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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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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한 386이 한국의 청년들에게 띄우는 편지 (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13
조회
476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녕들 하십니까.


인사를 이렇게 시작하니 몇 년 전 한 대학생이 붙였던 대자보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이후로 거의 모든 상황이 더 열악해 진 것이 분명한데, 다들, 정말, 안녕들 하십니까.


모든 사회가 그렇겠지만, 한국 사회 역시 조용히 흐르던 시냇물이 특정한 국면을 만나 급류로 몰아치곤 합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그러했고, 노동자 김진숙 씨와 배우 김여진 씨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이 그랬죠. 별 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움직임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공감대를 건드렸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엔 누가 만들어냈는지 모르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일종의 정신적 급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결국은 우리 공동체가 내는 사회적 비명인 셈이고,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정치가 작동해야하는 지점일 겁니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가 불구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안으로 곪아가고 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또다시 국내 정치를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인터넷 덕분에 실시간으로 국내 소식을 접하면서도 몸이 떨어져 있으니 체감이 잘 안 되는 게 사실입니다. 전 정권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면서 집권한 박근혜가 선거철이 다가오자 예외 없이 북풍 몰이를 시작한 것도, 안철수가 급기야 야권을 분열시키고 호남 식탁에 숟가락을 얹었다는 소식도 먼 나라 일처럼 느껴집니다.


안철수라는 문제적 인물에 대해서는 몇 해 전 발자국 통신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안철수의 정치가 의심스러운 이유(13/7/3)」(원문보기 클릭) 이 글을 썼을 때가 안철수와 김한길이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들기 한참 전이었는데 이제 두 사람이 ‘더불어’ 민주당을 탈당해 새 정당을 만들었으니 다시 그때로 돌아간 셈이군요. 역시 사람 잘 안 바뀐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합니다. 영남 공략은커녕 야당 텃밭인 호남에서 편하게 시작하려는 ‘범생이’ 정치의 속셈도 여전하고, 애매모호한 중도 전략도 여전하네요.


그런데 그가 국민의당 경제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버니 샌더스와 자신을 비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안철수의 샌더스 ‘빙의’는 소가 웃을 일이지요. 더불어민주당의 오른쪽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는 안철수와 미국 민주당의 왼쪽에서 민주당을 비판하는 샌더스의 정치적 스탠스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샌더스는 부자세 신설과 월스트리트 투기 자본 과세 강화 같은 구체적인 좌파적 공약을 내걸고 있지만 안철수는 여전히 ‘공정성장’ 같은 애매한 수사를 반복할 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국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만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미국과 한국의 정치 지형에 대해서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지금 미국 대선은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민주당 후보 버니 샌더스의 ‘이상’ 돌풍 현상으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둘 다 비전형적 정치인들로서 평상시라면 후보조차 되지 못했을 사람들인데, 오히려 각 당의 전형적 정치인들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은 공화당의 전통적인 캐치프레이즈라고 할 수 있지만, 외국인 혐오증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종교적 차별까지 공언한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히틀러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샌더스는 미국 역사에서 사회주의(정확히는 사회민주주의) 이름을 걸고 의미 있는 후보가 된, 과문한 제가 알기론 최초의 사례입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폴 크루그먼(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경제학자) 같은 사람이 샌더스의 공약이 비현실적이라고 강력히 비난하고 나선 걸 보면 힐러리 진영의 위기감을 짐작케 합니다.


6001576121_20150803.JPG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렇게 미국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좌우의 진폭이 큰 상태로 치러지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민주당 정부 8년에 갑갑함을 느낀 공화당원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면, 샌더스는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으로 대변되는 미국 청년층의 변화의 갈망에 대한 정치적 응답이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최소한의 합의 위에서 움직여오던 미국 정치의 갭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미국 사회의 모순이 심화하고 있고, 갈등도 커지고 있는 겁니다.


갈등이 크다고 해서 미국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정치의 본령이 갈등을 푸는 것일진대, 갈등 없이는 정치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회적 갈등이라는 게 결국 부의 재분배 방식을 놓고 벌어지는 견해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므로(좌파와 우파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하죠), 갈등이 없는 게 이상한 일일 겁니다. 오히려 엄연히 존재하는 갈등을 은폐하거나 갈등에 대한 논의 자체를 사회악으로 몰아가는 사회가 건강하지 않은 사회겠지요. 한국 사회가 바로 후자에 속합니다.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위험한 이유는 그가 갈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통합은 주류이자 우파의 언어입니다. 거대한 사기극이 되어버린 박근혜의 국민대통합 공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사람이 야당을 택했을까요. 지금 여당이 워낙 후지기 때문이겠죠. 아시다시피, 새누리당은 보수라기보다는, 지역감정에 기생하는 시대착오적인 이익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재야의 현인’이었던 안철수가 택하기에 무리가 있었습니다. 안철수처럼 상식과 합리를 앞세우는 분이 새누리당에 들어갔다면 새누리당이라는 비정상적 집단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는 데 기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안철수 개인으로도 지금보다는 더 성공한 정치인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야당을 택했고, 이 때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갈등의 본질을 은폐하고 흐리는 게 여당의 목적이라면 야당은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을 촉구하는 구실을 해야 하는데 지금 야당은 여당이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견인하고 있는 사람이 안철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물론 문재인의 ‘착한남자 콤플렉스’도 한 몫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도전쟁을 벌여야 할 만큼 상황이 한가한가요. 부의 집중이나 불평등 정도는 미국이나 우리나 비슷합니다. 이 문제의 해법으로 트럼프는 더 강한 미국을 만들어야 경제도 나아진다는 우파 논리를 펼치고 있고, 샌더스는 부자들과 투기자본의 부를 하향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샌더스의 공약도 매우 단순하고 명쾌해서 과격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안철수가 이런 사정을 알고도 샌더스와 자신을 비교한 건지 궁금합니다.


같은 동네 사는 한 대학 교수는 은퇴 뒤에 이곳 미국에 와서 살겠다고 공언하더군요. 한국 정치에 미래가 보이지 않아 돌아가기 싫다는 겁니다. 자민당이 장기 집권한 일본처럼 한국도 정말 새누리당의 장기집권으로 가는 걸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끝은 부의 집중 심화와 일본식 장기불황이 될 겁니다. 일본은 그나마 제조업체들이 탄탄하게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지만, 우리 경제는 4대재벌과 몇 개 공기업을 빼면 거의 빈 깡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식 저성장은 실업자를 양산하고 가계부채의 뇌관을 건드리는 재앙적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이 부러운 건 여전히 갈등하며 토론하고 해법을 찾느라 분주하다는 겁니다. 젊은층의 목소리도 확실한 방향성과 힘을 갖고 있습니다. 200살이 넘은 미국이 70살도 안 된 한국보다 더 젊어 보입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확실히 보수적이고 노인스럽습니다. 정치든 경제든 외교, 대북정책이든 새로운 발상이나 시도는 보이지 않고 과거로 급격히 퇴보하고 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10년 집권이 남긴 유산이겠지요.


한국 사회가 다시 젊어지려면 청년들의 목소리가 커져야 합니다. 한국의 조로증은 386세대의 노화와 관련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때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386의 정치실험은 ‘정신적 386’인 노무현의 퇴임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386을 포함한 기성세대에게서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미국의 청년들처럼 한국의 청년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직접 찾아내야 합니다. 앞에서 샌더스가 미국 청년들의 변화의 갈망에 대한 정치적 응답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표현을 좀 더 정확히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샌더스가 응답한 게 아니라 미국 젊은이들이 샌더스를 찾아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샌더스는 수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해왔고 그를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불러낸 건 불평등에 분노한 미국의 청년들입니다. 이런 걸 시대정신이라고 하죠.


‘안녕들하십니까’ 운동에서 청년들이 보여줬던 날카로운 시대정신이 정치의 영역에서 발휘되길, 그리하여 이 답답한 정치판을 확 쓸어버릴 수 있는 힘을 가져주길 바라는 수 밖에요. 조로한 서생의 소심한 바람입니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2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