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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지속 가능성'과 지속 가능한 '운동'(서상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6:23
조회
510
‘지속가능한 발전(개발)’이란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한창 운동의 다양한 조류에 민감하던 대학생시절이었다. 인권운동을 얘기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거론하는 것은 근래 들어 미래 우리의 후손들이 거닐 삶의 지형을 떠올리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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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되살려보면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들과 비정부 민간단체 대표들이 함께 한 가운데 열린 이른바 리우환경회의에서 '환경과 개발을 위한 리우선언'을 채택하면서 지구환경보전을 위한 기본원칙으로 설명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컸던 이들에게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때 이 개념이 내게 ‘가슴’으로 와닿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 몰락 후 이념의 푯대를 잃고 부유하던 소위 운동진영에 있던 이들에게 이 개념은 건강한 노동이나 삶을 위한 이론으로 다가섰다기보다 현학적 지식욕을 만족시켜주는 좋은 구실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코앞에 닥친 농촌활동 준비까지 보류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언급한 이러저런 책들을 섭렵했던 것은 그만큼 갈증이 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무지한 탐식의 결과 그나마 오늘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개념 한 덩이가, 거칠게 표현하면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것 모두가 과거, 그리고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책에서는 ‘다음 세대가 필요로 하는 여건을 훼손함이 없이 현 세대의 욕구에 부응하는 수준의 개발’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변증법적 사고에서 보면 하등 새로울 게 없는 귀결이었기에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을까, 이후 ‘지속가능’이란 개념은 당장 ‘삶의 지속’을 힘들게 하는 세파 속에서 옅어져갔던 것 같다.

새삼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예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찌됐든 지금껏 삶의 뿌리이자 전부라고 생각하며 이어온 이 운동이 ‘지속가능’할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자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물음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운동이랍시고 해온 것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놓여 있다. 이른바 소비자운동이니 무슨 권리운동이니 하는 ‘운동’이 팔리고(?) ‘운동권’이었던 게 ‘돈’이 되는 상전벽해의 시대를 살다보니 갖게 되는 혼란도 이런 생각에 일조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떠올려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닌 시기, 운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삶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지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이들 사이에는 ‘기분좋은’ 비장미 같은 게 흘렀고 웬만한 허물은 서로 덮어줄 줄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는 지금, 비장미는 둘째치고 운동이 운동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비애가 서리는 것은 괜한 기우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었으니 축하할 일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상품으로 내어놓기까지 한다는데 있다. 좀더 비싸게 팔리기 위해. 그러나 본질적이고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한 ‘상품화 과정’에서 드러난다. 더 잘 팔리는 상품이 되려다 보니 내용보다 포장이 우선되기도 하고 ‘경쟁’이 도입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를 닮아 있다.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운동’은 아예 배제하든지 철저히 억눌러야 하는 자본주의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한 인권운동가의 어린 아들은 장래 꿈이 제 아버지를 닮은 ‘인권운동가’라고 한다. 또 다른 인권 단체의 동지는 그런 아이의 아버지를 꼼수나 부리는 이라고 폄훼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과연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지 되묻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

학생시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던 이런 류의 구호도 ‘과연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는 자괴감으로 바뀌는 요즘이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우리가 해오고 있는 운동을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과장일까.

지금의 운동이 지속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을 최소한 우리가 물려받은 수준’으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 세대를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 자본 위에 눌러 앉아(그럴 수도 없겠지만) 그 달콤한 유혹을 향유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이 드리우는 그늘 속으로 더 깊이 나아갈 것인지.

 

서상덕위원은 가톨릭신문 기자로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