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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시민을 기원하며 (도재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4:57
조회
500
우리는 ‘비정규직’이란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는 언론보도를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다. 그들 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인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이런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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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이해하거나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들이 겪게 되는 좌절감을 어떤 것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정부는 비정규직을 시장체제하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이 중국 등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에서 이상만을 쫓아 비정규직을 보호할 수는 없다고 한다.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정도 보호하는 것도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즈음 같은 상황에서 기업에게 뭘 더 요구한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거나 뭘 모르는 얘기를 하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외국의 근로자들이 월 10만원의 급여를 받으면서 일하는 것에 비하면 한국의 비정규직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는다는 식의 계산을 해 보기도 한다. 이런 돈을 들이면서까지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만 해도 애국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부와 언론은 ‘시장(市場)’에 기대어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시장이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리가 시장경제질서를 택하고 있다고 하여 시장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정당화하거나 배척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일까? 시장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은 부당하거나 공허한 주장에 불과한 것일까?

정부나 언론이 간과한 것은 시장경제질서란 민주주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하게 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건강한 시민의 참여와 투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일부 기업이나 언론기관들은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선 선거의 결과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그들은 “사업을 잘 하기 위해서” 혹은 “경제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용서해 달라고 한다. 그들은 그 행동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을 지켜야 할 때만 민주주의를 떠올릴 따름이었다. 민주주의가 어떤 희생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애써 외면하였다. 극단적으로 얘기할 때, 민주주의라는 영역에 들어오면, 그들의 권리는 없다.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건강한 시민이다. 그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나 윤리, 질서를 이해하고, 사회의 현안에 대한 공론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다. 물론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전체와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는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시민은 자신의 힘으로 일하고 그 대가로서 생활한다. 그리고 하루 중 일부는 가족과 지내며 동네나 회사 근처의 술집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정치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활을 통하여 그들은 사회 전제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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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이러한 시민들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서만 그 민주적 정통성을 얻을 수 있다. 시민의 참여 없는 정부, 왜곡된 여론이나 힘에 의하여 형성된 정부는 정통성을 상실한다. 지금의 정부는 공공연히 참여정부라는 얘기를 떠들고 있다. 그런데 ‘참여’란 것은 개별 시민이 기계적으로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업이나 언론기관의 임원들이 정부의 각료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민이 제도 운영에 참여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시민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바라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참여가 민주적 정부의 유일한 정통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현실적으로 이러한 시민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는 사업장에서 소외되어 있고, 자신들이 행하는 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비정규직은 설령 자신이 그 일을 좋아 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종사하는 기업의 발전에 기여하였더라도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처지의 비정규직들에게 전체 사회의 공론 형성에 참여하라거나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고민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처사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근로자들 중 절반을 건강한 시민으로 육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 혹은 정부가 비정규직을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대우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시장(市場)’만을 이유로 비정규직 문제를 논의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이란 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참여하여 운용되는 것인 이상, 그것은 민주주의제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건강하지 않으면, 그 시장도 건강해 질 수 없다. 그런데 건강한 민주주의란 건강한 시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국민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우받고 그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때에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성장할 수 있다. 비정규직들이 자신들이 존엄하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다. 정부는 시장을 핑계로 자신의 임무를 방기해서는 아니된다. 정부는 경제를 정상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반인 민주주의를 유지·발전시켜야 할 의무이다. 민주주의가 없는 시장이라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학교 법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