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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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국진 / 인권연대 운영위원  북측에서 연달아 미사일을 쏘니 남측 국방부가 본때를 ‘살짝’ 보여주려고 내놓은 게 현무 미사일 발사였다. 하지만 현무 미사일은 뒤로 날아가 버렸다. ‘빽도’를 한 것도 동네 창피한데 하필 파편이 민가 근처에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북측이 쏜 탄도미사일은 4500km를 날아가 태평양에 떨어졌다.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다. 그게 끝일까. 사진 출처 - 한국경제  ‘현무-2C’ 낙탄 사고가 발생한 건 4일 밤이었다. 당시 현무 발사를 하느라 강원도 강릉시 제18전투비행단에선 강한 불꽃과 소음, 섬광이 발생했다. 강릉 시민들로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현무 낙탄 사고로 화재까지 발생해 불길이 치솟았다. 소방서나 시청에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119상황실에는 4일 밤 11시쯤부터 ‘비행장에서 폭탄 소리가 난다’, ‘비행기가 추락한 것 같다’ 같은 신고가 접수되기 시작했다. 강릉 시민들은 밤새 공포에 떨어야 했다.  군에서는 당초 예정했던 ‘오전 7시 엠바고(보도 유예)’를 이유로 7시까지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혼란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강릉시가 지역구인 국민의힘 의원 권성동까지 나서서 페이스북에 “재난 문자 하나 없이 무작정 엠바고를 취한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며 군의 경직된 태도를 꼬집었을까. 군에서는 나중에야 “사전에 주민 통보나 안전 점검 등을 철저하게 했지만 실시간대 우발 상황에 대해 주민들이 이렇게 많이 놀라고 불안해한 점은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사과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12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현장을 찾았다. 동행취재했다. 합동참모본부에선 당초 “영내 골프장 페어웨이에 떨어졌다”고 했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분명 탄두는 골프장에 떨어진 게 맞다. 하지만 추진체 파편은 공군기지 유류저장시설로 떨어졌다. 파편이 떨어졌던 영향으로 유류저장탱크로 올라가는 계단 철제 난간은 산산조각나 있었고, 파편 흔적 바로 옆에는 유류 주입구와 송유관, 폐드럼통 보관 창고, 가스 배출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합참에 따르면 탄두는 발사지점에서 후방 1㎞, 미사일 추진체는 여기서 400m가량 더 후방에 떨어졌다. 탄두가 발견된 곳에서 남쪽으로 약 700m 지점에 민가가 있었다. 당시 민간인 피해 우려 얘기가 많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살펴본 사고 위험성은 민간인 피해보다도 오히려 기지 내부 유류저장시설이 훨씬 더 심각했던 셈이다. 현장에서 만난 공군 관계자조차 “천운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민주당 의원들을 안내한 공군 장성은 “현무가 뒤로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면서 “전속력으로 뛰어서 1분 30초 만에 유류저장시설로 달려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군은 비밀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해한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면 비공개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네이버와 다음 지도를 통해 현무 낙탄 현장을 살펴보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제18전투비행단 구역 전체가 거대한 빈 칸이다. 위성사진으로 살펴보면 커다란 숲 모양으로 덮어 버렸다. 군사기밀이니까 그렇단다. 부대 영내에 있는 골프장도 군사기밀인가? 골프장 모습을 위성사진으로 확인하면 적화통일될 위험성이라도 있나?  미국이 영국과 호주 등 일부 동맹국들과 함께 전세계를 감청하는 '애셜론' 프로젝트를 운영중이라고 해서 큰 논란이 됐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좀 시끄럽다 잊혀진 적이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감청기지 이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구글어스로 해당 기지를 검색해봤다. 호주 한가운데 사막지역에 있는 기지가 보인다. 위성안테나와 건물까지 어찌나 세세하게 확인할 수 있는지 비밀기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어떤 면에선 그래서 더 무서웠다.  몇 달 전만 해도 네이버와 다음 지도에선 청와대 구역이 거대한 빈터같았다. 이제 청와대에 어떤 건물이 있고 길이 어떻게 있는지 모두가 확인할 수 있다. 용산 국방부와 주한미군지역은 여전히 거대한 빈공간이다. 하지만 알려고 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구글지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서비스하는 위성사진은 차고도 넘친다. 실제 찾아서 위치를 확인해보면 겨우 이것때문에 숨겼나 우습기만 하다. 게다가 윤석열 사는 집을 빈공간으로 남겨놓지 않은 걸 보면 일관성도 없다. 모든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 홈페이지에는 조직도는 물론이고 각 부서 관계자들 이름을 공개한다. 이름은 물론 맡은 업무와 사무실 전화번호도 확인할 수 있다. 국방부는 그렇지 않다. 국방부 홈페이지에선 이름을 찾을 길 없다. 장관과 차관을 빼고는 누가 누구인지 모르도록 해놨다. 그렇다고 해서 알 길이 없는 것도 아니다. 관보도 있고 신문을 조금만 뒤져보면 인사 관련 정보를 얻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군사보안으로서 효과는 없이 그저 어제 했으니까 오늘도 한다는 편의주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물어보고 싶다. “이런 거 숨겨놓으면 재미있나요?”   강국진 위원은 현재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26 | hrights | 조회: 397 | 추천: 8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리사회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식의 풍조가 강하다. 흑백의 논리구조에 익숙하다. 개인 간이든 집단 간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내로남불 사회’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내로남불’이 습벽이 된 우리사회에서 동일한 잣대의 적용이 없다. 보편타당한 잣대가 아니라 이중, 삼중의 잣대로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에 익숙하다. 나와 내편에 대한 점검과 반성은 설 자리가 없다. 남과 다른 편의 잘못에 대한 비난이 난무하고 나와 내편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그 누구도 악으로 규정하기 십상이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자기편향을 극복하고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한 존중과 관용의 정신으로 이성과 논리에 기반한 대화와 협력으로 보편타당한 상식이 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내로남불’ 사회의 잘못된 풍조를 극복하는 길이다.  ‘내로남불’ 사회를 조장하고, 이를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장애물 중의 하나가 한반도 분단냉전체제이고 국가보안법이다. 분단냉전체제에서 비롯된 외세와의 군사동맹의 논리가 ‘내로남불’의 극치다. 이에 혹여 토를 달았다가는 적으로 간주되어 종북몰이를 당하거나 국가보안법의 위협과 처벌에 직면하게 된다.  외세가 남쪽 땅에 배치하였던 핵무기나 연합훈련을 위해 수시로 전개하는 핵 전략자산은 방어용이고 북의 핵무기나 미사일은 언제나 적화통일의 수단으로 치부되거나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도발로 간주된다. 한미동맹은 아무리 종속적이어도 북의 위협을 빌미로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된다. 그 누구든, 심지어 대통령이라도 감히 북 핵과 미사일의 자위적 성격을 입에 뻥끗했다가는 사회정치적으로 생매장을 당할 수 있다. 북보다 수백 수천 배 더 많은 핵(미사일) 실험과 핵 (미사일) 보유 및 핵(미사일) 전력을 동원한 군사훈련을 하는 나라가 동맹을 앞세워 76년째 주둔하는 현실이 합리화되고 정당화되고 있다.  급기야 을사늑약 이후 40년 동안 조선을 식민지배한 전범국가의 전범기를 앞세운 연합 군사훈련마저 불가피한 선택으로 용인될 지경에 이르렀다. 동족 악마화의 논리는 교전권과 전력보유를 금지하는 평화헌법을 부정하며 군국주의의 부활로 치닫는 일본과의 군사안보협력을 정당화하며 한미일 군사훈련의 상시적 전면화를 통해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치달을 기세다.  동족을 악마화하는 외세의 편에서 외세에 의존하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정당화의 궤변은 우리사회의 역사 왜곡과 현실 인식 결여 및 윤리의 실종을 초래하였다. ‘내로남불’의 억지 주장이 상식으로 둔갑되고 진실인 양 행세하며 온 사회를 뒤덮게 되었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논리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내로남불병’이다. 가히 치유 불능의 분단정신병이다.  ‘내로남불 분단정신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역발상이 필요하다. 한반도 분단냉전체제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인식에 대한 반성과 인식의 대전환만이 ‘내로남불’의 습벽을 고칠 수 있다. 역사를 바로 잡고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상식과 진리와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의 기만에서 벗어나 한반도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고 동족을 존중하며 화해하고 포용하는 한국사회로 거듭나야 우리민족이 상생 번영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친미사대 동족대결의 ‘내로남불 분단정신병’을 치유하기 위한 역발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철저한 점검과 반성이 필요하다. 거꾸로 하면 된다. 동족의 의견과 제안을 존중하고 수용하며 동족과 화해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외세의존에서 탈피해야 한다. 당장은 동족과 외세 사이에서 중립적 위치에서 공정한 중재자가 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동족을 반국가단체로 매도하며 동족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유사한 주장을 하여도 국민 모두를 처벌할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이다. 온 국민을 상대로 동족을 악마화하며 동족대결의 흑백논리를 강요하고 세뇌시킨다. 동족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비난하는 것만이 용인되는 흑백 논리의 압도적 힘 앞에서 이를 거부하고 저항하기가 매우 어렵다. 국가보안법은 ‘내로남불’의 역발상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에 저항할 용기가 없는 식민의 노예들에게 차려지는 것은 ‘내로남불’의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을 찾을 수 없다.  작금의 한반도 핵전쟁 위기의 도래를 맞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사회의 지배적 풍조로 자리잡은 ‘내로남불’의 반이성적 악순환의 논리에서 벗어나 역발상을 통한 인식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한반도기(출처- 위키백과)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19 | hrights | 조회: 1053 | 추천: 5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박태순의 소설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1980)에 나오는 “이 새로운 시대는 분명 잘못되어진 시대였고 진보가 아니라 퇴보로 뒷걸음질 치는 그러한 새로운 출발점을 이루었다”는 구절에 ‘감전’되어 그가 '역사 서당'에서 풍월을 배우고 익힌 지도 어언 4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말이 좋아 역사의 풍월이지, 사실 그가 주로 읊조린 건 풍월의 지엽말단(枝葉末端)에 불과했다. 그가 간신히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가락이라는 것도 서양사⊃(=중에서도)사상사⊃서양근대사상⊃자유주의⊃19세기 말 영국의 신자유주의 정도였다. 하여 그는 역사 풍월을 익힌 거의 모든 동무나 성님-아우님들이 그러하듯, 다른 갈래의 역사 풍월이나 역사 풍월 전반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놀리길 삼갔다. 출처- 알라딘 중고서적  불조심하듯이 말조심을 한다는 경계의 마음이 있어서 그리했다기보다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역사 풍월이라는 게 넓기가 한량(限量)이 없고, 갈래가 수십, 수백인지라 일언지하로 그 전모를 언술하기란 썩 어렵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가락을 하는 소리꾼이라고 해서 죄다 명창도 아니고, 명창이라 해도 '대문자로서의 역사'를 논할 식견을 겸비한 사람은 동서고금을 통해서도 매우 드물었다.  사정이 그러했음에도 그는 ‘역사 서당’의 언저리를 쉬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유명한 소리꾼이 되겠다는 꿈, 그에게는 그런 명창의 꿈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다만 역사의 가락 가운데 한 대목이나마 자기 색깔의 소리로 불러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을 뿐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행여라도 자기처럼 노래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그에게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은 있을법한 시구(詩句)가 아니라 틀림없는 사실(事實)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그가 초로(初老)의 사학도가 되면서 역사 풍월을 생계의 수단보다는 생각의 길잡이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돈에 의해 재단되고 있다. 돈이 되는 것만이 쓸모가 있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쓸모만이 아니라 가치 있음/없음 자체가 경제적 유용성에 의해서 평가된다. 사람의 노동만이 그런 게 아니다. 사람 자체를 ‘돈이 되는 사람/돈이 안 되는 사람’으로 나누는 게 당연시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사랑의 윤리(倫理)보다는 교환의 이윤(利潤)에 좌우되고 있다.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경제적 유용성이 판단의 기준으로 작동하는 “시장전체주의”(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의 표현)의 세상에서, 그에게 역사 풍월을 읊조리는 일은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이것은 홍세화 선생의 표현)을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얼핏 본 역사 세계지만, 거기에서 <그저 배부르게 사는 삶과는 다른 삶도 있다; 사회적 금기를 깨려는 시도는 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치부나 정치적 출세에는 무용한 일에 젊은 날(의 한 시절)을-나아가 일생을- 걸기도 한다>는, 한 마디로 의미 추구의 삶도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의 가락을 얻기도 했다.  대다수 국민과 마찬가지로 그도, 현재의 정권은 검사 생활로 잔뼈가 굵은 대통령과 이런저런 인연이 얽힌 검찰 출신들로 짜여 있다고 생각한다. 검찰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출세한다고 하나 그들은 그저 속칭 ‘바지사장’이거나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청받아서 하는 일꾼처럼 보일 뿐이고, 국정의 요직은 검찰 출신들이 꿰차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봐도, 법무부 장관과 차관, 통일부 장관, 법제처장, 보훈처장, 금융감독원장,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 국무총리실 비서실장이 검사 출신이고, 대통령실의 인사, 법률, 공직기강, 총무 관련 업무도 검찰 출신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검찰 출신들이 독식하고 있는, 대단히 이례적인 인사편중 현상이야말로,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검찰 공화국’이라고 칭하기도 어려운 ‘검찰 독재’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라고 그는 생각한다.  ‘열흘 붉은 꽃은 없고(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권력은 십 년 못 간다(권불십년, 權不十年)’라는 옛사람들의 말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역사 풍월을 읊조리다 보면, 아무리 막강하고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권력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한다. 역사상 모든 형태의 독재가 그러했듯이, 작금의 검찰 독재는 끝날 수밖에 없단다. 무오류의 교황권(Ultramontanism)을 내세웠던 서양 중세의 가톨릭 단일 신앙 체제이든; 신의 이름으로 왕의 권력을 정당화했던 절대주의의 독재이든; 공산당 독재와 같은 ‘일당독재’이든; 히틀러처럼 (돌격대, 친위대, 비밀경찰 등의) 준군사조직을 동원한 독재이든; 군부독재와 같은 ‘(한) 조직의 독재’이든 간에, 예외 없이 무너졌다. 끝나지 않는 잔치도 없고, 끝나지 않는 독재도 없다! 이 주장은, 그에 의하면, 주관적 소망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끝이 좋으냐, 나쁘냐이겠다. 인간의 지혜가 모자랐던 옛날에는 (가뭄, 홍수,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의 힘, 운명(의 장난)이나 신탁, 초월적인 존재의 섭리나 영웅적 개인의 의지에 따라 비극으로 끝날지, 희극으로 끝날지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보통 사람들의 집합적 의지와 힘이 역사를 좌우한다는 게 역사적 상식이 되었다. 따라서 지록위마-아니, ‘지(指)바이든위(爲)날리면’으로 표상되는 저 무도한 검찰 정권에게 어떤 결말을 지어줄지는, 눈과 귀가 멀쩡한 우리네 시민에게 달린 일이 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일하기 나름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12 | hrights | 조회: 619 | 추천: 13
오항녕 /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우 한 달 남짓 살고 이곳에 대해 아는 척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 사는 데 다 비슷한 것도 있고 이상한 것도 있게 마련입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은 메모를 해두었는데, 피차 거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중 서너 가지 소개합니다.  *9유로(euro) 티켓 : 올해 6월~8월 사이에 9유로(13,000원) 티켓 하나로 일반 대중교통인 버스, 기차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연방의회에서 시행했다. 석 달 동안 교통비가 9유로라는 말이다. 시내버스 2.9유로(한 달권 55유로), 튀빙엔에서 근처 도시로 전철을 타면 20유로는 기본이기 때문에, 9유로 티켓 있을 때 가고 싶은 데 가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8월 16일에 도착한 우리는 보름 남짓 혜택을 누렸는데, 그 위력을 실감하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기한을 늘이자는 논의도 있었는데, 가스, 전기값 인상에 따른 재원 준비가 우선이라 더 연장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코로나 상황에서도 중산층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버스와 전철이 공영이라 가능한 제도라고 한다. 역사를 보아도 공공재의 사유화, 이걸 두고 선진화, 효율화라고 하는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9유로 티켓 : 이 티켓이 준 안정감이 과연 싸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이 될까.] * 숲 : 근대 조림(造林)의 선구였던 나라답게 숲이 많다. 숙소 근처의 쇤부흐(schönbuch)를 자주 간다. ‘너도밤나무 숲’이란다. 멀리서 보면 스멀스멀 귀신이라도 나올 듯하다. 저녁 무렵이나 안개라도 피어오르는 날이면 영락없이 미녀와야수나 전설의 고향이 생각날 그런 모습이다.  귀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춘추좌씨전》에는 옛날 하(夏)나라 우 임금이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한 뒤 거기에 숲이나 강에 사는 각종 귀신의 모습을 새긴 뒤 백성들에게 알려 그들을 피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이 얘기는 뒤집힌 걸로 보인다. 이미 숲이나 강을 이용하며 그 속에 살던 인민들은 숲과 강에 익숙했을 것이다. 정작 숲의 귀신을 몰랐던 것은 우 임금이 아니었을까? 우 임금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몰랐을 것이다. 로빈훗이 노팅엄 셔우드 숲으로 들어갔을 때, 그를 잡겠다고 왔던 국왕의 군대는 숲속에서 지리멸렬했을 뿐이다. 국가 행정이 주민들이 사는 동네나 그 언저리까지 미친 것은 불과 2세기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런 추측이 거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숲은 사람들이 사과나 딸기 같은 열매, 집이나 외양간 지을 목재, 빵을 구울 땔감,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꿩, 사슴, 멧돼지 등을 공급받는 공유지였다. 강과 함께 숲은 사람들의 생계에 유력한 후원자였다. 잉글랜드 〈마그나 카르타〉나 조선의 《경국대전》에서는 이곳들을 ‘사사로이 점유할 수 없는 공유지’로 못박아놓고 있다. 흥미롭게도 튀빙엔 여행안내소에서 얻은 자료가 16세기 〈튀빙엔 협약(Tübinger Vertrag)〉 사진과 번역문이었는데, 여기에도 농민들의 공유지 이용권에 관한 조항이 명시되어있다. [쇤부흐 숲 : 로빈 훗이 나올 듯한 숲인데, 곳곳에 길이 나 있어 사람들이 걷고 뛴다.] * 걸림돌 : Stolperstein. 걸려넘어진다는 stolpern + 돌 Stein의 합성어이다. 재질은 돌이 아니라 구리이다. 튀빙엔 대학 한국학과에서 본관으로 걸어가다가 이 슈톨퍼슈타인에 발이 걸렸다. 알고 보니 정말 발에 걸리게 0.5cm 정도 도드라지게 설치한다고 한다. 유대인, 집시, 기독교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 ‘차별받고 처분된 인간’을 기억하기 위한 조각품이다. 인권연대의 ‘5월 걸상’과 가까운 기억 프로젝트이다. 1940년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보면서 그의 리얼리즘에 놀란 적이 있다. 이후 조금 더 사실을 알고부터는 놀라기보다, [당황(betroffenheit)]이라는 《나치시대 일상사》를 썼던 포이케르트의 말이 떠올랐다. 놀라서 설마, 하면서 고개를 돌리다가도 뒷머리를 당기는 듯해서 외면할 수 없고 왜 그런 거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뒤적일 수밖에 없는, 그래야 내가 인간일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소피 벨, 여기 살다. 1852년 생. 1942년 추방. 그해 12월 8일 사망.] * 비자 신청 : 석 달 전에 9월 13일 비자 신청을 예약했다. 그 며칠 전에 날짜를 상기시켜주는 메일이 왔다. 고마웠다. 13일 3시에 시청 대기실에 도착하여 차례를 기다렸다. 시간이 꽤 지나도 예약번호가 뜨지 않았다. 이상해서 외사과에 가보니 담당자가 결근했다. 그런데 그가 결근한 지 동료 직원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거다. 무단결근.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이 사람이 어디 사고를 당했던지 아픈가보다, 싶었다.  내가 메일을 보낸 지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내 주민등록이 검색이 안 된다고. 첫째, 주민등록은 이미 했다. 또 서류는 비자 신청 때 접수하면 되는 것이지, 검색 여부와 상관이 없다. 무단결근으로 못 지킨 비자 예약날짜를 다시 잡아주면 되는 거다. 그래도 나는 일단 주민등록 서류까지 메일로 보내주었다. 또 소식이 없다. 내가 다시 메일을 보냈다. 영국도 가야하고 해서 비자가 필요하다, 다시 예약을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혹시나 했던 걱정은 이제 무책임에 대한 어처구니없음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난 뒤 27일 2시 반에 오라고 메일이 왔다. 나와 예약 일시를 상의한 게 아니라 그냥 그때 오란다. 직장에 나가야 하는 형편이었다면 어땠을까? 일시를 나와 상의해서 조정하자는 메일을 쓰려는데, 동료가 말린다. 더 번거로워질 수 있다고. 그날따라 기분도 좋고 다른 약속이 없었던 나는 ‘남의 나라니까’ 하고 참기로 했다.  신청하는 날. 주한 독일대사관 서식에 신청서를 미리 작성해갔는데, 그 서식이 아니라며 튀빙엔 시청의 신청서를 준다. 외무부 서식 다르고, 시청 서식이 다르다? 웃긴다. 기재 내용? 다 같다. 칸과 종이 색깔만 다른 거다. 게다가 혼인증명서가 필요하단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배우자증명서와 외무부의 아포스티유까지 첨부했거늘. 안 된다고 했다가, 나는 이 외에 다른 혼인증명서를 제출할 수 없다고 항의(?)하니 그럼 알겠다고 한다. 그럴 걸 왜…….  숙소계약서, 대학계약서를 추가로 보내달란다. 숙소계약서가 없으면 주민등록(Anmeldung)이 안 되니, 주민등록 서류를 제출했다는 말은 숙소계약서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숙소계약은 대학 웰컴센터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학과의 초청장과 대학의 협약서가 없으면 숙소계약서는 애당초 발급받을 수가 없다. 쉽게 말해 추가로 요구한 둘은 비자 신청에 전혀 불필요한 서류인 것이다. 지금도 그 직원이 이 일의 담당자가 맞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동료는 이런 일은 처음 본다고 한다. 그럴까? 그럴 리 없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무책임이라면 처음일 리가 없다. 어떤 동료의 말로는 독일 공무원은 처우나 사회적 인정이 낮고, 그래서 책임감이나 뭐 이런 거 기대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럴까? “인간은 스스로를 우습게 여긴 다음에 남들이 우습게 여기는 법이다.[人必自侮然後人侮之]” 더구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나중에 책임을 지게 되는 상황에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은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더 문제이다. 책임감은 공무원의 덕목에 관계되지만, 사과할 줄 모르는 것은 인간다움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 [튀빙엔의 시위와 장날. 인구 9만의 도시가 갖는 자립성과 안정감이 부럽다. 대도시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에 분산되어 살 수 있는 힘일 텐데, 이걸 잘 들여다보아야겠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2-10-05 | hrights | 조회: 704 | 추천: 8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직도 신자유주의적 자유인가  신자유주의는 자유경쟁에 입각한 시장만능주의다. 18세기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담긴 고전적 경제 자유주의를 보내고, 자본의 방임적 자유를 통제하면서 자본과 고용을 확대시킨다는 수정자본주의(일명 케인스주의)를 거친 뒤, 동구권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 속에서 20세기 후반에 힘을 얻어온 시장 경제의 흐름이다. 1970년대 후반에 영국과 미국에서 펼쳤던 자유 시장 정책 이후에 급격히 세계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정부의 개입이 경제의 원리를 훼손시킬 수 있으니, 정부는 개인 및 기업의 권리와 사적 재산권을 보호하되 개입은 최소화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이에크는 자유를 경제 최고의 가치로 꼽았다.  이때 자유는 경쟁이라는 외피를 입는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국가는 시장이 자유롭게 경쟁해 최대한의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능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가 시장에 간섭할 수 있는 것은 “경쟁이 가능한 한 효과적일 수 있도록 조건을 창출하는 일, 경쟁이 효과적이지 못하면 보완해주는 일” 정도이다. 그에게 자유경쟁은 시장중심주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동력이자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까지 한국 사회에서도 대단히 익숙한 주장들이다. ‘루저’를 양산하는 사회  이런 흐름이 자연스러워지면서 경쟁을 통해 더 많은 성과를 생산하도록 충동하는 체제를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한다. 심신이 피곤해져도 피곤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모든 경제 행위를 자유의 이름으로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자유경쟁의 원리로 넘쳐나며, 자본의 힘으로 돌아가는 시장은 성과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고갈시키는 인간을 찬양한다. 바빠서 피곤할수록 능력자로 평가받는다.  이런 자유경쟁에는 자의든 타의든 낙오자가 있게 마련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기존의 차별적이고 위계적 구조를 더 공고하게 만든다. 서로를 내몰면서 자유가 만들어놓은 경쟁적 성과 문화가 폭력으로 작동한다. 자유가 폭력을 구조화시키는 동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는 나름 긍정적인 의도로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인간을 구속하는 언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대통령의 자유와 평화  윤석열 대통령은 유난히 ‘자유’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난 2022년 5월 취임사에서는 ‘자유’라는 말을 35번, 8.15경축사에서는 33번, 9월 유엔연설에서는 21번이나 했다. 자유가 위협받고 있으니 자유의 이름으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때의 자유란 무엇인가. 누구로부터 어떤 위협을 받고 있으며 연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말일까. 9월 유엔연설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자유론은 원론적으로는 무난했다: “진정한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자아를 인간답게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고, 평화는 인류 공동 번영의 발목을 잡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인류가 공동으로 더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것입니다.” ‘자아를 인간답게 실현할 수 있을 때 평화의 토대가 갖추어진다’는 의미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일견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좀 더 보면, 어떤 이의 자아가 어떻게 실현된다는 것인지, 정말 온 인류가 그런 기회를 공평하게 갖는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평화가 인류 공동 번영의 토대를 갖추는 ‘계기’인지, 아니면 공동 번영의 ‘과정’과 ‘상태’인지도 불분명하다.  평화학에서 말하는 평화는 일체의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 혹은 실제로 폭력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윤대통령의 유엔연설문에서는 ‘평화가 인류 번영의 토대를 갖추는 것’이라는 애매한 말로 끝내고 만다. 평화는 인류 공동 번영의 과정이자 상태이고 결과이자 목적이지만, 연설문에서는 평화를 번영의 원인인 것처럼만 말한다. 뭔가 논리와 범주가 맞지 않는다. 윤대통령은 평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앞선 문장에서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는 말을 서너 번 이상 사용했을 때 그의 자유와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위협인지 예측은 되었지만, 그때까지도 분명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진영논리인가  그러다가 연설문 말미에 윤대통령은 유엔의 의미를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유엔이 창립된 직후 세계 평화를 위한 첫 번째 의미 있는 미션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유엔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생각하는 자유라는 것이 진영논리에 입각한 대단히 이념적인 발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자유경쟁에 입각한 경제 규모의 확장을 자유의 목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 자유가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어서 인간을 다시 속박으로 몰아넣고, 특히 온갖 ‘루저들’을 양산할 수 있는 모순적 계기가 된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인류 공동 번영의 발목을 잡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고 인류가 더 번영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것”이라는 앞선 말을 뒤집는 모순적인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윤대통령에게 자유와 평화는 정말 인류 공동의 것인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누군가 어떤 세력은 배제하는 차별적인 것인가. 냉전과 대립의 언어를 넘어서야  현재 전 세계 193개국이 유엔 회원국이다. 거의 모든 나라가 정치적 이념, 권력의 의도와 상관없이 유엔에 가입해 있다. 그런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유엔군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것”을 “유엔 창립 이후 첫 번째의 미션이었다”고 말했어야 했을까. 한국전의 당사자였던 북한과 한국전에 참전한 중국 등 이른바 사회주의국가와 사실상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언어를 써야 했을까.  유엔은 대한민국만 합법적인 정부로 여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유엔 성립 초기에 미국적 질서에 따라 그렇게 했던 역사도 있고,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이름으로 연합군을 파병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유엔은 원칙적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것이다. 유엔의 논리 안에서 한국과 북한은 대등한 한 표를 지닌 별개의 나라이다. 이런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80여년전 언어를 구사했어야 했을까. 윤대통령이 자유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급기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운운하는 옛말을 꺼냈을 때, 그의 자유가 인류와 한반도의 특정 세력에게만 유리한 자기중심적 자유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출처- pixabay 자유인가 이기성과 불안감인가  자유는 ‘스스로[自] 말미암음[由]’이다. 자유는 ‘준비된 자신[自]으로부터 나온다[由]’. 나아가 자신의 자유가 타자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도록 할 때 진짜 자유가 된다. 자기중심성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자유를 다시 억압하는 힘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남발하다시피 하는 그 심층에는 이기성과 불안감이 있다는 뜻이다. 남발하는 자유에 편승하는 대중의 언행도 불안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증거이다.  자기중심적 자유는 타자에 대해 도전하고 타자를 속박한다. 당연히 그 타자도 자유의 이름으로 나에게 도전해온다. 이런 식으로 ‘자유들’의 경쟁이 서로를 속박으로 몰아넣는다. 자유의 이름으로 북한에 대립하면 북한도 더 대립적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 뿐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종종 북한을 이용하는 중국도 한국을 다시 압박하는 전략으로 이어가지 않겠는가.  북한은 선동과 구호의 나라이다. 동네와 거리 곳곳에 각종 구호가 담긴 현수막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각종 하향식 축제도 인민의 일치단결을 위한 구호로 넘쳐난다. 그러나 그런 선동적 구호는 선동과 구호가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 북한 사회의 속내에 대한 역설적 증거이다. 이것이 남한에 대한 대립으로 이어진다.  마찬가지이다. 윤대통령이 반복하는 자유의 심층에는 특정 세력, 가령 이른바 ‘사회주의’에 대한 대립과 적대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런 대립적 자유는 다시 스스로를 억압과 속박 속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자유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억압을 더 공고하게 만든다. 자유는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구조를 해체시켜 나갈 때 얻어지기 시작한다. 자유라는 말을 유통시키면서 특정 세력을 억압하는 모순적 구조를 안으로부터 뒤집어 그 속박을 풀어나갈 때, 속박이 느슨해지는 그만큼만 자유는 서서히 모양을 드러낸다. 자유가 자신을 위한 일시적 달콤함에 취해 남도 죽이고 결국 자신마저 죽이는 마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9-27 | hrights | 조회: 576 | 추천: 10
임아연 /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의 삼촌 또는 아버지 세대만 해도 ‘고향’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서울이나 인천에 사는 사람 중의 절대다수는 서울 이외의 지역이 고향이었다. 경상도에서 온 사람, 전라도에서 온 사람, 충청도에서 온 사람… 저마다 고향이 있어 명절 때면 고향 가는 인파들로 도로 곳곳이 마비됐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고향’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이 제법 많았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와 같이 농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우리 어머니·아버지 세대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시골 어르신들을 찾아가 퀴즈를 풀거나, 자식들에게 영상 메시지를 보내는 예능도 큰 인기를 끌었다.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이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TV 프로그램에 울고 웃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이 사회 전반에 대중적으로 공유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80년대생들이 부모가 되면서 고향이라는 개념이 무너져가고 있다. 아버지·어머니의 고향은 존재하지만 ‘나’의 고향은 서울이나 인천 등 대도시가 대부분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아온 세대에게 시골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대중매체에서도 과거에는 흔히 볼 수 있었던 ‘고향 프로그램’은 자취를 감췄다. TV 프로그램에서 시골을 배경으로 방송하는 것은 여행이나 맛 기행 정도가 대부분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10여 년 전부터 정년퇴직을 마친 노년들이 고향에 내려와 사는 귀촌이 늘고 있고,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 소도시에서는 인구 정책의 일환으로 귀농·귀촌인에 대해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마저도 지역의 인구를 늘게 하는 지속 가능한 정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불과 10~20년만 지나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역을 찾을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미지 출처- 해남우리신문 대도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방소멸이 대수냐고 물을 수 있다. 우리나라 전체적인 인구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경쟁력이 없는 지역은 통폐합해 행정을 운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지역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고유의 문화를 축적하며 지역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지역의 소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투리다.) 인류 문명이 생물의 다양성에 달려 있듯,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 또한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돼왔다. 여러 가치가 공존하고 다양성을 존중받는 사회가 그렇지 못한 획일화된 사회보다 유연한 사고와 건강한 토론이 가능하고, 폭넓은 논의를 통해 사회의 발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지방소멸이라는 지역의 위기를 막는 것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문제로 다가왔다. 불과 한 세대를 지나면서 ‘고향’을 잃었듯, 머지않아 우리는 ‘지역’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지구종말시계가 인류멸망 100초 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데, 지방소멸시계는 1분도 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2022-09-21 | hrights | 조회: 428 | 추천: 11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이 좌천되어 대구고검 검사로 있을 때 얘기다. 고검장 주재 회식이 열리면 윤석열이 화제의 70% 이상을 독점했다고 한다. 당시 대구고검장은 윤석열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사법시험은 빨리 된 선배였는데, 윤석열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자리를 장악했다고 한다. 위계가 강한 검찰 문화에선 이례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고검장은 신이 나서 떠드는 윤석열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 이 사람은 하나를 알면 열을 말하는 사람이구나.”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친다는 옛말이 아니다. 아는 것의 10배를 떠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틀린 사실이 많고 억측도 많았을 거라는 얘기 아니겠냐고, 이 말을 전해준 사람은 촌평했다. 달변가 아닌 다변가  도리도리와 에……응?…… 아니면 말을 잇지 못하는 윤석열은 달변가가 아닌데도 말하는 걸 좋아하는 다변가로서 어느 자리에서든 화제를 독점하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습성이 있다. 세상 모든 일을 아는 것처럼 떠드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확신이 강해서 본인 주장이 허위로 드러나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장삼이사라면 가까운 친구들은 피곤하겠지만 사회적으로는 별문제가 없다. ‘일개’ 검사라면 해악이 있겠지만 해악의 크기는 제한적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검찰총장에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누가 봐도 무식한데 정작 본인은 무식한 줄 모르고 경청할 줄도 모르는 오만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가장 큰 권한이 주어졌고, 사회적 해악의 크기도 비례하여 커지고 있다.  얼마 전 강경보수 성향의 <문화일보>는 대통령이 회의에서 70% 이상의 말을 독점해 참모들의 입을 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윤석열을 “말의 점령자”라고 표현했다. 참모들의 말을 경청하고 합리적인 논쟁을 하더라도 뒤탈 없는 결론을 내기가 어려운 게 국가의 일인데, 정치도 경제도 정책도 잘 모르는 사람이 모든 게 ‘이 손안에 있소이다’라며 나대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취학연령 하향 정책이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교육부 장관이 준비도 없이 불쑥 꺼냈다가 여론의 대대적인 역풍을 맞았다. 무식한데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대통령과 직언 따위는 사전에 없고 알아서 기는 법만 익힌 무능한 참모가 합동 연출한 촌극이다. 대통령이 일대일 면접 보듯이 각 부처 장관으로부터 독대 보고를 받는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다. 대통령도 초짜, 장관도 초짜인데 업무보고를 독대로 한다는 건, 엊그제 면허를 딴 초보 조종사 둘이 점보 항공기를 조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운이 좋아 큰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승객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장 내리겠다고 난리가 날 것이다. 정부 시스템의 기본 작동 원리를 무시한 아마추어적 통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 사례가 취학연령 해프닝이다. 윤석열 정부를 관통하는 무의식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듯 보이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가 윤석열 정부의 실패를 관통하는 무의식의 현상(現象)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본인의 무지와 오만, 참모들의 아부 근성이 이 정부 사람들 의식의 밑바닥에 심연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그 도저한 시대착오적 마인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은 유전자 깊이 새겨진 본능의 흐름이어서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 사태의 근본 원인을 알지 못하니 대증 처방에 그칠 수밖에 없고 그 처방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집권 초기 정부로서는 유례가 없는 처참한 지지율에 당황하여 박순애를 경질하고 대통령 비서진을 개편했지만 유사한 해프닝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100일을 기념하여 대통령실이 공개한 회의 사진과 반지하 주택 수해 참사 현장을 동물원 구경하듯 내려다보는 사진 역시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이 사진들의 공통점은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는 것인데, 특히 수해 참사 현장 사진의 경우 참모의 시선이 수해 현장이 아니라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 대통령의 옥음을 생생한 표정과 함께 시청각적으로 이해하려는 참모의 순박한 충심이 느껴진다. 사진 출처 - 대통령실  대통령실 소파 회의 사진의 경우 애초 콘셉트부터 에러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이 따라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바마 백악관 사진의 경우, 탈권위라는 명확한 콘셉트 아래 연출 없이 사진을 찍어 대통령이 주인공이 아닌 경우가 많다. 참모들 속에 파묻혀 있거나 저 멀리서 혼자 전화를 받고 있다. 40대의 젊은 대통령으로서 권위를 내려놓고, 자유분방하게 국정을 운영한다는 집권 철학이 거짓 없이 사진에 드러나 있어서 세계인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실의 회의 사진은 대단히 어색하다. 전하고자 하는 콘셉트가 탈권위인지, 업무에 대한 열정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멋진 모습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아마도 이 세 가지를 모두 보여주려고 각자의 포지션에 맞게 역할을 지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연출한 티가 너무 강하게 났다. 사진 출처 - 대통령실  나는 연출 여부보다도 이 사진들을 고른 참모들의 권위주의적 멘털리티에 주목한다. 이런 사진은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여러 장 찍게 되므로 최종 단계에서 어떤 사진을 선택하느냐에 공개 주체들의 의지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사진들은 국민 마음이 아니라 대통령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겠다고 작정하지 않는 한 고를 수 없는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면 그건 국민의 시점이 아니라 대통령의 시점에서 사진을 골랐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윤석열 정부가 국정에 임하는 자세를 폭로한다. 대통령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지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홍보수석을 바꾼다고 달라지겠는가.  대통령 사진 공개와 같은 이미지 홍보의 최종 목적은 국민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대중선전의 기본조차 망각할 정도로 (윤석열의) 자아도취와 (참모들의) 아부 근성은 이 정부의 무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윤석열 정부의 무능은 본능이 시키는 일이어서 고칠 방법이 없다. 오만과 아첨이 만나 피워낸 무능이라는 곰팡이가 새 정부 출범 반년도 안 되어, 나라 곳곳을 퀴퀴하게 만들고 있다. 검찰에서 갈고닦은 무오류 신화와 유체이탈  윤석열의 무지와 오만은 오랜 검사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질병 같은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모두가 칭송하니 지성을 연마할 필요가 없고, 무슨 잘못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오만에 빠진다. 누구도 우릴 건드릴 수 없고, 제 팔을(동료를) 자를 때도 우리가 필요하면 자른다는 자신감은 검찰을 집단 무오류 신화에 젖게 했다. 박순애는 윤석열의 명령을 이행한 하수인일 뿐인데 박순애를 경질하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는 것은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검찰의 무오류 신화란 이런 것이다.  검찰은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듯 세상을 보는 유체이탈의 화신이다. 법을 집행하는 자신들은 법 위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부인과 장모의 범죄행위에 관대할 수 있는 이유도 검찰에서 갈고닦은 유체이탈 사고방식 덕분이다. 물론 검사 중에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윤석열의 경우, 검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수준의 도덕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독재정권이라며 어퍼컷을 날리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여당을 장악하려 삼권분립을 깡그리 무시하고 제왕처럼 굴면서도 스스로 떳떳하다. 자기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니까. 검찰의 유체이탈이란 이런 것이다.  윤석열이 이런 사람인 줄 마치 몰랐다는 듯이 이제 와서 대통령제의 문제인 것처럼 호도하는 논객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강준만 교수 같은 사람이 그러한데, 분량의 한계상 이만 줄인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따로 정리하겠다. 윤석열은 항우 같은 혼군  무지하지만 겸손하거나 똑똑하지만 오만한 대통령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무지한데 겸손하면 호가호위 세력이 창궐하여 부패와 협잡이 판칠 개연성이 높아진다. 대통령이 똑똑한데 오만하면 국민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국정을 그르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런데 무지와 오만, 두 가지 악덕을 모두 가진 대통령이라니…. 구만리처럼 남은 임기 동안 어떤 희한한 일을 벌일지 나도 모르게 걱정과 한숨이 새어 나온다.  예로부터 혼군(昏君)과 간신은 한 세트였다. 현군(賢君)과 충신이 한 세트인 것과 같다. 혼군 곁에 충신 없고 현군 곁에 간신 없다. 입속의 혀처럼 구는 간신을 좋아하고 바른말 하는 충신을 멀리해서 혼군이다. 혼군에게 간신을 끊으라고 하는 것은 똥개에게 똥을 끊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윤석열 본인이 능력 위주로 인사를 한다고 했고, 자기 기준으로는 능력이 있는 인사들만 모셨다는데 말해 무엇하랴. 참모를 바꾼다 해도 그 밥에 그 나물이다. 혼군에게 국정 쇄신을 촉구하는 것처럼 무망한 일은 세상에 없다.  윤석열 본인이 손바닥에 왕(王)자를 쓸 정도로 왕이 되길 원했으므로 이런 비유도 가능할 것이다.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 가운데 비슷한 유형을 찾으라면 윤석열은 항우 같은 혼군이다. 스스로 무적의 장수라고 으스대면서 현명한 참모를 멀리하고 사리사욕에 가득 찬 간신을 중용한다. 한때 전투력으로는 항우가 유방을 압도했으나 최종적인 승패의 열쇠는 리더 본인의 자질에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지금 형세를 요약하면, 도처에 계견승천(鷄犬升天)이요 성호사서(城狐社鼠)다. 한 사람이 권력을 얻으니 그 집의 닭과 개까지 권세를 누리고, 성벽에 여우가 살며 사당에 쥐가 살아도 잡지를 못한다. 닭과 개와 여우와 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아실 줄 믿는다. 가장 심각한 것은 대통령 자신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고도 스스로 잘못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장자>가 말하는 해군지마(害群之馬, 무리를 해치는 말)가 바로 윤석열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9-07 | hrights | 조회: 1109 | 추천: 41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정의당이 듣도 보도 못한 걸 시작했다. 31일부터 닷새 동안 정의당 소속 비례대표 5명에게 총사퇴 권고 여부를 묻는 당원 총투표를 한다고 한다. 물론 가결이 된다고 5명이 자동으로 의원직을 잃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전혀 없다. 다만 총사퇴를 ‘권고’하는 것일 뿐.  이런 황당한 소동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정의당 전 수석대변인 정호진이 7월 5일 비례대표 총사퇴를 요구하는 당원 총투표를 제안했다고 한다. 정의당 의석은 6석이고 그 중 심상정(경기 고양갑)을 뺀 5석이 비례대표인데,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 참패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비례대표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자는 것이다. 정호진은 “비례대표 5석을 통해 ‘달라지는 정의당’을 보여주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1002명이 당원 총투표 발의 서명부를 제출했고, 당권자 937명의 유효서명을 받아 당원 총투표에 돌입하게 됐다고 한다.(심상정은 왜 사퇴 권고 대상에서 빠진 것인지는 따지지 말자. 아마 총투표 제안한 분도 잘 모를 것 같다.) 출처 - 한겨레  당원 총투표는 대한민국 정당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다만 썩 아름답게 기록될 것 같지는 않다. 가결이 된다면 되는 대로 부결이 된다면 되는 대로 소모적인 갈등과 분열은 불가피해 보인다. 만약 가결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의당 의원 5명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도 있고, 사퇴를 거부할 수도 있다. 반대로 부결이 되면 어떻게 될까? 정의당 의원 5명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도 있고, 사퇴를 거부할 수도 있다. 혼란과 갈등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런 게 ‘달라지는 정의당’일까? 임기 시작한 지 2년쯤 지난 초선의원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는 발상도 참 난해하기만 하다. 더구나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에는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동의가 안된다.  물론 정의당 의원 6명에게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거야 당연한 노릇이다. (나도 불만 많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정권교체 프로파간다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청년정치’에 부화뇌동해 경험이 일천한 의원들을 발탁한 건 누구였을까. 정의당이 당원의 뜻을 모아 이들 5명을 의원으로 선출해놓고 2년만에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야’라고 하는 건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이고,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 우는 갓난아기 달래려고 할머니가 의자 때리는 시늉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다.  당원 총투표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끝내고 돌아온 축구대표팀 선수들에게 자칭 '축구팬'들이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라며 엿을 집어던지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해 정말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엿 뒤에 숨어 버렸고, 선수들만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 엿놀음 덕분에 한국 축구가 더 발전할 가능성은 당연히 0%였겠고, 솔직히 엿 집어던지던 사람들이 K리그 발전을 염원하며 프로축구 경기장 한 번이라도 찾았을지도 의문이다.  당원 총투표가 실망스러운 건 작금의 행태가 ‘숙련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반정치주의, 장기적인 안목을 갖는 전략적인 사고가 아닌 단기실적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모두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가치 반대편에 있다. 정치인 하루 이틀 한다고 훌륭한 정치인 되지 않는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우리에겐 정치 입문 2년차인 현직 대통령이 있다. 정치인이란 숙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의당 의원 5명을 숙련노동자로 육성해 정의당과 진보정치의 자산으로 삼는 방향을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이번에 당원 총투표가 가결되고, 압력에 못이겨 5명이 모두 사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새로운 5명이 의원직을 승계할 것이다. 새로운 5명은 당연히 국회의원 경험이 전혀 없는 초짜들일 테고, 준비 기간마저 짧으니 실력도 분명히 떨어질 것이다. 당연히 실수도 많을 것이다. 2년만에 의원들을 다 갈아치웠으니 다음 5명은 1년만에 갈아치우지 못할 이유가 뭐겠는가. 그 다음엔 뭐 깔끔하게 6개월짜리,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직으로 의원단을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설마 정의당이 추구하는 목표가 모든 당원에게 국회의원 뱃지 한 번씩 달아주기인 것일까? 계속 갈아치우다 보면 언젠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훌륭한 의원님이 나와서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는 기대라도 하는 건가? 전직 국회의원이 늘어나니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에서 목소리 더 높일 수 있는 효과 하나는 확실하겠다.  정의당이 겪는 혼란은 정의당보단 오히려 더불어민주당에게 더 중요한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민주당에선 당원들의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당헌 개정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에서 논의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정의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도화했다. 정의당 당헌당규는 당직선거 투표권을 가진 당원(당권자) 5%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당원 총투표’를 발의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같은 일을 겪고 있다. 이게 민주당이 추구해야 할 길일까?  한때 직접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설레곤 했다. 선거를 통해 뽑혔다는 대통령과 국회 하는 짓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던 때였다.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란 허울을 쓴 저들의 민주주의를 이겨낼 대안처럼 보였다. 경험이 쌓이고 보니 순진한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하게 든다. 직접민주주의 실험으로 칭송받는 주민참여예산마저도 실제 경험해보면 직접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 더 강하게 느껴진다. 참여민주주의를 그토록 강조했던 열린우리당이 어떻게 지리멸렬했는지 떠올려 보자. 주민투표는 아이들 밥그릇 뺏는 용도로도 악용될 수 있다는 경험을 통해 마냥 좋은 게 아니라는 걸 극명히 보여줬다. 노무현-문재인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국민참여'를 강조했고, 그럴수록 청와대는 국회(정치)와 멀어져 버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직접(혹은 참여) 민주주의보다는 오히려 더 책임감 있는 대의민주주의 아닐까?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8-31 | hrights | 조회: 645 | 추천: 5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을지 프리덤 실드(UFS, 을지 자유의 방패)’라는 새로운 이름의 한미연합 군사훈련이 진행 중이다. 소위 연례적, 방어적 성격의 연합방위태세 향상을 통한 대북 억지력 강화가 변함없이 회자된다. 레퍼토리가 어제도, 오늘도 거의 똑같다.  이번에는 레퍼토리가 조금 변하긴 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주창한다.  ‘주적론’과 ‘선제타격’을 외치는 대북 적대 정권은 지난 정권에서 북의 눈치를 보느라 축소 시행되어 온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야외 실기동훈련까지 정상화해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보를 지키겠단다. 추락한 정권의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큰 치적이라도 되는 양 정권 홍보에 열중이다. 외세의 눈치는 보면서도 동족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다.  북미 관계의 정상화를 향한 대화와 협상을 추진하고 촉진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하여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연기, 축소 시행이 있었을 뿐이다. 노복에게는 축소 시행할 권한이 없기에 그 무슨 눈치 때문에 정할 일이 애당초에 없다. 더더욱 ‘비정상의 정상화’ 권한도 없다. 모두가 그토록 추종하는 상전이 결정할 일이기에.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종북몰이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외세와 그를 추종하는 극우 보수세력밖에 없다. 전임 정권과의 차별성 부각을 위해 허위사실의 유포까지 서슴지 않는다. 한미동맹을 약화시킨 친북 정권의 프레임을 갖다 붙인다. 오로지 정권의 안위를 위하여 정치적 이득을 노리는 안보 장사꾼에게 ‘을지 프리덤 실드’는 전 정권에 대한 종북몰이용 공격 소재로 쓰이는 도구가 된다. 을지 프리덤 실드(UFS) 연합연습의 사전 연습인 위기관리연습이 시작된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서 아파치 헬기가 비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외세 추종의 동족 대결에 앞장서는 정권의 ‘비정상의 정상화’ 구호가 횡행한다. 여기에 의문부호를 달아서는 안 된다.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작전지휘권을 가진 외세에 의존해 외세의 핵 무력을 동원한 참수, 점령, 북 정권 격멸의 전쟁연습을 숙달하기 위한 연합 군사훈련이 도발이 아니라 억지력이라고 믿어버리는데 익숙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핵 항공모함, 전략 핵 폭격기, 핵 잠수함의 한반도와 그 주변 전개는 북의 핵 보유 전에도 대북 억지력으로 포장되었다. 지금은 핵우산을 통한 대북 확장 억지력으로 포장되어 우리 국민 모두가 체감하는 강력하고 공고한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탈바꿈하였다. 국가보안법의 위력에 갇힌 세뇌사회의 처참한 비극이다.  하지만, 외세와 안보 장사꾼이 쌓은 사상누각의 모래성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외세는 전 세계의 패권과 지배력 유지를 위하여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작전지휘권을 틀어쥔 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을 위한 대화와 협상을 회피하고 거부하며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영구적 시행과 군대의 항구적 주둔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억지력의 모순이 작동한 듯 어느 순간 강대강의 힘의 역관계가 한반도에서 팽팽하게 펼쳐지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미국의 핵 전략자산의 연례적 수시 전개에 대응한 북의 대미 억지력도 갈수록 강화되었다. 미국의 핵 선제공격 대상으로 지목된 북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핵보유국이 되었다. 대미 억지력으로서 북의 핵 무력은 최근 북 지도자의 연설에서 핵 선제타격 결행의 조건이 언급되기까지 하였다. 또한 북의 전술핵 실전 배치 가능성까지 추정되고 있고 북의 7차 핵 실험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오늘에 이르는 한반도 분쟁의 격화 과정에서 핵전쟁 발발의 심각한 위기로의 질적 변화는 핵보유국 간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지는 위기의 가속도를 심화시키고 있다. 북미 간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정치적, 외교적 해법을 추구하지 않은 결과다.  북미 간 군사적 억지력 강화가 낳은 군비증강의 악순환이 문제의 본질로 뚜렷이 드러났다. 강대강 국면에서 위기를 관리할 방법은 없어지고 있다. 대화와 협상으로 복귀하는 일밖에 없다. 북미 관계의 정상화 해법을 추진해야 한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과 남북정상회담에 따라 이뤄지거나 추진되었던 북의 핵 실험 중단,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중단, 9.19 남북군사합의, 비무장지대(DMZ) 내 전방초소(GP)의 철거, 대북제재 해제, 정전체제의 종식과 항구적 평화체제의 구축 등이 바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비정상화의 정상화다. 북미 간 적대관계의 해소가 문제 해결의 열쇠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북미 간 적대관계 해소를 위해 종전을 위한 중재자 시늉이라도 하기는커녕 정상과 비정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정권의 역주행이 거침없다.  ‘을지 프리덤 실드’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한 북의 대응은 필연적이다. 우크라이나 문제, 대만해협 문제와 맞물리며 한미연합 군사훈련은 전 세계적 차원의 심각한 군사적, 외교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  ‘을지 프리덤 실드’는 세계적 차원의 핵전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천만의 대책 없는 전쟁연습이다. 주권자로서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우리의 경각심이 필요한 때다. 외세와 그를 추종하여 동족 대결을 심화시키는 극우 보수 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08-24 | hrights | 조회: 607 | 추천: 3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졸옹(拙翁) 홍성민의 문집 <졸옹집(拙翁集)>에 실린 글 중에 <촉견폐일설(蜀犬吠日說)>이란 작품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 ‘촉견폐일’은 ‘촉(蜀)나라 개(犬)는 해(日)를 보면 짖는다(吠)’라는 뜻인데, 촉나라는 산이 높고 안개가 많아서 해가 보이는 날이 적기 때문에, 개가 해를 보면 이상하게 여겨 짖는다는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촉견폐일설>은 이런 촉나라 개의 행태에서 성인을 헐뜯고 모함하는 소인배의 작태를 유추하여 현실 세태를 비판하는 고전 수필이다. 출처 - 화순군민신문  고사에서는 개가 해를 보면 짖는다고 하지만, 지은이는 사실 촉나라 개는 해를 보고 짖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는 날씨에 익숙해진 탓에 “그것이 일상과 다름을 보고 짖는” 것이라 해석한다. “(개는) 촉나라에서 태어나고, 촉나라에서 자라서 다만 촉나라의 하늘만 보았을 뿐이고, 촉나라 이외의 하늘은 보지 못해서 오직 촉나라의 하늘에는 항상 비가 있다는 것만 알고, 촉나라 밖에는 늘 해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촉나라 개가 해를 이상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고 짖는 것은, 촉나라 개의 “천성이 천하의 개에 비해 실제로 다른 게 아니라 그 개가 촉나라에서 태어나 익히고 익숙해져” 그렇게 되었다고 풀이한다.  이런 ‘촉견폐일’의 고사에서 유추하여 지은이는, 본데없는 소인(小人)이나 범인(凡人)이 ‘비=악(惡)’에 젖어 있어서 ‘해=성인(聖人)’을 보게 되면 정상이 아니라고 ‘짖는’ 세태를 비판한다. 그리고 바른말을 하는 올곧은 사람들을 보면 소인배가 가만두지 않고 모함하는 이유를, 일상화된 악에 익숙해진 데서 찾는다. “한 세상의 어둡고 더러움이 촉나라 남쪽의 항상 비가 내리는 것보다 심하며, 세상 사람들이 사악한 마음을 품고 올바름에 대해 짖음이 촉나라 개가 해를 보고 짖는 것보다 심하다. 이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세상 사람이 다만 사악함에 익숙해져 그 올바름을 모를 뿐이다.”  지은이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촉나라 개가 짖는 것이야 그저 해를 보고 짓기 때문에 “스스로 짖을 뿐이며 해에게는 병이 되지는 않으나 사람이 올바름을 보고 짓는 것은 다만 짖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에게 병”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가 짖는 거야 기실 인간사에 별다른 폐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권모술수와 거짓에 능한 간사한 무리가 ‘짖어대는’ 것은 단지 ‘개소리’에 그치지 않고, 정정당당한 행실과 바른 생각(과 말)을 역으로 나쁘고 잘못된 언행으로 매도하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만드는 병폐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상이 정상을 조롱하고 몰상식이 상식을 경멸하며 ‘사마외도(邪魔外道)’가 정도(正道)인 척하는 도착(倒錯)은 조선 중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나랏일 한다는 양반들’이 앞장서서 그런 착란(錯亂)과 전도(轉倒)의 세태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도 매한가지다. 21세기의 20년도 훌쩍 넘어선 지금도 정권 핵심 세력 내부에서 ‘검사회의’는 구국 충정의 발로로 아무 문제가 없고, ‘총경회의’는 ‘하나회의 12․12와 쿠데타’에 준하는 상황이라고 매도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와 16명이나 죽인 흉악범들을 정당하게 추방한 사건을 마치 북한 정권의 비위를 맞추려고 자발적 탈북자들을 강제로 송환한 사건으로 둔갑시키려는 지록위마(指鹿爲馬)가 잇따르고 있다.  너무 빈약한 국가관을 지닌 권력 엘리트에게 너무 큰 권한이 위임된 현실도 염려스럽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는 고사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이익만을 꾀하는 정치 모리배가 당치도 않은 억지 궤변과 허튼소리를 남발하는 것은 더욱 우려스럽다. 술은 마셨으나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말은 이제 거의 ‘애교 멘트’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 정권 여기저기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난무하고 있다. “너는 빨갱이야!”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 어떤 증거도 사실관계도 통하지 않았던, 냉전 수구 반공주의의 색깔론도 꺼내 들 태세다. 하기는 국가보안법도 여전히 살아있다.  동양의 옛 성현은 권력자들이 불의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을 정의라고 강변할 때, 그것을 불의라고 ‘바르게 이름 붙이는 것’, 즉 정명(正名)이야말로 정치의 ABC라고 설파했다. 정치에서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말(명분, 논설)은 정치만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 나아가서는 인륜까지도 오염시킨다. 더욱이 실제에 걸맞은 말을 쓰는 것은 사회적 약속이므로, 정략적 견강부회나 의도적인 ‘뻥튀기 공약(空約)’은 사회적 신뢰 자체를 파괴하는 악이 된다.  악을 보고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 악을 보고도 악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이다. 바보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는 바보가 아니라고 말하는 바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바보짓이다.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자명한 이치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정부”인 실제를 직접 보고 있는데, 현 정부가 표방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을 곧이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웬만한 외국인들도 다 아는 사정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인간을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고 규정했다. 진실, 정의, 올바름을 매도하고 배척하는 짓거리가 빈번해지고, 그것이 일상화되어 거기에 익숙해지면, 세상은 거짓, 불의, 모략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사고의 착란에서 벗어나 최소한 촉견(蜀犬)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말이 명실상부한 것인지-특히 권력자들의 말이 실제에 부합하는 말인지,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할 줄로 안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2-08-03 | hrights | 조회: 874 | 추천: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