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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을 통이지지(痛而知之)하다 (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26
조회
49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제로 1학기 수업이 모두 끝났다. 물론 성적 산출 작업이 남아 있으니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강의는 끝난 셈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학기 강의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강의할 때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 했다. 수시로 밭은 기침이 나오는 통에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 못하고, 뚝뚝 끊겼다.


기침이 잦아지면서, 이제 내 몸은 자연적 유기체가 아니라 인위적 조절을 필요로 하는 육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슬쩍 겁도 나서 어느 봄날 의사 선생님의 처방을 구했다. 혈연, 지연, 학연보다도 강하고 질기다는 흡연의 끈을 속히, 싹둑 잘라내라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다. 나는 경고를 권고쯤으로 여겼다가 학기말까지 혼쭐이 났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지만, 한때 흡연이 생각과 행동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일깨워준다고 치부(置簿)한 적도 있었다. ‘흡연은 몸에 해롭다. 그러니 금연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연을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알기만 하면 곧바로 실행할 거라는 믿음의 허구성을 직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각성제라고 생각했다. 몸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흡연하는 것을, 마치 앎(을 실어 나르는 말(言))의 힘의 한계를 환기시켜주는 일상적 의례처럼 여겼던 것이다.


내 기억이 유효하다면, 갈릴레이(1564~1642)는, 진리를 합리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창조한 우주 원리를 밝혀서 신의 영예를 드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면 교황과 성직자들도 진실(지동설)을 받아들일 거라는 낙관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불경죄’를 범했다고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을 다룬 글을 읽었을 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그가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는지 여부보다도 그의 낙관적 믿음이었다. 옳다는 것이 밝혀지기만 하면 누구나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정당할지라도 너무 안일해 보였다. 역사는 보험회사가 아니어서, 옳다는 사실이 합리적으로 증명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保障)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주장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의 사례야말로 그 증거인 셈이다. 심지어 옳다고 판명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다수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기는 법도 없다. 최인훈은 분단 극복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런 냉철한 인식을 선보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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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pixabay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다수파라고 해서 반드시 이기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싸움의 역사를 보면 다수파가 지는 수가 빈번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라의 통일이 학교에서 치는 공정한 시험도 아니고, 누가 맡아주는 공명선거도 아닌 바에는 이 다수라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아무 믿을 것이 못되고, 다수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역사란 수학문제가 아닙니다. 머리만 좋아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풀리면 밑지는 사람들이 방해하기도 하는-그런 것이 보통인 그런 현상입니다.”(「상황의 원점」, 『바다의 편지』(삼인), 329쪽, 333쪽)


진리 자체에 뜨거운 힘이 있다는 생각을 과신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밀(J. S. Mill 1806~1873)의 『자유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진리만이 지하 감옥과 화형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순진한 착각”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진리를 향한 인간의 열정이 거짓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뜨겁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진리는 언제나 박해를 이겨내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믿음의 사례로 흔히 거론되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박해를 이겨냈다는 사실은, 실제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간헐적으로만, 그것도 짧은 기간 동안에 가해졌고, 박해와 박해 사이의 긴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교 신자는 거의 아무런 박해를 받지 않고 선교활동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론』(책세상) 64~65쪽)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진실이 밝혀지면 거짓은 저절로 사라질 거라는 낙관적 믿음을 경계하려고 했던 시절에, 나는 말의 힘, 나아가서는 앎의 효용에 대해 일종의 회의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고와 행동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의 중요성은 통감(痛感)하지 못한 채, ‘알기만 하면 된다!’는 주문(呪文)만 읊조려서는 안 된다는 자경(自警)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학기 내내 ‘할 수 있는 말’은 고사하고 ‘해야 할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고통을 겪어보니, 말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새롭게(누구에겐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가 적지 않다. 성찰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적 소회는 다 접어두고, 다만 말의 힘을 절감했다는 것만큼은 전언하고 싶다.


‘말은 길이요 생명’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임을 통이지지(痛而知之)하고 나니, 말은 그저 무엇을 지시하거나 인지하는 수단이 아니더라. 말에는 지시적 기능이나 인지적 기능 이외에 수행적(performative) 기능도 있더라. 요컨대, 말은 행동의 요소다. 말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나’의 이해는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나’의 전망을 규정한다. 말에는 ‘수행적 위력’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큰 힘이 있다. 그러니, 말 같지도 않은 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는 이 어이없는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여하튼 해야 할 말은 제대로 하고 살아야 한다. 아니, 할 말을 바로 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다, 사람답게! 담배도 끊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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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혹시 궁금해 할 분이 있을지도 몰라 첨언한다.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대담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떤 이론이 이성과 경험에 일치하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견해와 모순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이면우, 『천문학 탐구자들』(살림), 52쪽에서 재인용)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