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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의 난민론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7-06 16:11
조회
1875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종, 종교, 민족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1951년 UN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하 난민협약) 제1조 난민 규정)


 우리말 ‘난민(難民)’은 영어 refugee의 번역어다. refugee는 ‘뒤로/반대로(re)’ ‘도망하다/쫓겨나다(fuge)’를 의미하는 라틴어 refugio에서 온 말이다. ‘반대편으로 쫓겨난 사람’이다. 그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은 ‘피난민(避難民)’이다. 전쟁을 경험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언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난민(難民)’이라는 애매한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다. ‘재난을 피해온 사람’이라는 말에서 ‘피한다’(避)는 동사를 쏙 빼고 나니, ‘난민’은 그 자체로는 알기 어려운 낱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한국인에게 난민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는 전혀 무관한, 그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위험한 외국인’이라는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피난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는 분위기도 커져가고 있다.


 난민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나 민족 단위의 재난(전쟁, 분쟁...)이 가져다준 결과이고, 정치적 폭력의 산물이다. 난민협약도 세계대전 이후 자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피난민들을 국제적으로 보호하자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물론 오늘날의 난민에는 기아로 도무지 살 수 없어서 좀 더 안전한 지대를 찾아 떠나는 경제적 이주민의 성격도 있다. 핵심은 피난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 체제 하에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국경’을 강화하면서 (피)난민이 타지역이나 국가에서 살아가기는 훨씬 어려워졌다. 근본 원인은 국가나 사회가 제공해놓고, 그 책임은 약한 개인이 떠맡고 있다. ‘너희 때문에 우리도 힘들다’며 아예 자기 나라로 발붙이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막으려는 흐름도 커지고 있다. 2015년 가을 터키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던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을 보며 안쓰러워하다가도, 정작 난민이 자국의 문제가 된다 싶으면 행여나 손해라도 볼세라 바로 외면해버리곤 한다. 한국은 다소 예외려나 싶었는데, 이번에 제주에 들어온 예맨 난민들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한국인의 53.4%가 난민을 반대한다는 7월 4일자 리얼미터 여론 조사도 있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왜 그런 것일까. 부모와 헤어질까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는 멕시코 이민자 아이 사진을 보며 미국의 비인간적 이주민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제주에 들어온 예맨 난민 또는 이주민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배타한다. 한국인 전쟁 포로가 타국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이야기는 마음 아파하며 듣다가, 한국으로 오려는 난민에 대해서는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 ‘카레이스키’를 억압한 옛 소련에 대해서는 분노하다가, 예맨 난민은 그저 돈을 찾아 온 가난한 나라 사람이라는 소문을 확산시키며 인종차별주의적 분위기도 강화시킨다. 이들 가운데 IS 대원이 섞여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기도 한다.


 보수 기독교인은 근거 없는 ‘이슬람 포비아’로 무슬림 난민을 잠재적 성폭행범이나 극단적 근본주의자 취급을 하면서 본국으로 송환하라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피난’의 기록인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으면서도 정작 난민 문제에는 관심이 없거나 자기감정을 기준으로 배타한다. 예수가 헤로데의 살인적 폭정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했었다는 성서의 기록은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외면한다. 그러면서 ‘난민 반대’라는 여론을 만들어간다. 종교도 개인의 편의에 따라 선택적으로만 수용하는 편협한 ‘자기신앙’으로 몰려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는 난민보호법이 있다. 세계대전을 겪은 뒤 1951년 유엔에서 난민지위에 관한 협약(Conventionan Relating to he Statues of Refugees, 이하 난민협약)이 발효되었고, 이 난민협약을 토대로 1967년에는 난민의정서(Protocol Relating to the Statues of Refugees)가 체결되었다. 한국은 1992년 12월에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따라 국제적 난민보호국의 대열에 동참했다. 법무부 산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규정을 신설한 뒤 2012년 입법 발효했고, 2013년부터 시행 중이다. 이 마당에 난민을 무작정 거부하는 것은 유엔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위배되며 국제적으로도 비난받을 일이다. 난민을 잘 가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만 남아있는 것이다. 단순히 여론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정치적인 결단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를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는 권리의 주체를 ‘국민’이 아니라 ‘사람’으로 바꾸고자 했던 청와대 헌법 개정안의 정신대로 난민심사위원과 잠정 수용시설을 대폭 늘려야 한다. 난민신청자 중에는 솎아내야 할 사람도 분명히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이들은 잘 가려내면 된다. 그 과정에서도 인권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저 돈의 논리로 처리하거나, 일종의 인종차별주의 혹은 알량한 문화적 우월주의가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삼한시대에는 일종의 제의 장소인 소도(蘇塗)가 있었다. 신성한 공간이어서 심지어는 도둑이 들어와도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범죄자조차 단죄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아무리 그런 신성함 같은 것이 다 깨져버린 시대이기는 하지만, 전쟁 통에 살기 어려워 낯설디 낯선 곳으로 목숨 걸고 온 난민을 내쫓으라고 청원하는 이가 더 많다니, 슬프다. 설령 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온 이주민이라 해도 그렇다. 가능한 한 같이 살면서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궁리를 좀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다 우리는 그렇게 비인간적인 지경으로 몰리게 되었을까. 우리가 피난민이었던 시절이 불과 반세기 조금 전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