 이제 가슴까지 왔네. 얼마나 다행이야.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는 게.” 선생님은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 신영복 선생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눈과 삶의 태도를 새롭게 가다듬게 만드는 수많은 지혜를 남기신 사상가셨다. 언젠가 선생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친구가 되지 못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되지 못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말씀. 그 분은 내게 최고의 스승이고 최고의 친구였다. 지난 1월 15일 나는 최고의 스승과 최고의 친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그 빈 자리는 아마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성공회대학보(vol.270)에 실린 ‘신영복 선생님을 추억하며’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