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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청산 대상이 된 과거사법 (김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5:34
조회
498
이만큼 민주화 되었다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민주화의 현 주소가 여기까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위법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 유가족 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입을 모아서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법을 제정하라고 수십 년 동안 목을 놓아 외쳐왔다.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를 자축하며 이번 임시국회 회기인 5월 3일에 과거청산법을 처리하였고, 시민단체 등은 과거사청산법을 차라리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고, 과거청산을 바래왔던 수많은 국민들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는 사이 입법안은 아름다운 합의와 타협, 상생이라는 꼬리표를 자랑스럽게 달고 악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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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3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대통령보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통령의 강력한 포괄적인 과거청산 의지 표명, 같은 해 12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과거청산 입법안에 대한 행정자치위원회의 공청회까지만 하여도 이제 비로소 해방 이후 단 한번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제 식민지 강점하의 친일 행위, 6∙25 한국동란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 이승만 독재부터 지속된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자행된 온갖 인권 유린과 국가 폭력의 해묵은 숙제를 풀고 화해를 위한 조치를 밟아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논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그런 바람은 부질없는 것이었고, 국민이 개혁을 위하여 뽑아준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여망을 짓밟고 “과거청산법”이 아닌 “역사왜곡∙은폐법”을, “국민화해법”이 아닌 “국민정쟁법”, “민주인사탄압법”, “신국가보안법”을 한나라당과 손잡고 만들었고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니 기가 막히고, 망연자실할 뿐이다.

통과된 법안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적대시하는 세력들에 의한 폭력과 인권유린, 테러, 학살, 의문사’ 등을 조사 범위로 정하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일개 조항에 불과하지만, 들여다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독소 조항이고, 악의가 꿈틀대고 있다.

과거 어두운 독재정권 치하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민주화 운동 내지 통일운동을 하였던 모든 진보 세력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덫에 걸려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자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이 땅에 이만한 정도의 민주화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민주화 운동 세력들을 다시 재조사하겠다는 것은 바로 민주인사를 탄압하겠다는 것과 동의어이며, 고문 등으로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국가 폭력의 진실규명에도 물 타기를 시도하겠다는 의지이며, 종국에는 조·중·동 등의 보수 신문과 손을 잡고,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켜, 해방 전후의 좌우 대립과 같은 국면을 조성하여 과거청산 자체를 무력화 시키려는 세력들의 음흉한 칼날이 숨어 있는 무서운 조항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부산동의대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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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리자 가족들이 법원 앞길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가 현실화 할 경우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법의 취지는 전혀 달성하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극심한 국론 분열과 대립만을 초래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청산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과거청산의 주체로 나서 칼을 휘두르는 꼴이니 어떻게 이법을 악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 법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서 예컨대, KAL기 폭파사건, 인혁당 사건,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건 등등은 아예 조사조차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으니 과거의 진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정작 조사해야 할 사건은 조사할 수도 없고, 이미 수없이 법을 악용하여 무차별적으로 처벌받아온 민주 인사는 조사를 하겠다는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닌 법이 아닌가.

더욱이 위원회의 구성을 여당과 야당이 나눠 먹기식으로 구성하고 있으니 각자의 정파를 대변하는 자들이 과거청산 기구의 주체로 들어와 정쟁만을 일삼을 것이고, 그 경우 진실 규명은 딴전이 되고, 독립성과 공정성, 중립성을 잃은 인사들에 의한 진실규명의 결과 또한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시민단체와 국민들도 받아들이지 않아 끊임없는 분쟁만 초래할 것이다.
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리자 가족들이 법원 앞길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과거청산의 대상이 될 대다수의 사건들은 조작, 고문 등의 의혹이 수없이 제기되어왔고, 작게는 십여 년 멀게는 백 년 전의 사건까지 포함되어 충분한 조사 권한이 확보되어도 진실규명이 어려운 사건들인데도 아무런 조사 권한도 없는 껍데기 권한으로 어떻게 진실을 규명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나의 이런 우려가 결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랬지만 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이 같은 우려가 곧 현실화 될 것으로 확신한다.

과거청산법의 악법 독소조항이 위력을 발휘하는 비극적인 현실이 된다면 이 법을 제정한자들 역시 과거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고, 법률 또한 청산이 될 것이다.

피 묻은 역사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반성하라. 이제 껍데기는 제발 물러가라.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