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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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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때문인 듯, 그 말 때문이 아닌 듯 (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04
조회
449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주의 일입니다. ‘일상의 실천과 변화가 바로 세상을 만드는 힘’이라 믿는 시민단체의 10주년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단체라고는 하나 실은 사무국장 한 사람이, 그야말로 1인 10역을 해오면서 10년을 꾸려온 곳입니다. 수년 전에 인권연대를 통해 알게 된 이후, 단체의 대표이며 사무국장이며 행사 진행자이며 온갖 허드렛일도 담당하는 그는 매번 소식지를 보내왔습니다. 소식지를 볼 때마다 외람된 말이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소식지를 통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저는 그 단체의 행사에 참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제가 낯선 사람들이 모인 행사, 더구나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사랑방 같은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사 열흘 전쯤, 열 사람의 몫을 혼자 하고 있는 사무국장에게서 10주년 행사가 있으니 참석을 바란다는 점잖은, 말 그대로 고지성 문자가 왔습니다. 일주일 전 또 다시 문자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꼭’ 참석을 바란다는 문자였습니다.


행사 삼일 전의 문자는 눈물겨웠습니다.


‘이제 3일 남았습니다. 많이 안 오시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으로 불안함에 떨고 있는 요즘입니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을 믿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10주년 기념 행사인 만큼 큰 맘 먹고 100석이나(!) 되는 장소를 예약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꼭! 좀 와주세요!’라는 문자의 끝 문장에, 야심차게 준비한 초대형 행사에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사무국장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행사 당일 오전에 받은 문자는 이랬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꼭 와주세요.’


이럴까 저럴까 하며 머리를 굴리던 저는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그날, 피치 못할 바쁜 일도 없는 주제에 별 걱정을 다하고 있는 제 꼴이 한심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었습니다. 기분 좋게 참석하면 될 일이니까요.


출판사를 찾아온 사람들이 돌아갈 때쯤이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요즘 읽을 만한 책 있어?”


그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출판사에 이렇게 왔으니 책이나 한 권 줘...”


출판사에 가면 책을 한 권쯤 그냥 받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버렸나 봅니다.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저 ‘역시’ 습관처럼 지인에게 책을 주곤 했습니다.


images?q=tbn:ANd9GcTvqcFR6fvmVk-p8SlyCHzJSRicIz_8FrFWCnVVVdKle1Hs8X4aLQ사진 출처 - 구글


몇 년 전의 일입니다. 글을 쓰는 친구 A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제가 잘 알고 있는 출판사에 다니는 편집장 B 때문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너, B 잘 알지?”
“잘 알지. 걔 잘 지내나?”
“잘 지내고 뭐고 그놈 진짜 개떡 같은 놈이야.”
“갑자기 왜.. B가 어쨌기에?”


A의 다짜고짜는 이랬습니다. 겸사겸사 B가 있는 출판사에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마침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한 권 달라고 했다, B가 정색을 하며 불쾌한 표정을 짓더라,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A야, 넌 세별전자에 가서 냉장고 하나만 달라고 할 수 있냐?”


그 말을 들은 A는 ‘더럽고 치사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책을 못 주면 못 준다고 곱게 얘기할 것이지 냉장고 운운하며 모욕감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어 저에게 전화로라도 하소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귀한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다시는 B와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잠시 후 B에게 전화했습니다. A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습니다. B의 대답은 간단명료했습니다.


“아는 사람도 안 사보는 책을 누가 사보겠니?”


사무국장이 1인 10역을 하는 그 단체의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100석의 좌석도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행사를 마친 후 사무국장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정말 과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더 힘 있게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1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