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미국과 석유 (이재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7 17:50
조회
454
지난 2월 말 가족과 함께 1년 예정으로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생활도 이제 석 달이 다 되어갑니다. 낯설고 물선 이국 생활도 이제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미국생활에서 가장 불편했던 건 영어나 낯선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동차였습니다. 말이 안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어찌해볼 수 있지만, 차가 없으니 장보러 다니는 일이 정말 난감하더군요. 미국사람들에게 자동차는 신발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진짜 신발이 없으니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중고차를 샀습니다. 좀 오래된 차입니다만,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으로부터 거저 얻다시피 했습니다. 3000 CC 6기통짜리인데 지금까지 몰았던 차 중에 제일 배기량이 큰 차입니다. 제 발에는 큰, 미국사람 표준 사이즈 신발인 셈이죠. 한국에서였다면 휘발유값이 1천6백 원이 넘는 이 때에 공짜로 준다고 해도 엄두를 못 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긴 한국의 절반밖에 안되는 기름값 덕분에 그냥 끌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미국 기름값이 싸다고 합니다만 여기도 요즘은 기름값 때문에 난리입니다. 주유소의 가격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있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연일 고유가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 솔직히 ‘기름값이 올랐다고 해도 싸기만 한데 왜들 호들갑이지? 도대체 얼마나 더 싸게 쓰겠다는 심보인거야?’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기야 본래 없이 살던 사람들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차 없이 못사는 사람들이고 한 집에 서너 대씩 차를 굴리는 미국사람들에겐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이 정말 충격 내지는 거의 패닉 상황일 것 같습니다. 여기선 3천 씨씨 차는 기본이고 4천 씨씨 5천 씨씨 차들도 숱하게 굴러다닙니다. 오히려 소형차를 찾아보기가 어렵죠. 하여튼 여기 와서 놀란 것 중에 하나는 ‘왜 저렇게 덩치 크고 배기량이 큰 차들이 이리도 많을까’ 하는 거였습니다. 이들에게 자동차의 연비는 우선적인 고려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이렇게 연비가 나쁜 차의 대명사가 미군 군용트럭의 민수용 버전인 허머 H1입니다. 이 차는 미국 환경시민단체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었고 얼마 전 GM은 이 차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 아무리 기름값이 싸기로서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060524web02.jpg


막강한 성능을 자랑하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대명사로 통하던 ‘허머(사진)’의 대표 모델
사진 출처- 세계일보


이렇게 길바닥에 바가지로 기름을 퍼부으면서 달리려고 이라크의 석유가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이렇게 가다간 도대체 어디서 또 석유를 끌어오는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지도 궁금했습니다. 하여간 한국에선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피부로 팍팍 와 닿더군요.

그러다 보니 미국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들도 조금씩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이 차를 타고 다닐 권리는 있지만 이렇게 기름 많이 먹는 차를 굴릴 권리까지 있는가" 하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동안 석유를 너무 흥청망청 써댔다는 자성의 목소리들 말입니다.

요즘 하이브리드 자동차 광고가 많이 보입니다. 기름값 때문인지 이런 차들의 판매량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차들은 거의가 일제 차입니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덩치만 크고 연비 나쁜 차들만 만들다가 일본차에 밀려나더니 이제는 하이브리드카 시장마저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있다는 비난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자동차 휘발유뿐만 아니라 난방 등 민간부문의 에너지 소비량도 엄청납니다. 시카고, 보스톤, 뉴욕, 워싱턴에 이르는 미국북동부 지역은 미국 전체 난방에너지의 80%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이 지역의 겨울이 길고 추운 탓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들이 단열처리를 하지 않았고 또 가장 값비싸고 비효율적인 전기에 의한 난방방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솟는 기름값은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석유가 없어서 미국 주요 인구밀집 지역인 동북부에 난방이 안 된다?? 이건 진짜 국가비상사태죠.

이런 고유가 행진이 계속된다면 - 당연한 수순이지만 - 얼마 안 있어 미국에서도 에너지 절약 운동이 펼쳐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석유를 더 확보하는 문제는 아무리 미국의 패권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라크 전쟁처럼- 맘대로 되지도 않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죠. 국내적으론 기름값에 걷는 세금을 깎아 줄거냐 말거냐는 논쟁도 있습니다만 이런 세금정책이 석유를 더 생산해내는 것도 아니죠.
 

060524web03.jpg


사진 출처- 쿠키뉴스, AFP



오늘 라디오에서 한 전문가는 이런 애길 하더군요. '이제 미국이 석유를 더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석유 없이 살 수도 없다. 문제는 미국인들이 지금까지의 석유 소비행태를 바꾸는 것이다'라구요. 지금까지처럼 흥청망청 쓰지 말고 아껴 쓰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죠.

'아껴 쓴다'... 그것도 '석유를' 아껴 쓴다... 미국사람들에겐 참 생소한 단어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에너지 정책은 석유를 싼값에 확보하는데 있지 절약하는데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미국은 전 세계 석유소비량의 4분의 1이나 되는 일일 2천만배럴의 석유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에너지는 41%정도(단순하게 계산해도 약 8백만 배럴-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1일 산유량에 버금가는 양이네요. 이 정도면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나요?)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3분의 2가 소비하는 양과 맞먹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방 재정적자보다 두 배나 되고, 국방예산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더 많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보다 국내에서 에너지 절약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것이 오히려 남는 장사라는 거죠. 전쟁을 안 해도 되고 그 돈을 경제에 투자하면 경기도 살리고 환경도 지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아니 이게 당연한 일의 순서죠.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전문가가 방송에 나와서 ‘석유를 아껴쓰자’고 한다면 '하나마나 한 말씀 캄사합니다'하고 흘려버렸을 텐데 여기 미국에선 이런 하나마나한 말씀이 정~말 '지당하신 말씀'으로 들리더군요.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