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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촛불과 단두대 사이에서 서성이다(오항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5-02 15:56
조회
1228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 지난 칼럼에서 강사법 시행과 관련된 대학의 졸렬한 수작을 지적하며 급한 대로 교수들이 급여를 조금만 깎아 부족한 예산을 메워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국외에 있어 자세한 대학 사정은 모른다. 전주대학교 교수회에는 교수의 연봉 삭감을 비롯한 대학의 포용 정책을 공론화하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전주대학교는 정말 일 년에 10억 원이 없어서 강사들을 내쳐야만 하는 대학입니까?”로 시작한 글은, “우리 민족에게는 ‘좀도리’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습니다. 급여에서 5만원, 혹은 10만원이 덜하더라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고 여기실 수 있다면, 우리 전임교수들이 ‘좀도리’ 운동을 벌이는 것은 어떨까요?”라고 제안하고,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어 안정된 환경에서 강의에 전심을 기울여줄 강사들과 함께 전주대학교의 교육을 우리나라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립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미래에 대한 준비가 될 것”이라고 끝맺었다. 글의 분량과 내용은 더 깊고 많다.


1.
 사람이든 세상이든 바뀌는 형식에는 배움(교육)과 혁명(또는 그 짝인 반동)이 있는 듯하다. 당연히 두 형식이 배타적이지는 않다. 교육과 혁명이라는 두 가지 형식이 구현되는 방법에는 다시 크게 네 가지 트랙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변하는 것이다. 거룩한 일이지만 드물게 나타난다.
 둘째,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어 방향을 잡는 경우이다. 현명한 처사이다.
 셋째, 의견을 달리하는 개인(집단)이 고집을 부리면서 버티다가 제3자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여전히 갈등은 남는다.
 넷째, 입장이 다른 상대를 제거해 버린다. 피를 본다.
 대개 배움은 네 가지 트랙에서 앞쪽을, 혁명은 뒤쪽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트랙은 현실에서 뒤섞여 나타난다.


1.
 나는 2017년 2월 11일을 토요일 광화문을 기억한다. 날씨가 유래 없이 추우리라는 예보에 집회 참가자가 줄어들지 모른다는 걱정에 우리라도 가야한다고 아내와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매서운 바람이 귀를 때리던 그 추운 날씨에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심전심, 다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이 날짜만 기억나는 것은 내가 중국 여행으로 얻은 동상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동상에 걸린 나에게는 추위가 남다른 공포로 다가온다. 장갑으로도 안 되어, 유자차를 사서 그 온기로 손을 녹였으나 이 역시 잠시 뿐이었다. 동상 걸린 손은 추위에 노출되면 기분 나쁘게 얼얼하고 아프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이렇게 촛불의 역사는 내 몸에 기록되었다.


1.
 그 무렵 나는 빅토르 위고에 빠져있었다. 《레미제라블》(민음사, 정기수 옮김)을 읽으면서 빠리의 하수구와 워터루 전투를 근 150쪽에 걸쳐서 묘사했던 위고의 고증을 비롯한 구성, 이야기에 흥분하였다. 나는 “살아생전에 이 책을 읽은 게 다행”이라며 《레미제라블》의 전도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입이 마르게 추천하였고 친구들과 세미나를 했다.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은 빅토르 위고의 《93년》(열린책들, 이경식 옮김)을 선물로 주었다.



영화 "레미제라블"
사진 출처 - 씨네21


1.
 프랑스 시민들이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체제의 목을 쳤다면, 이 땅의 시민들은 촛불로 박근혜-체제를 권좌에서 쫓아냈다. 그런 까닭에 세계사에 유례없는 평화혁명으로 언급된다. 프랑스혁명과 촛불혁명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후세에 촛불혁명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다. 촛불혁명이 진행 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만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후일 남북의 평화가 정착되어 적대적 체제를 공존, 공영의 체제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면 촛불대혁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프랑스혁명에 비길 수 없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뀐 말 그대로 ‘대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촛불혁명이 위대한 경험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나는 그 평화로움이 석연치 않았다. 나는 시민이 절대군주의 목을 친 프랑스혁명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조선이 망할 때도 백성의 힘으로 임금 목을 칠 기회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고, 4·19혁명 때도 못했다. 독재 말기에 부하의 손에 죽은 박정희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광주시민을 학살했던 전두환은 잠시 가두었다가 풀어주지 않았는가?


1.
 다행히 내 석연치 않음은 두 가지 점에서 무의미하다. 첫째, 혁명의 과정이나 결과는 기획되지 않는다. 혁명은 그 사회의 구조나 조건, 숱한 인간들의 욕망, 그것이 빚어내는 우연이 맞부딪힌 결과이다. 그러므로 프랑스혁명, 4.19, 10.26, 촛불혁명을 놓고 아쉬워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하다.
 둘째, 혁명이 가지고 있는 격렬성과 그에 따른 희생에 대한 역사의 기억을 반추할 때 아무려면 평화로운 것이 천 번 백 번 바람직하다. 혁명은 닥터 지바고를 만들고, 반동은 아이들에게도 총을 겨누는 법이다. 유모차 위로 최루탄이 터지지 못하는 광화문이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평화는 그 자체로 선(善)이다.


1.
 “그러게요! 그래도 한 때 임금이었던 사람이잖아요!”
 제주에서 있었던 ‘광해군(光海君)’을 주제로 한 토론 때 사회자가 한 말이었다. 민생과 나라재정을 파탄 내다가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20여 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누군가가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어 사람들이 그가 광해군인지도 몰랐다.”라고 하자, 그에 대한 반응이었다. 사회자는 좀 생각이 있다고 알려진 배우였기에, 그의 말은 참 의외였다. 한 때 임금이었으니 어쩌라는 말인가?
 내가 그 사회자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되었다. 지난 4월 강화에 있는 소규모 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마리 앙뜨와네트’(1938년 작)를 보았다.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자라 프랑스로 시집와서 살던 귀하고 고운 여자. 이 여자가 혁명으로 갇히어 폭력적인 군중에게 위협당하고, 탈출하려다 잡혔을 때, 내 마음 속에 안쓰러움이 싹트기 시작했다. 역시 할리우드 영화는 교활하다. 2시간 만에 나를 세뇌시키다니. 아니지, 내가 2시간 만에 넘어가다니!


1.
 역사적 조건을 빼고 촛불과 단두대의 의의를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아직 혁명이 끝나지 않았을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내놓는 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또 나는 그걸 논할 능력도 시간도 없다. 다만 2년 전 겨울에 느꼈던 찝찝함을 명료하게 해주었던 다음 대화를 함께 상기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5백 년 전, 전국시대 제나라 선왕과 맹자(孟子)의 대화이다.


 제나라 선왕 :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내쫓고, 주나라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토벌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신하가 군주를 시해해도 됩니까?”
 맹자 : “사람들을 모질 게 만드는 것을 적(賊)이라 하고, 사회의 의로움을 해치는 것을 잔(殘)이라 합니다. 무자비한 도적은 임금이 아니라 무뢰배 하나일 뿐입니다. 나는 무뢰배인 주(紂) 하나를 베었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는 1789년부터 1792년까지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밖으로 탈출하려다 잡혀서 단두대로 간 것이다.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누군가가 취해야 할 현명한 처신은, 탈출을 기도하지 않아야 단두대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받을 건 받고 가야 역사가 평온하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연변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