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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내려라 (김대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4:43
조회
667
밤에 서울 하늘을 날아본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네온 십자가를 보았을 것이다. 예전에 일본 신부님 한 분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모습을 보고 한국 교회의 유례없는 성장을 꽤나 부러워하며 기독교가 한국 사회 속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물론 부끄러워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근래에는 신자 한 분이 요즘처럼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적이 없다며 한탄하는데 별다른 대답도 못하고 같이 안타까워하기만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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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종교계 내분이나 종교인들의 치부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연이어 접하게 되는 충격적인 소식들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들이 운영하는 스포츠신문의 자금 지원문제에 대한 의혹과 관련하여 투명성을 요구하자 많은 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어이없는 발언, 김선일 씨의 죽음을 두고 “그가 기독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한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의 망언, “동남아시아 지진해일은 이교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다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망언 등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것이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부산의 어느 사찰 경영권을 두고 벌이는 불교인들의 이전투구가 그러하고, 제약회사의 리베이트 수십억 원을 횡령한 사건으로 고발당한 지방 한 가톨릭병원의 비리 역시 같은 문제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남다르긴 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 축복까지 해주었던 저들이 근래에는 연합단체를 만들어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면서 극우세력의 나팔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급기야는 평화를 외쳐야 할 저들이 이 땅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자고 괴성을 지르기까지에 이르렀다.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하여야 할 본분을 저버리고, 불의에 분연히 항거하여 억눌린 이들을 도와야 할 현실을 외면한 채 기득권 수호에 앞장서는 교회들은 곧 무너질 바벨탑임이 분명하다. 그 휘황한 십자가라도 내려두면 좋겠다.

종교 간에 대립과 반목이 여전하고 구원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마치 종교 구성원들의 차지인 양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만 더해가는 것이 현실이지만, 사실은 고등종교 대부분이 이웃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그 본질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갖고 있다. 그들이 이웃과 세상에 대해 관심 갖는 근저에는 각 종교의 영성과 철학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사회운동이나 복지와 구별되는 고유한 자기 원칙과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기독교의 ‘사랑’이고 불교의 ‘자비’일 것이다. 그 사랑과 자비가 무의미한 구호가 아니라 진정 자기 철학의 소중한 한 부분이라면 세속의 노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천으로 증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비인간화의 혼탁한 시대에 종교인들의 책무가 더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7대 종단으로 구성된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발표한 ‘남아시아재난 극복을 위한 범종교적 지원방안 마련을 위한 공동결의’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지진해일 참사’에 대한 각 종단의 해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피해지역의 사회 현실과 종교적 상황을 존중, 종교 및 문화적 갈등을 야기치 않도록 노력하기로 했다”는 결의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자연생태계 보전을 위해 목숨을 건 지율 스님의 단식을 보며,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든 새삼 “이 시대에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되었다. 종교와 종교인은 언제 어디서나 성속을 불문하고 희망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미 정리된 진부한 주제이지만 아직도 현실에서는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신학적 주제로서의 교회론과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교회가 보여주는 괴리이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건물이나 공간, 종교예식을 위한 물건들의 존재여부 보다 신앙을 삶의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와 모임이며, 그 신앙내용을 증언하고 재현하는 종말론적이고 대안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종말론적인 긴장이나 대안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본질을 망각하고 자기 존재 유지만을 추구하면서 세속화 되어 온 것이 기독교 역사이다. 물론 끊임없이 이를 견제하고 처음 모습의 회복을 주창한 개혁세력들도 있었다. 어찌 기독교뿐일까.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종교의 변화과정은 본질과 현상의 모순을 극복해 보려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론조사 결과 삶이 팍팍해질수록 종교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삶에 지친 민중들이 아직은 종교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다. 종교가 세상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도 필요할 테지만 그것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종교와 종교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과 구별할 수는 없다. 21세기의 새 패러다임인 생명과 평화라는 도도한 큰 길 위에서 모든 종교인들이 초심으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대원 위원은 현재 성공회 서울교구 신부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