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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hell 朝鮮) 탈출법 (서상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11
조회
616

- “아직은 할 일 있어 못 죽겠다고 전해라.”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헬조선(hell 朝鮮)」
‘야…! 누가 만들었을까, 이 말?’


‘헬조선’이라는 말을 처음 대하는 순간 찬탄과 함께 궁금증이 일었다. 21세기를 10여 년 경과한 현재 한국 사회를 이처럼 교묘하면서도 적확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정말 궁금해서 몇 날 며칠을 시간 날 때마다 인터넷이나 SNS 등을 뒤졌다. 2012년 6월경에 처음 등장한 인터넷 신조어라는 사실까지는 어떻게 알아냈지만 이 기막힌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특정 사이트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국민적 유행어가 된 ‘헬조선’ 신드롬에 대해 어떤 이는 '노력하지 않는 이들의 과장된 엄살'이라 평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삶의 위기에 처한 젊은이들의 절절한 구조 요청'이라고도 한다. 내 생각은 후자에 가깝다.


토마스 홉스(T. Hobbes)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갈수록 벗어나기 힘든 현실이 되면서 우리 삶에서 ‘인간미’가 사라지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더불어 살아가던 그 ‘인간’ 말이다.


인간 간의 유대는 점차 상상하기 어렵게 되고, 그래서 각자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절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로지 권력과 자본만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숨 막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은 현실은 젊은이들의 73%가 ‘탈(脫)조선’, 한국을 떠나고 싶도록 만드는 게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을 대면하면서도 '청년들이여 도전하라', '진취적인 젊은이가 되라'는 등의 멘토링이라니…. 그러나 이 말은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모순을 은폐하려는 논리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기성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면서 젊은이들을 어루만져주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삶의 만족도 117위. 이라크나 남수단과 같은 나라보다 더 낮은 수준 때문에 ‘헬조선’을 외치며 ‘탈조선’만을 꿈꾸는 현실. 2014년도 현재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 수는 2만 명이었지만 한국국적을 포기한 사람이 5만 명을 넘어선 것도 이 같은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탈조선’의 일환으로 호주나 캐나다 등지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그러나 그런 시도조차 못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우리의 가까운 현실이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지잡대'라는 말이 이러한 현실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말 그대로 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을 줄인 단어다. 이미 관용어가 되다시피 한 이 말에는 대학 서열화가 낳은 비아냥과 패배주의 등 우리 사회의 모순이 짙게 배어 있다.


'지잡대'는 요즘 유행하는 ‘수저 계급론’으로 보면 '흙수저'에 해당한다. ‘헬조선’에서도 맨 밑바닥인 셈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헬조선의 젊은이들 중에서도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대학을 나온 이들이 겪게 되는 몇 겹의 절망이 '지잡대'를 만들어낸 배경이다.


어떠한 모습의 발전도 결국 사람이 이뤄내는 일인데 지역 인재들이 모두 서울로 가 버리고 지방대 졸업생조차 서울로 갈 수 있는 기회만 엿보고 있는 상황. 문제는 현재의 격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에 있다.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한국을 탈출하는 것이 꿈을 위한 도전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탈출이기에 더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누구나 탈출을 꿈꾸는 세상. 하지만 각자가 꿈꾸는 그런 탈출이 가능할까. 역으로 굳이 그런 탈출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가능한 것일까.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 먼저인가, 탈출을 고민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 먼저인가. 결국 내 고민의 지점은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헬조선’의 현실 속에서 혼자서는 아무리 ‘지◯발광’을 해봐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겪어온, 지금도 겪고 있는 생생한 현실 아닌가. TV나 영화 등 매스미디어에서는 ‘흙수저’들의 절망과 분노를 미끼로 ‘정의의 사도’나 예의 ‘신데렐라’를 양산해내고 있지만, 그 또한 해당 매체 앞에 앉아있을 때뿐이다. 절망은 더 깊어진다.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심연이 더 크게 자각될 뿐이다. 결국 죽지 않는 한 ‘도망갈 데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기에, 그냥 죽기는 너무 억울하기에 ‘탈조선’의 대열에 끼어보려고도 하나 그마저도 쉽지 않다.


왜 이럴 때 영화나 드라마 속 단순한 장면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깊은 구렁이나 함정에 빠진 주인공이 제 힘으로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어깨를 받쳐주는 조력자나, 줄이나 사다리를 내려주는 이가 등장한다.(007시리즈의 경우만 빼고.) ‘나’ 이외의 ‘타자’, 그것도 나 혼자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바꿔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전제될 때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물론 그것이 해피엔딩을 보장해주진 않지만.)


‘나’의 문제를 나 혼자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또는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게끔 조작된 현실이 오늘의 ‘헬조선’이다. 사람이란 원래 더불어 살아가게 지어진 존재임을 망각하게 만들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을 부추기는 게 오늘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자본주의다.


이제, 지금 이 자리에서 ‘탈조선’의 씨앗을 찾아보자. 나를 도와줄 우군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없다면 지금부터 만들면 된다. 한 사람의 우군 정도는 만들 수 있도록 지어진 존재가 사람이다.


그런 다음은, 그런 우리끼리 연대의 고리를 맺어가는 것이다. 이 연대의 고리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탈조선’을 위해 딛고 설 사다리는 강고해진다. 이 연대의 폭을 넓혀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참여와 소통이 전제돼야 한다.


현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힘들어하는 ‘나’ 같은 ‘나’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가는 길이 참여의 첫걸음이다. 수많은 좌절과 슬픔으로 빚어진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보자는 말이다. 까짓것 죽기밖에 더할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솔직히 용기 내기가 쉽진 않다. ㅋ..
‘탈조선’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던지고 싶다. 아니, 함께 외치고 싶다.


“아직은 할 일 있으니 못 죽겠다고 전해라.”, “내가 희망이 될 터이니 걱정일랑 잠시 제쳐두라고 전해라.”


이 글은 2016년 1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