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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인권의 품으로 (안수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5:22
조회
598
고등학교 때, 나는 정기적으로 서랍 검사를 당했다. 아버지가 주도하고 어머니가 거들었다. 덕분에 창간호 때부터 모아둔 몇 달 치 한겨레신문과 각종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기도 했다.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겨레신문을 ‘소장’하겠다는 욕구를 버리고, 가판에서 사서 읽은 뒤 학교 교실에서 여러 친구들과 돌려 읽었다. (그 시절, 대구에서 고등학생들끼리 한겨레신문을 돌려 보는 것은 ‘지하 유인물’을 읽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었다) 돈을 내고 사서 읽은 책은 다른 친구 집에 (녀석에겐 검열관을 자처할 아버지가 없었다) 맡겨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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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딱 하나 있었다. 시 습작 노트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 끄적거린 잡문 묶음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기억과 감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해도, 그걸 들여다볼 ‘특권’을 허락할 순 없었다. 거의 일주일마다 그 노트를 숨길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머리가 아픈 건 사실 두 번째 문제고, 이걸 누군가 읽어봤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참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시 습작은 대학교 졸업 학기를 끝으로 결말을 내렸고, 신문사 입사 이후엔 단 한번도 이 노트에 ‘신작’을 보태지 않았지만, 이 잡문 묶음은 지금도 내 보물 1호다. 그것은 일기를 대체했던 ‘월기’이자,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청(소)년 시절을 더듬을 유일한 자취다.

초등학교의 일기 검사가 초등학생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국가인권위의 판단을 둘러싼 논란을 보고, 나는 참 의아했다. 일기의 교육적 효과 운운하는 사람들은 어린시절, 거의 예외 없이 겪었을 일기의 ‘폐해’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렸음에 틀림없다.

의무에 불과한 일기 쓰기 때문에 한 달 전 날씨까지 기억해 내야 했던 일은, 어떤 이유를  더해도 그저 불필요하고 허접한 노동력 낭비다. 그런 일기는 글쓰기 능력 배양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과의 대화’다. 이는 단단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을 전제로 한다. (검사라 불리는) ‘검열’을 의식한 성찰이란, 아예 성립불가능한 말이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나 자신과 어떻게 대화하는 지를 이해한다는 의미다. 교사 또는 부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 시선에 맞춰 나를 포장하는 기술을 익힌 사람은 결코 ‘글’을 쓸 수 없다. 학교 숙제로서의 일기를 열심히 쓴 학생 가운데 훗날 본격적인 문필가가 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한 통계적 수치를 제시할 순 없지만, ‘경험적’으로 보자면 일기와 글쓰기는 결코 ‘길항’의 관계가 아니다. 검열에 익숙해진 세계관으로 ‘창조’를 도모할 수는 없다.

혹시 탈선이나 비행의 ‘조짐’을 일기를 통해 파악하려는 욕구가 ‘교육적 효과’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우선 어른들이 걱정하는 종류의 탈선과 비행을 (이런 단어 자체가 얼마나 ‘어른 중심적’인 말인가) 꼬박꼬박 일기장에 적을 만큼, 순진한 학생은 많지 않다. (학교 과제로서의) 일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충실하거나, (내밀한 개인기록으로서의) 일기를 쓸 정도로 자기와의 대화에 목마른 학생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일탈’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교육적 수단을 고려하자면, 그저 일기를 쓰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구분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일기 쓰기를 '적극 권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신과의 대화를 통한 성찰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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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레신문



 사실 일탈의 조짐을 발견해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철저하게 ‘범죄수사’의 관점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바라보는 행위다. 이런 방식이라면 차라리 거짓말 탐지기를 신체검사 때마다 학교에 들여와 정기적인 ‘바른 생활 점검’을 시도할 일이다. 그런 지경이 되면, 일기 쓰기는 이제 글쓰기와 성찰을 빙자한 국어, 도덕 교육이 아니라, 검열관 앞에서 적어 내려가는 ‘자술서’라는 본질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정상화를 조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결국 이런 교육적 효과에 대한 기대는 결국 다른 교육 수단을 통해 도모되는 게 옳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글쓰기 능력을 길러주려면, 책읽기와 독후감 등 ‘공식화’된 작문 수업의 활성화가 더 바람직하다. 청소년기의 일탈행동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손쉬운 자술서 검열 대신 어렵고 힘들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게 좋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기름을 다 빼고 난 다음에서야, 일기는 제 자리를 찾는다. 자신과의 대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기록. 그 안에 둥지를 틀고 나의 ‘자존’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인권운동의 출발이 스스로의 인권을 자각하는 일에 있다면, 인권교육의 강화는 ‘누구의 검열도 의식하지 않는 성찰적 대화로서의 일기 쓰기’를 권장하는 일에 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내 서랍을 뒤지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하셨다. 얼마 전에는 지방의 한 문학잡지에 ‘등단’까지 하셨다.  ‘운동권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자신과 대화하는 ‘성찰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신 듯 하다. 여기에 혹시 아들의 은밀한 기록을 들쳐본 경험이 긍정적 영향을 줬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들어 부쩍 ‘비밀’이 많아진 7살짜리 딸에게 내 ‘잡문 묶음’을 보여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너만의 세상을 일궈가라는 격려와 독려가 될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세상에서, 인권은 그 본래적 가치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다. 시 쓰는 할아버지는 시 쓰는 손녀의 습작노트를 뒤져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시 쓰는 일을 서로 대견하고 존경스럽게 여길 뿐이다. 일기 쓰기는 그렇게 자존을 향한 성찰,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인권의식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보내야 마땅하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