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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가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38
조회
454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고전적 작품, 고대의 신화, 세계 곳곳의 인류학적 자료들을 분석하면서, 모방이 인간 행위의 동력이자 문명의 근간이라는 사실을 상세하게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인간은 ‘모방하는 인간’(호모 미메티쿠스)이다.


모방의 근간은 타인과 같아지거나 그 이상이 되려는 욕망이다. 욕망은 배고픈 이가 음식을 갈망하거나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식의 좁은 의미의 욕구와 다르다. 그보다는 과히 배고프지 않은데도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어떤 ‘모델’(매개자)을 보면서, 그 식당에 가고 싶다거나 실제로 찾아가도록 하는 동력에 가깝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주체적 감정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서, 그 누군가로부터 빌려온 감정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의 감정에 의존해 고양시키려 한다.


늘씬하고 훤칠한 광고 모델의 욕망을 통해서 그 모델 너머의 성을 욕망하고, 그 모델이 소유한 상품을 욕망하는 경우가 그 사례다. 자본을 향한 어떤 이의 욕망을 모방적으로 욕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려는 시도가 자본주의를 낳고 키우는 것도 비슷하다. 인간은 그저 물질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사용자를 상상하며 그가 누릴 것이라고 암시되는 내용에 종속된다.


권력도 모방 욕망의 집결지다. 인간은 더 큰 권력자를 매개로 그 이상의 권력을 모방적으로 추구한다. 그 과정에 너를 모방하며 넘어서려는 권력욕들이 서로 충돌하지만, 그 충돌로 인한 희생과 아픔은 안중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마치 사물처럼 간주하면서, 자신의 권력욕에 걸림돌이 되거나 그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배제해나간다.


지라르에 의하면, 이렇게 다양한 여러 모방 욕망들이 중층적으로 얽히면서 집단 구성원 서로가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는 복잡한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그러다가 걸림돌이 집단화돼 전체의 문제가 되면, 집단적 걸림돌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희생양’을 만든다. 희생물로는 복수할 수 없는 주변적 존재가 선택된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거나 주변적인 인물들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변인 혹은 경계인은 주류에서 밀려나 있기에 복수할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른바 ‘희생양 시스템’이다.


오늘날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은 국가의 역할, 더 정확하게는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권력의 역할이다. 권력은 사회적 무질서를 경계한다. 설령 일부 국민을 희생시키더라도 중심질서가 잡히기를 바란다. 그런 뒤 자신의 능력 탓이라며 자신의 확대를 시도한다. 이것이 모방적 권력욕의 한결같은 태도다.


가령 ‘세월호 사건’으로 사회가 흉흉해지면 권력자는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국가화하려 시도한다. 수백 명이 죽은 고통스런 사건을 국가의 위기로 몰아가고, 희생자를 추상화해 희생을 국가가 기억하겠다고 한다. 개인과 가족의 고통은 가능한 희석시킨다. 백남기 농민의 희생을 기억하고 관리할 최종적 책임도 국가에 있는냥 호도한다.


하지만 이 때의 국가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서류가 오가고 전화를 주고받지만, 그 속에 아픔에 대한 공감은 없다. 아픔을 추상화시키고 행정화하다보니, 아픔에 대한 기억의 주체도 사실상 없다. 그 비인간성이 들통 나 저항 세력이 형성되면, 권력은 다시 이들을 희생시키려 한다. 더 많이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을 지키는 길에 나선다. 개인의 기억은 주변화하고 국가의 기억을 전면에 내세운다. 기억의 중심화, 국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 혼란이 증폭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개인에게 지우면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한 듯 말한다. 이것이 권력욕의 자기 유지 방식이다.


그러다 혼란이 가라앉을 즈음 되면 이들의 희생 때문에 국가가 든든해질 수 있었다며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벗어나는 개인의 기억들은 가능한 제한한다. 기억의 최종적 주체는 국가라며 기억의 국가화를 지속한다. 그 과정에 희생자를 낳은 폭력은, 지라르의 표현마따나, 집단을 유지시켜주는 ‘성스러운 폭력’으로 ‘성화’된다. ‘성스러운 폭력’은 기억의 집단화를 통해 중심 질서를 잡아가려는 권력의 유력한 자기 유지 장치다.


132881_181121_1610.jpg사진 출처 - jtbc


권력은 자기중심적이다. 국민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유지를 도모할 만큼 냉혹하다. 이 속성에 철저할수록 폭력적 구조를 남의 탓, 심지어 국민의 탓으로 돌린다. 그 탓을 찾는다며 다시 희생자를 만든다. 그렇게 증폭되는 희생의 크기가 권력의 자기중심성을 능가할 때까지 권력은 자기중심성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픔을 기억하는 세력이 아픔을 지우려는 세력보다 커질 때가 온다. 권력의 변화 혹은 교체기다. 권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져 자기 교체의 길로 들어선다. 새로 구성된 권력도 더 큰 권력에 대한 모방 욕망에 휘둘려 같은 길을 가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순환 고리가 끊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가 아픔을 겪고 있다면 그 때가 권력의 교체기다. 그 때 자의로 물러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권력욕의 속성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도 교체기를 향한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2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