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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 생활 속의 몇 가지 오해와 다짐 (서상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6:50
조회
491
눈만 뜨면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기기들로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내심 위축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게 사실이다. 새로운 소식에 먼저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기자로서의 생리가 이런 처지에 당혹감을 더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른바 ‘괜한 걱정’에다 ‘사서 하는 고생’까지 더해서. 출근하면서, 출근하자마자, 쉬면서…. 틈나는 대로 각종 소식지나 인터넷을 뒤져야만 불안감을 털어낼 수 있는 신세는 간혹 ‘이러고 살아야 하나’하는 자문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디지털문화와 그것이 용해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일상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보와 그 양에 의해 평가받는 듯하다. (여기서 정보의 질은 그 다음 문제인 것 같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몇 전문가의 영역이다시피 하던 ‘저장 용량, 처리 속도, 화소…’ 등의 용어는 이미 어린아이들의 대화에서조차도 생소하지 않다. 따라서 이런 일상 속, 낯설지 않은 생활 속에 놓인 ‘허구’와 ‘부조리’를 놓치지 않고 살기란 갈수록 쉽지 않은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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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민감한 기자이다 보니 기록 매체를 둘러싼 허구적(?) 현실에 혀를 차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예로, 한계가 어디일 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지고 있는 카메라 화소수 경쟁만 하더라도 조금만 떨어져 살피다 보면 근본도 모른 채 ‘광고’라는 타자(他者)에 휘둘리는 군중들의 모양새를 어렵지 않게 발견케 된다.

‘폰카’(이제 이 말도 따로 설명을 달 필요 없이 대중화된 세상이다)를 애용하는 이들 가운데서 ‘이 정도면 쓸만한데’라는 자만심을 가지는 순간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되고 마는 세상. 그래서 이른바 ‘마니아그룹’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정보 세상을 휘젓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매달리는 화소수라는 게 일정 수준 이상이면 눈으로 봐선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화소라는 게 디지털 카메라에서 빛에 반응하는 필름 역할을 하는 반도체 센서(CCD 또는 CMOS)에 담긴 회로의 집적도를 말하는데, 사진의 화질은 이 화소와 함께 렌즈의 정밀도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소수가 아무리 높아도 렌즈가 따라주지 않으면 헛물만 켜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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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귀하의 탁월한 선택’이라는, ‘자존심’으로 포장된 ‘허영심’을 채우는 것으로 우리의 선택은 귀결되고 만다. 여기에다 ‘광고’를 통한 선택 행위가 수용자 자신은 물론 주위에 적잖은 귀감이 되는 양, 그래서 리더라도 되는 양 그럴싸하게 포장까지 하고 있으니 선택은 갈수록 쉬워지면서도 쉬운 것만은 아닌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이 구축한 독점적 질서(질서라 부르기도 뭣하지만)를 자연스럽게(?) 강제하는 파쇼적 기제를 ‘광고’ 속에서 읽어낸다면 논리적 비약일까.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다소 무식하게 비치더라도 먹고 사는 일, 책임져야 할 나를 둘러싼 환경에 당장 문제를 낳는 일이 아니라면 조금은 디지털세상에 무관심해지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무식한 듯 보이더라도 ‘손맛’과 ‘경험’에 의지하는 우직함이 값어치 있어 보인다.

이런 일탈(?)을 즐기다 보니 디지털이라는 ‘편리’를 외피로 내 속에 잠재돼온 파쇼적인 본질에도 눈을 뜨게 되는 요즘이다.

“그 또래라면 누구나 다 하니 너도 해보는 게 좋지 않겠어” “이번에 ○점 이상(누구는 그까짓 점수라고 할 지 모른다) 못 받으면 컴퓨터 못하는 거야”

말이야 부드럽게 하지만 얼마나 아이들을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떠밀어댔는지 돌아보게 된다. 부끄럽게도 너무 늦게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서 아이들에게 두 번 다시 이런 일로 용서를 청하지 않길 다짐하게 되는 요즘이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