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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제국 유람기 (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02
조회
553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에서 살게 된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그동안 겪은 미국인들은 대체로 상냥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도 반갑게 안부를 묻고 1m 이내로 근접할 때는 반드시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줄이 길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서서 기다린다. 한국 같으면 진즉 고성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관공서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마치 다른 나라 사람 같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고압적이다. 이 기묘한 불일치는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착한 미국 서민들을 보면서 나는 양처럼 순한 일본인들을 떠올렸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迷惑を 掛けるな, 메이와쿠오 가케루나) 교육을 어릴 때부터 철저히 받는 일본인들은 미국인 이상으로 착하다. 일본의 ‘메이와쿠오 가케루나’ 문화를 설명하는 가장 유력한 분석은 그 뿌리를 사무라이 지배에서 찾는 것이다. 함부로 나대다가 언제 칼 맞을지 모르니 스스로 조심하는 문화가 형성됐을 거라는 얘기다. 사무라이들이 새 칼을 시험하려고 지나가는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미국인들이 상냥하고 양순한 이유도 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함부로 나대다가 언제 총 맞을지 모르니 그럴 법 하다. 무지막지한 경찰의 폭력이 합리화되는 지점도 결국은 총이다. 경찰이 스스로 위협받았다고 판단하면 폭력은 정당화된다. 경찰의 폭력은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는다. 무기도 없는 시민을 길바닥에 눕혀놓고 주먹으로 때리는 경찰관의 모습이 거의 매일 아침 방송 뉴스를 장식한다.


세계 일류 국가이자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고도 참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방인으로서 약간의 만용을 부려 추측해 본다면, 나는 그것이 국가주의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 초등학교는 지금도 수업 시작 전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1년 365일 집 앞에 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있는 집이 수시로 눈에 띄는 것은 이렇게 철저한 국가주의 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나보다 국가를 앞세우게 되면 개인의 희생은 당연한 일이 된다. 강력한 국가와 나약한 국민.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고압적인 태도는 자신들이 국가의 대리인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 질문은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세계 일류 국가인데도 왜 참느냐가 아니라 세계 일류 국가이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유보하는 대신 세계 최강 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미국인들을 지탱하고 있다. 온순하기 때문에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신민이기 때문에 온순해 진 것이다. 가까이서 본 미국은 애국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전형적인 제국의 논리를 갖고 있다.


20151028web01.jpgNBC방송의 <제리 스프링거 쇼>
사진 출처 - 구글


스트레스는 3S(Sports, Screen, Sex)로 푼다. 지구상에서 가장 과격한 스포츠인 미식축구, 세계 최고의 자본과 인력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포르노 산업. NBC방송의 <제리 스프링거 쇼>처럼 일반인들이 스튜디오에 나와 서로 주먹다짐을 하는 막장 프로그램이 한낮에 티브이에서 방송되기도 한다. 애인을 빼앗겼다며 주먹을 날리는 여자들의 악다구니를 보며 미국인들은 국가권력 앞에 왜소해진 자신의 폭력 본능을 쓰다듬는 것일까.


국가주의라는 점에서도 미국과 일본은 닮은 구석이 많다. 한때 제국이었고 다시 제국이 되고 싶어 하는 일본과, 그런 일본을 응원하고 이용하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제국인 미국. 그리고 새로운 제국으로 떠오르는 중국. 그 틈바구니에 낀 한반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법은 통일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린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룬다고 해도 우리는 제국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온순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좋다. 그리고 벌써 그립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0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