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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이지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9-06 13:57
조회
1497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마천의 필생의 저작 사기(史記)의 화식열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대개 인간들이란 자기보다 재산이 열배 많은 사람은 그저 돈 많다고 자랑질이나 하는 하찮은 놈으로 시기하고 백배 많은 사람은 재산관리 잘한 분이 되어 두려워 하지만 천배나 많은 사람은 그 밑에서 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존경하는 사장님이 되고 만 배나 많으면 아예 내 생명 책임지소서 외치는 종이 된다”
 “[凡編戶之民 富相什則卑下之 伯則畏憚之 千則役 萬則僕 物之理也] 무릇 호적에 편입된 서민이라면 상대의 부가 열배면 자신을 비하하고 백배면 두려워하고 천배면 노역을 하려 들고 만배면 종이 되는게 사물의 이치다
- 사마천의 史記 중 화식열전 중에서”


 “감히”라는 말이 있다. 한때 유행했던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죄를 짓고도 딴소리하는 범인을 향해 네 놈이 다 드러난 죄를 보고도 이 판관을 능멸하느냐며 어디서 “감히”라는 말을 쓴 뒤 “여봐라 개작두를 대령하라”라고 호통 칠 때에 어울리는 말이다. 요즘 한국의 역사물에서도 이 말은 자주 등장한다. 도망갔다가 잡혔거나 말을 지독히 안 듣는 종놈을 꿇어앉히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양반님 네의 주요 레파토리이다. 네놈이 “감히” 어느 안전(案前) 이라고 어쩌구 저쩌구, 다음코스는 주리를 틀거나 멍석을 말거나 사약을 내리거나 아니면 능지처참을 하거나.


 시대를 거슬러갈 이유도 없이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감히”라는 말은 차고 넘친다. 잘 알려진바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회항시킨 그 사람도, 수틀리면 아무 놈한테나 쌍욕을 처붓고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던 그 사람의 엄마도 그렇다, 말대꾸한다고 또는 대답 제대로 안한다고 길 잘못 들어섰다고 운전기사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던 유명회사 회장님도 제 딴엔 거룩한 분노의 표출을 감행하며 내뱉은 말이 어디서 “감히”였을 것이다. “감히”의 백미를 제대로 극대화 시킨 자가 따로 있으니 위디스크 회장 양 뭐시기라는 자이다. 부하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맘껏 싸대기를 후리질 않나, 니뽄도 쥐어주고 생닭의 모가지를 후리라고 시키질 않나. 우리안의 닭들을 표적삼아 석궁 놀이를 시키지 않나. 그야말로 “감히”를 주억거리는 상전 놈의 위세를 단단히 드러냈는데.



사진 출처 - 구글


 화식열전으로 다시 돌아가자. 재산이 열배 많은 놈이 누구한테라도 “감히”라는 말을 썼다가는 귀가길 뒤통수가 온전치 못할 것이고 백배쯤 많은 사람이라도 뒷구녕으로 수군대는 소리에 귀가 간지러울 테지만 천배나 만배쯤 많으신 분들이라면 ‘채찍이든 돌멩이든 선택하시는 대로 맞아드리겠습니다’ 하는 게 인간의 심성이라는 것이니 목구녕이 포도청이라고 이렇게 얻어맞고서라도 살아야 하는 2000년 전의 시절엔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21세기 로봇이 종놈이 되는 시대에 명색이 사람인데 그렇게 얻어맞고도 사는 저 불쌍한 중생들은 도대체 어느 소산인가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가도.


 돈 많은 게 자랑을 넘어 神이 되는 시대이기도 하니 어쨌든 제로섬 게임의 사회, 의사는 환자의 돈을, 판사 검사 변호사 나으리들은 범죄자나 그에 피해를 본 아픈 사람들의 돈을, 이른바 사장님들은 노동자의 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남의 것 더 많이 빼앗았으면 염치라는 것도 좀 챙겨야 할텐데, 너도 나도 “감히” “감히” 외치면 돈 많고 염치도 없는 그들의 하찮은 분노는 누가 다 맞아줄 것인가.


 바야흐로 21세기는 민주주의를 꽃 피워야할 시기. 정당한 시민의 감성이라면 꽃 피워야할 의무가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감히” 라는 말을 썼던 혹은 쓰는 자들은 민주주의를 몰랐거나 민주주의의 땅에 뿌리내릴 자격이 없는 자들일 터다. 당연히 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제 민주주의의 시대에는 누구도 들어서는 안 되는 “감히”라는 말을 들었다. 청문회를 무산시킨 국회를 직접 찾아간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향해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감히”라는 표현을 쓰며 국회를 무시했다는 논평을 냈고 그 당의 원내대표도 “감히”라는 말을 쓰며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표현은 이렇다.


 “사학 투기 게이트, 사기와 불법의 조국 펀드, 그리고 특권과 반칙의 민생에도 모자라서 이제는 감히 이곳 국회를 .....”
사람이름만 바꾸면 그 말의 화살이 어디로 향할지를 모르면서 하는 언사였을까. 자랑스런 독립항쟁의 전통을 건국절 논란으로 희석시키고 평화의 목소리를 반공으로 몰아붙여 독재의 칼날로 사용했던 지도자를 숭배하며 숭고한 5.18과 6월 항쟁의 민주적 성과마저 훼손시키면서 급기야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찬란한 주역으로 국정농단을 서슴지 않았던 그 집단의 이력을 망각한 채 스스로의 과거를 고백한 것일까.


 그런 사람들에게 “감히”라는 말을 들으니 내가 다 기분 나쁜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 치열한 민주화의 투쟁 과정 속에서 공권력에 의해 알게 모르게 사라진 이들의 죽음에 눈과 귀를 막고 7.8.90년대 그 흔한 데모대의 행렬에 발길도 주지 않고 자기만 위했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흔적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감히”라는 말로 민주주의자들을 우롱하는 처사에 더 기분 나쁜 것이다. 그것도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 한자리들씩 차고앉아 찢기고 피 흘리고 죽은 자들이 만들어놓은 현재의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이용해서 상전 놈의 위세를 떨고 있으니 그저 오싹하고 또 오싹하기만 한 것이다. 돈이 천배 만배 많은 놈이나 땅콩 비행기 회사의 일가들이나 위디스크 양 뭐시기는 월급이라도 주면서 상전 노릇했지만 이 사람들은 내 돈을 국민 돈을 받아가면서 “감히”, “감히”를 외치고 있으니 참기 어려운 모욕을 느끼는 것이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