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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을 꿈꾸는 기자 (안수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7 17:59
조회
455
기자라는 인간들은 두 종류의 공상에 종종 빠져든다.

하나는 특정 사건이 지금 바로 내 앞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지금 타고 가는 비행기가 ‘공중납치’를 당한다면, 같은 상상이 대표적이다. 그 상상 속에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해피 엔딩’의 결과다. 그 과정에 ‘기자인 나’가 적극 개입한다.

드디어 한국 비행기를 테러 대상으로 지목한 이슬람 과격단체가 하필이면 내가 탄 비행기를 공중 납치했다.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나 혼자만’ 이 단체의 구성원들과 단독 인터뷰한다. 비행기 교신 등을 빌려 발아래에 있는 신문사 혹은 방송사에 독점 보도한다. 그 보도는 다시 전 세계로 퍼져 간다. ‘세계적 특종’이다. 게다가 ‘기자인 나’는 테러단과 당국을 잘 설득해 공중납치사건을 잘 마무리한다. 지상에 발을 내리자마자 나는 풀 스토리를 쓰기 위해 신문사 또는 방송사로 달려간다.

이 즐거운 상상을 깨트리는 결정적인 훼방꾼이 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을지도 모를 ‘다른 기자’다. 그러면 산통 다 깨진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을 싣고 가는 비행기가 공중납치당해 봐야 아무 쓸모없다. 아마도 대표로 뽑힌 기자가 인터뷰해서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고, 각 언론사가 거의 똑같은 보도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납치는 기자들이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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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상상은 특정 문서가 지금 바로 내 손에 들려져 있는 일이다.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인데, 예컨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한 미 중앙정보국의 수사 내용 일체가 담긴 기밀문서를 확보했다고 상상해 보라. 기자라면 이 문서 하나만으로 거의 한달 이상을 이리 쓰고 저리 써가며 세간의 관심을 끌어낼 궁리부터 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상상은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벼락 맞을 확률과 비슷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제 아무리 특종에 눈이 멀었다 해도 성수대교를 무너뜨리거나 삼풍백화점을 자빠뜨릴 힘이 기자에겐 없다. 천만다행한 일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 사회는 기자 수만큼 많은 대형사건사고를, 뉴스 보도 시간대별로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상상은 종종 현실에서 발생한다. 기자가 보도를 할 때 동원하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의 말이고 또 하나는 기록된 문서다. 많은 경우 두 가지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예를 들어 한 거물 정치인이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취재한다고 하자.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돈을 준 사람, 또는 돈을 받은 사람, 또는 돈을 주고받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다. 그러나 이런 증언은 다른 관련자들이 부인할 가능성이 높다. 공방 속에 사실 여부가 공중에 떠버리는 경우도 많다. 진술에만 의존하는 경우, 실체적 진실은 오리무중에 빠지기 십상이다. ‘황우석 사태’ 초기, 황우석 교수와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장의 엇갈리는 진술 사이에서 진실의 추는 좀체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따라서 기자들은 진술 말고 한 가지 더 찾아내려 한다. 예컨대 돈을 준 사람이 보관하고 있는 영수증, 돈을 받은 사람의 다이어리에 기록된 약속 메모, 돈을 주고받는 현장을 찍은 사진 등 ‘문서화된 증거’다.

대부분의 경우, 취재는 ‘진술’에서 시작해 ‘(문서 등의) 증거’ 확보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미 나의 수중에 해당 정치인이 누구한테 돈을 받았는지 꼼꼼히 기록한 개인 비밀 장부가 있다고 치자. 취재는 이미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장부가 통째로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만한 내부 관련자의 ‘진술’ 정도만 있다면, 흔들림 없는 특종보도를 할 수 있다.

특정 정치인이 한 정당의 내부 회의에서 대단히 폭발성 강한 발언을 했다고 치자. 같이 참석한 다른 정치인의 ‘전언’보다는 그 회의를 기록한 ‘속기록’이 보다 정확한 보도 근거가 된다. 아예 정부가 공인한 문서의 경우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기자들은 이 상상을 종종 실행에 옮긴다. 가장 일반적인 경로는 ‘내부자’로부터 그 문서를 얻는 것이다. 내부자를 잘 구슬리는 경우도 있겠고, 그 내부자가 먼저 언론사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이 정부기밀문서를 특정 목적을 위해 외부에 유출시키는 일에 대해선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특정한 이해를 위한 것인지, 양심적 내부고발자인지 등이 특히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따로 있다. 기자들이 직접 그 문서를 ‘구하는’ 일이다. 공공문서, 기밀문서 등을 내부자를 통하지 않고 구하는 방법은 딱 한가지다. 훔치는 것이다.(정보공개청구의 방법도 있지만, 여러 이유로 그 ‘실효성’이 적다) 요즘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80년대 및 90년대 초에 취재현장을 누볐던 선배기자들이 가끔 술자리에서 늘어놓는 ‘후일담’ 중에 이런 이야기가 꼭 들어간다. 검사실에 들어갔다가 마침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 ‘내사 자료’를 통째로 들고 와, 기사가 궁할 때마다 하나씩 터트렸다는 식의 무용담이 많다.

지금까지 들은 ‘최고의 도둑질’은 다음과 같다. 물론 실제 사례다. 전언이니만큼 약간의 ‘과장’이 섞였을 것이다. 한 유력 정치인의 뒤를 캐던 기획취재팀이 어느 대목에서 ‘막혀 버렸다.’ 그래서 그 정치인의 비밀개인사무실을 급습하기로 했다. 그 사무실의 소재를 파악은 했는데, 도대체 그 곳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은 ‘검사 사칭’이었다. 사무실에 우르르 몰려가서 신분증 비슷한 것을 제시했다. 압수수색 나왔다고 통보했다. 그 안에서는 대번에 난리가 났다.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관련 문서를 모두 문서 파쇄기에 밀어 넣었다. 밖에서는 또 문을 두드리면서 문서파기하면 더 큰 죄가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문은 열렸으나 대부분의 문서는 종잇조각이 된 상태였다. 기자들은 (화난 체 하며, 또는 실제로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남은 문서와 휴지통을 들고 나왔다. 파쇄된 문서를 이리저리 꿰맞추느라 아주 힘들었다는 게 그 일화의 마무리다. 공무원 사칭, 무단침입, 절도 등이  맞물린 범죄행위가 이렇게 기자들 사이에선 ‘낭만의 한 때’로 회고되기도 한다.

 

060614web01.jpg검찰 수사관들이 압수한 물품을 상자에 담아 나오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검찰이나 경찰의 휴지통을 뒤진 적은 있다. 가장 압권인 것은 대형 휴지통을 통째로 자동차에 싣고 일단 현장을 빠져 나온 뒤에 집이나 사무실에 가서 이를 뒤지는 일이다. 아무 것도 건져지는 게 없다면, 그 냄새며 뒤처리가 더 곤욕스럽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90년대 후반 한 언론사 기자가 검사실에서 문서를 빼오다 걸려서 기소된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엔 당연한 일이다. 취재과정이 취재결과를 규정한다. 불법과 탈법을 저질러도 용서되는 종류의 권능은 기자 아니라 누구에게도 없다.

일반적으로 이런 ‘절도’ 및 ‘사칭’ 행각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게 좋은 기자가 되는 첫 번째 덕목이다. 진짜 기자라면 그 정도의 취재윤리는 지켜야 한다. 그런데 진짜 기자가 답해야할 질문은 한 가지 더 있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사례에 등장하는 ‘도둑질하는 기자’들은 어떤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와 권력기관이 배타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어떤 정보들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도무지 시민사회에 알려지지 않는다. 민주주의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영역과 공간이 아직도 너무나 많다. 무심결에 검사실에 들어가 수사문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손버릇’이지만, 대형권력비리를 저지른 게 확실한 정치인의 사무실에 들어가 문서를 빼내오는 것은 ‘용기’일 수도 있다.

도둑질하지 마라. 국민의 알 권리는 기자들의 나쁜 손버릇을 합리화시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문구가 아니다. 그러나 도둑질해서라도 알려야할 진실이 있다는 점도 가슴에서 지워버리지 마라. 그런 근성과 용기가 없다면 기자도 아니다. 다만 그 행위에 대해선 기자 개인이 철저히 책임지고, 그 결과는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돌리는 게 옳다. - 이것이 내가 ‘많은 고민 끝에’ 정리한 윤리강령이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요즘 두 가지 문서를 훔쳐내는 상상을 한다. 첫째, 미군 기지의 대추리 이전과 관련한 한미 당국간 양해각서 및 이 토지에 대한 미군의 마스터플랜이다. 둘째, 한미 FTA 협상과 관련한 미국 및 한국 당국의 협상 전략 보고서 일체다. 그거 훔쳐 오면, 나는 ‘희대의 절도범’이 될 것이다. 아마도 한미 양국 모두로부터 기소당할 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두 쟁점 모두 순순히 곧이곧대로 취재해선 결코 실체적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과거의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왔겠지만, 현대의 권력은 ‘정보’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정보를 선택적으로 관리, 통제하면서 대중을 길들인다. 그걸 막으려고 언론이라는 게 만들어졌다. 그러니 정보를 관리 통제하는 이들의 의도에만 맞춰 이를 ‘전달’한다면, 언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 역시 그 별 쓸모없는 언론에 힘을 보태고 있는 듯 하여 송구하다. 도둑질하는 기자가 아직까진 필요하다. 결국 따지고 들자면, 윤리에도 계급성이 있다. 미국 백인 지배층의 윤리에 맞추느라, 한국 서민층의 윤리를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용기’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