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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단상 (장경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18
조회
585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주말 홋카이도의 삿포로시를 다녀왔다. 관광명소로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삿포로는 1972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눈의 도시로 유명하다. 홋카이도는 일본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어 노역에 시달리다 숨져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다 최근 유골을 발굴하여 그리운 고국으로 봉환되기도 한 식민시대의 한이 깃든 곳으로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이번 삿포로 2박 3일의 일정은 매우 빡빡하였다. 삿포로 시내를 오전 나절 돌아본 것 외에는 관광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배 변호사와 함께 국가보안법 사건 피고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증거 수집을 하는 일정이 있었다.

증거 수집을 해야 하는 대상은 자녀들 모두 조선학교 출신이고, 국적을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바꾼 대한민국 국민이고, 조총련 분회장의 신분을 가지고 지하철 역 입구에서 타코야키(밀가루 반죽 속에 잘게 썬 문어를 넣어 동그랗게 구워 파는 간식거리) 장사를 하는 분이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우리의 변호를 받는 피고인의 소위 상부선이라는 분이다. 그의 큰아들은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다. 그는 자녀 네 명을 모두 ‘우리학교’에 보내기 위해 타코야키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우리학교’는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오는 홋카이도에 위치한 학교이다. 막내아들은 그 영화에 등장한다고 했다.

우리의 변호를 받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피고인은 20대 후반, 일본 어학연수 및 유학 시절에 이 타코야키 장수에게 타코야키를 사먹다가 우리말로 대화하며 같은 동포로서 친해지게 되었다. 이후 그와 가족과 같은 사이로 친밀하게 교류하였다는 이유로 현재 대전 교도소에서 1심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계류 중이다.

우리의 의뢰인은 그의 큰아들이 고려대학교 유학 중이었던 2001년, 30년째 타코야키 장사를 하는 그곳, 지하철 입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일본어 어학연수원 기숙사에서 지내며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의뢰인은 타코야키를 자주 사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유학 온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게 되었고, 타코야키 장사를 하는 그는 한국에 유학 가있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분단이 강요하는 의구심과 경계심을 풀고 술친구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경계심을 허문 그들의 관계가 지금 국가보안법 위반 지령 수수의 관계로 둔갑하게 되었다.

포섭의 과정이 가관이다. 공소장이 그리는 포섭의 과정은 피고인이 그의 집에서 ‘불가사리’라는 북한영화를 본 사상학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불가사리’는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불가사리’라는 쇠를 먹고 자라는 죽지 않는 괴물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이것으로 사상학습을 받고 포섭되었다는 공소장과 1심 유죄 판결은 북한 어린이용 SF 괴기영화 ‘불가사리’보다 더 괴기스럽다. 시대착오적 국가보안법의 불가사의한 공포 괴담은 이렇게 북한영화 ‘불가사리’를 북한체제 찬양영화로 불온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수사기관은 피고인이 한국 친구들을 데리고 그의 집에 머물며 삿포로 여행을 한 것을, 피고인이 그에게 포섭되어 상부선인 그의 지시를 받고 삿포로 관광을 빙자하여 사상교육을 통해 포섭하려 한 ‘유인’행위로 만들었다. 피고인과 친구들의 짧은 여행 동안 베푼 주인장의 호의는 친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제주 4. 3. 사건’의 영상물과 ‘아리랑 축전’의 영상을 보도록 강요한 것으로 되었다. 제주 평화공원에서 국가적으로 추모하는 제주 4.3학살의 진실은 사상학습 도구로 단죄되었고 한국인들도 평양에서 관람이 허용되었던 ‘아리랑 축전’의 영상은 경계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낡고 허름하며 비좁은 그의 집 거실. 그와 부인, 둘째 아들이 함께 있는 가운데 타코야키 재료를 써는 문어칼을 든 그가 사상학습 강요에 반기를 드는 피고인의 친구를 위협하면서 김일성, 김정일 사진 앞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한 무대로 날조되었다. 한국의 수사기관이 어디까지 허위진술을 조작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모를 지경이다.

피고인은 불구속 수사과정에서 고등학교 선배라는 수사관의 회유와 구속에 대한 두려움으로 총련 동포인 그와 친하게 지낸 것도 ‘죄 아닌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구속을 피하고자 수사관의 유도신문에 허위자백을 하는 ‘우’를 범하였다. 피고인은 불구속 상태에서 오랜 시간 조사를 받으며 구속될 줄 모르고 허위자백을 했다가 구속이 되고 나서 자신의 누명을 벗고자 우리 변호인을 찾아 결백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집에는 북한 지도자의 초상화 사진이 없다. 7080년대의 이야기다. 오히려 거실 벽에는 정다운 가족들의 갖가지 사진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고 홋카이도 우리학교를 방문한 배우 감우성 씨와 그 그리고 그의 딸이 함께 운동장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배우 권해효 씨가 홋카이도 우리학교 행사에서 발언하는 사진도 있었다.

그에게는 홋카이도에 강제노역 된 조선인들의 유해발굴을 위해 앞장서는 일본인 친구가 있다.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학살을 기록한 그 일본인 친구의 책도 ‘유인’ 행위의 불순한 행동으로 조작되었다. 피고인의 허위자백에는 그 일본인 친구까지도 조총련 사람으로 진술되어 있다.

피고인의 허위자백은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을 2013년도에 그에게 보고한 것으로까지 되어 있다. 공소장은 그가 남한 정보를 마치 피고인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의 집에서는 1998년부터 유료로 위성TV가 설치되어 한국의 뉴스나 드라마를 생방송으로 시청할 수 있었다. 일본인인 그의 부인은 지금 한국 드라마 ‘열성 팬’이다. 그의 집 거실에는 피고인이 가져다준 대한민국 국기가 있었다. 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피고인과 함께 한국을 열렬히 응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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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


피고인과 그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 수사기관은 오랜 내사기간 동안 피고인과 그의 일본 및 국내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신감청과 미행촬영으로 밀착 수사하였다. 일본에서는 일본공안당국과의 공조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미행 촬영을 하였음이 틀림없다. 그것을 수사기록에 버젓이 첨부하여 유죄의 증거로 제출하였다. 일본에서 빚어진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납치공작과 진배없는 파렴치한 나쁜 짓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통신감청하였음에도 감청 내용 중에 문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사건에서 증거는 오로지 허위자백과 삿포로 여행에서 그를 만났던 친구들의 짜 맞춰진 허위진술뿐이다. 그의 집에서 구독하는 ‘조선신보’를 한국에 가져와 주변에 소개한 것도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 소지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자처하는 우리 사회.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북과 관련된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해외에 있는 북한 식당에 가도 되는가, 안되는가? 북한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밥을 먹는 것은 되는가? 그곳 종업원들은 북한 공작원인가, 아닌가? 일본에서 유학 온 총련 사람과 반대로 일본에 유학을 가서 총련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가능한가? 총련 사람은 공작원인가, 아닌가? 총련동포들이 다니는 조선학교에 우리는 국정원의 미행감시 두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들어가 구경하고 이야기하고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 사전 사후 신고를 해야 가능한가? 7080년대 일본에서 총련 사람들과 교류하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간첩조작 된 수많은 사람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는 와중에 우리는 아직까지 그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증거수집의 대상이 된 그가 총련 동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삿포로 방문길을 주저하였다. 2박 3일의 짧은 삿포로 방문 길에도 가족들의 염려와 걱정 속에 한국을 떠났고 삿포로에서 귀국하자 가족들은 비로소 안도하였다. 삿포로에 도착하여 그를 만나기 전부터 공포와 경계심으로 숨죽이며 그를 만났다. 그를 만나 사건에 대한 문답서를 받으며 경계심을 허물 수 있었다. 사상교육의 진원지가 된 그의 집을 방문하여 단란한 가족들의 일상을 보면서 분단의 비극과 공포가 깊이 드리운 한민족의 현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지하철역 앞에 차량을 세우고 차량 안에서 타코야키를 열심히 팔고 살아가는 30년 타코야키 장사 이력의 그. 그의 치열한 생업을 보며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져 감동하였다. 그는 피고인의 억울한 누명을 풀기 위해 체포를 각오하고 한국의 법정에 설 것인가. 체포가 되면 타코야키 노점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가족들이 생계 곤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는 지금도 선택을 고민 중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