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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김창남)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06
조회
516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분명히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요즘 방영되고 있는 jtbc 드라마 <송곳>의 대사다. <송곳>은 대형 유통 매장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사측의 온갖 박해와 음모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다룬 드라마다. 잘 알려진 대로 최규석의 인기 웹툰이 원작이고 드라마는 원작의 대사와 전개를 비교적 충실히 옮기고 있다. 원작 만화를 읽을 때 이런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영화라면 몰라도 드라마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이 드라마화 되었다.


20151023_092606_8757.png.tn580.jpg드라마 <송곳>의 두 주인공. 지현우(왼쪽)는 이수인 역을, 안내상은 구고신 역을 맡았다.
사진 출처 - JTBC


<송곳>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이수인(지현우 분)과 구고신(안내상 분)이다. 이수인은 상식과 윤리에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그런 깐깐한 성격 때문에 어디서나 ‘무난한’ 적응에 실패하고 왕따가 된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가시밭길을 어쩔 수 없이 가고야 마는 바로 ‘송곳’ 같은 인물이다. 구고신은 학생 운동 경력을 가진 노동상담소장이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운동에 나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송곳>의 또 다른 주인공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가 싸움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객관화하고 노조운동의 의미를 함께 깨달아 가는 마트의 노동자들 자신이다. 이들이 사측의 회유와 압박을 극복해 가며 조금씩 노동조합의 대의를 공유해가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부담스럽고 무거운 소재이지만 비교적 경쾌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이끌고 가는 연출도 칭찬할 만하다. 특히 이 작품이 가진 미덕은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조원들을 못살게 구는 상사들이 그저 나쁜 개인들이 아니라는 것, 그들 역시 또 다른 ‘갑’들에 의해 억압받는 ‘을’들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측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면서 직원 해고에 앞장서는 정민철(김희원 분)은 악랄한 인물로 보이지만 사실 더 높은 임원들에게 상시로 위협받고 모멸스러운 말을 들어야 하는 또 다른 약자일 뿐이다. 간명한 선악구도에서 벗어나 노동자로서의 삶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얽히는 중층적인 현실의 모순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노동조합, 노동운동은 일종의 금기어다. 노동자는 패배자이고 노동조합은 위험한 조직이며 노동운동은 사회에 대한 위협이라는 게 언론과 교육이 끊임없이 말하는 바이다. 20대 신규 취업자의 80%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라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 <송곳>의 대사에도 나왔지만,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때 모의 단체 교섭을 배우고,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사회 과목에서 노동자의 단체 교섭 전략을 배운다.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배우지 못한 ‘노동’의 문제를 학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송곳>은 한국 드라마 역사에 기록될 기념비적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이런 드라마가 다름 아닌 삼성 재벌의 뒷받침을 받는 jtbc에서 방송되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논점을 던져준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드라마에 대해 다소 찜찜하거나 유보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간단치 않은 문제이지만, 나는 삼성 재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그것대로 유지하면서 이 드라마의 가치에 대해 평가하고 성원하는 것은 충분히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고발하는 사회비판적 텍스트가 자본의 이윤을 높여준 사례는 차고 넘친다.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많은 영화들이 그랬고 60, 70년대의 숱한 저항적 음악들이 그랬다. 대중문화는 언제나 자본의 지배 에너지와 대중의 저항 에너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끊임없이 유동한다. 자본은 이익이 된다면 스스로에 대한 공격조차도 상품화시킬 만큼 유연하다. 중요한 건 그 유연함의 틈을 파고들면서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텍스트가 좀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대사는 이 드라마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그 대사를 들을 때마다 이 사회가 바로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을 점점 더 사라지게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거대한 악이 구조화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워야 하는 현실에서 송곳 같은 인간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지 않는가. 교육과 언론, 온갖 문화적 기제들이, 오직 권력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면서 송곳의 싹을 잘라버리지 않는가. 드라마 <송곳>이 더욱 돋보이는 건 바로 ‘송곳’ 같은 인간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