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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고는 못 볼 꼴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15
조회
497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신과 전문의 대부분이 절대로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는 푸닥거리를 꼭 해야 한다고 홀리는 자가 있다면 선무당이거나 사이비 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선무당이나 사이비 의사는 십중팔구 사람을 잡는다.


역사학 분야의 전문가들 대다수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국정화'를 곧 죽어도 해야 한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면, 모리배이거나 얼치기 어용일 개연성이 크다. 모리배나 얼치기 어용은 십중팔구 사회를 망친다.


잡기는 쉬울 지라도 살리기는 어려운 게 사람 생명이듯이, 무너뜨리긴 쉬울 수 있어도 다시 세우긴 힘든 게 사회 윤리요 정의다. 그럼에도 '정치 선무당과 모리배'들은 남들이 죽건 말건, 세상이야 어찌되건, 역사가 퇴행하건 말건, 제 잇속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투로 극성스럽게 패악을 떤다.


“함께 모인 사람들을 갈라놓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분열의 씨가 뿌려질 수 있다면, 또한 권리나 이해의 대립을 통해 상호 불신과 증오를 불어넣어 여러 계급을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조장하는 통치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제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분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공화국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전제 군주제가 입을 열자마자 고려해야 할 올바름이나 의무는 이미 사라지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주경복, 고봉만 옮김, 책세상)의 끝자락에 나오는 언설이다. 앙시앵레짐의 폐단과 통치 집단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루소의 이런 언술에서 1756년 프랑스만이 아니라 2016년 지금 여기의 현실을 본다. 오호(嗚呼) 통재(痛哉)라! 오호 애재(哀哉)라!


아니, 혹세무민의 모리배들을 놓고 굳이 18세기 프랑스를 떠올릴 필요도 없겠다. 구한말, 이 땅의 언필칭 ‘통치계급’의 시나리오를 떠올려볼 수도 있으므로. "실정과 졸정 그리고 폭정과 악정을 거듭한 끝에, 밑으로부터 오는 심판을 두려워한 나머지, 본인들의 파멸을 면하기 위해서 차라리 나라를 파멸시켜 버린다는 시나리오"를(최인훈, 『바다의 편지』).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는 이유의 일단은 이런 “두려움”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라고 시나리오를 써보자). 권력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은 다를 수 있다는 것, 집권층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역사에서 배운 시민들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국가의 헌법마저 훼손한 '지배세력'을 심판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렇다! 앉으나 서나 뭐든지 '남 탓'만 하는 정치권력은 역사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서…>,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팔아서…>, <청년들 눈이 높아서…>, <여성이 출산을 기피해서…>, <노동자 임금이 높아서…>, <교사와 교수들이 좌파여서…>, <학생들이 물들어서…>, <농민이 시위를 해서…> 따위의 생각밖에 못하는 소아병적 집단이라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역사(교육)을 두려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111122000261_1.jpg사진 출처 - 헤럴드경제


“너희는 '나라의 하인'일 뿐이다. 소수에 불과한 너희들 잇속 두둑하게 챙기자고, 닥치는 대로 매도하고 내동댕이친 다수의 시민-부모-청년-여성-학생-노동자-교사-학자-농민이야말로 국가의 주인(주권재민!)이로다!”라고 읊조리는 역사 가라사대를 지배집단이야 좋아할 턱이 있겠는가?


자신이 잘나서 지배자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하인(=국가의 공복)이고, 종 부리듯 막 대한 국민이 진짜 주인이라고 언술하고 떠들어대는 역사라니, '이런 젠장,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라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제에 진짜 주인을 물리고 주구장창 주인해 볼 욕심으로 '역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고 쓰고, '내 맘대로 뜯어고치기'라고 읽는다)를 획책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저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투철한 국가관이 부족하기에 헌법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주인을 기만하고 주인의 생각에 반하는 짓을 하려는 하극상을 벌이는 것이니 국민적 동의를 얻기도 어렵다. 전문 역사가 집단을 무더기로 매도하고 능멸했으니 역사(학)의 지원을 받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람 잡고 세상 망치고 역사를 뒤집으려는 망발을 멈추지 않는다면, 주인들이 줏대 있게 나서서 미쳐도 곱게 미쳐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수밖에는 없지 싶다. 어설픈 ‘종북’ 타령하지 말고 주어진 ‘종복’ 노릇이나 잘 하라고 지도(指導)해줘야 한다. 그리 안 하면 '역사의 멍석말이'를 당하는 법이라고 힘차게 편달(鞭撻)해줘야 한다. 눈 뜨고 못 볼 꼴을 다시 보지 않으려면!


루소는 앞서 인용한 구절에 이어서 주인노릇하려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응원한다. “오직 힘만이 지탱하고 있었던 전제군주를 타도하는 것도 힘뿐이다. 모든 일은 이와 같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거의 40년 전에 쓰인 에세이이지만 최인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주객전도의 목불인견(目不忍見)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힘과 슬기를 얻을 수 있다. “*나쁜 과거를 숨기려는 자는 미래를 숨기려는 의도에서다. 그는 반드시 재범한다. *역사란 미래의 희망이다. *바쁜 사람은 역사를 읽을 틈이 없다. 역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다만 그가 나쁜 역사를 만들고 있을 때가 문제다. *그런 경우에는 그가 죽든지 그를 죽이든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감정이 흐르는 하상」, 『바다의 편지』)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3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