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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야만 하는 이유 (서상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40
조회
504

미즈 최순실 : 기억을 위한 투쟁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 미스 리플리, 미즈 최순실


몇 년 전 한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한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아! 그…’ 할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한참이나 철 지난 드라마가 떠오른 건 최순실이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세상’에는 없던 사람으로 인해서다.


호텔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우연한 거짓말 한 마디로 신데렐라도 부러워할 성공가도를 달려가게 된다. 그나마 드라마라고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은 여주인공이 돈도, 학벌이나 변변한 뒷배도 없는, 요즘 말로 ‘흙수저’인데다 운까지 없어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찍소리 못하고 꾹꾹 참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낯익은 우리 이웃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던 건, 거짓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파국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드라마로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이 바라는 머릿속 세상을 진짜로 믿고, 자신이 놓인 현실을 부정하며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병리 현상을 말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신분 상승 욕구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다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살게 되는 인격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자신이 한 거짓말마저 사실로 믿기 때문에 스스로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이란 미로에 갇혀 서서히 인간성을 상실해가다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제 우리는 우리 눈앞에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이 체험이 너무도 부조리해 현실인지 상상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가늠하기 힘든 현실 앞에 ‘분노’마저 저만치 떠내려가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억’만큼은 결코 어처구니없는 현실과 함께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20161108web01.jpg사진 출처 - 필자


- 기억을 위한 투쟁


사람은 고통스런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이 부정적인 기억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인 외상을 최소화하려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사람뿐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걸 보면 자연에서도 오랜 연원을 가진 기제임이 분명한 듯하다.


기억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생존을 위해 체득된 경험을 유지, 저장, 재생하기 위한 인간의 능력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살아남기 위해 학습과 정보의 재생을 수행하고, 관련된 정보 조각을 서로 연결시키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억력이 좋을수록 생존력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기제가 발동한다는 것은 그 기억이 오히려 개체의 생존에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참담한 일제 강점기에 이어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망각을 생존비법으로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 땅의 민중들에게 ‘기억하기’는 또 다른 아픔으로 인식돼 왔다. 그런 시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끝나지 않은 친일 청산 문제가 그렇고 위안부 문제, 민간인 학살, 제주 4·3항쟁, 군사독재와 정치공작…,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런 기억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왜인가. 당장은 아프지만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새살이 돋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과의 싸움 속에서 이제 그만 내려놓자고, 잊자고 하는 이들 대부분은 그런 말을 꺼낼 자격도 없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 달여 새 우리 국민들의 기억에 상상도 못하던 블랙홀을 만들어놓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이름으로 불린 ‘아버지 박정희’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작업이 역사 국정교과서 발간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 돼버렸다. 이제는 '최순실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되게 됐으니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꼴이 됐다.


‘최태민’이라는 이름을 역사 속에서 근근이 지워갈 무렵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통령이라는 기억을 국민의 뇌리 속에 새겨놓게 생겼다. 과거의 대통령들이 어른들의 입에서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코흘리개 아이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기억과의 투쟁, 역사와의 투쟁에서 참패한 지도자로 각인될 것이 분명하다. 그를 추켜세우던 이들도 마찬가지다.


- 싸워야만 하는 이유


하지만 역사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기억하지 않을 때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다카키 마사오’에 대한 기억을 잃은 세대로 인해 그의 망령이 되살아나 오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억은 애초부터 없다. 개인의 과거 기억 또한 최소한 ‘부모’ ‘형제’ ‘가족’ ‘친구’ 등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개인의 기억은 파편화되어 있고, 불완전하고, 독립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집단을 통해서 혹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기억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이를 새롭게 인식하며 되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개인의 기억 또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집단 기억’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우리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던 세월호 참사의 아픔부터 멀리 6.25전쟁의 고통까지 오늘 나의 것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이 ‘집단 기억’ 때문에 가능하다.


20161108web02.jpg사진 출처 - 필자


우리 세대는 ‘최순실 게이트’를 분출하는 ‘광장’의 기억으로 승화시켜가는 중이다. ‘서울광장’ ‘광화문광장’은 그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집단 기억’이 켜켜이 쌓이고 역사로 열매 맺어가고 있는 장이다.


이 광장의 기억을 놓칠 때, 함께 기억하지 못하고 비켜설 때 ‘최순실 게이트’와 같은 부조리는 미래 어느 날 또 어떤 비극으로 닥칠지 모른다.


이것이 광장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 기억과의 싸움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이 글은 2016년 11월 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