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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개운치 않았던 금강산 관광 (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1 12:06
조회
565
지난 주말 금강산에 다녀왔다. 백두산에는 가 본 적이 있지만 금강산은 처음이었다.(운이 좋아 백두산은 북한 쪽과 중국 쪽 모두를 가봤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금강산은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버스로 이동할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북녘 주민들의 남루한 모습은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만 느껴졌다. 2년 전, 처음 평양에 갔을 때처럼 가슴을 누르는 고통은 없었다. 그때는 음식을 남길 때도 죄스러웠는데…. 일부러 모른 척 한 것인지, 세월이 흘러 심드렁해진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금강산에 간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설악산에 간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비행기를 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관통해-휴전선을 뚫고-북으로 넘어간 것인데, 이리 무덤덤할 수 있다니.

무심해진 것은 나만이 아닌 듯 했다. 마을이든 산이든 어딜 가나 눈을 찌르는 붉은 색 ‘선전문구’에 대해 남쪽 관광객들은 무척 관대했다. 현대아산 소속의 가이드는 잘 보이지 않는 선전문구까지 일부러 가리키며 내용(‘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와 같은)까지 친절히 주워섬기는 것이었다. 남쪽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선전문구가 아니라 일종의 유물 혹은 관광 상품이 된 것 같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바르르 떨던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는데.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 것은 2년 전과 다름없었다. 먼저 버스로 이동 중 촬영금지. 북한 당국은 카메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입국 심사 때 카메라는 별도로 꺼내 심사를 받아야 했고, 일정 규모 이상의 줌 기능이 있는 카메라는 갖고 들어갈 수 없다. 관광객이 이동하는 길가에는 군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는지를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예전엔 200m 간격으로 촘촘히 서있었는데 요즘엔 비교적 헐거워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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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선전문구
사진 -  이재성(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벌금’이었다. 입국할 때 나눠주는 방문증(관광증)이 있는데, 이 카드를 구기거나 볼펜 자국을 내거나 하면 10달러의 벌금을 내야했다. 카드에 기재된 이름이 틀려서 고치려다 벌금을 문 사람도 있다고 했다. 찍은 지 6개월이 넘는 사진을 제출했다 걸려도 10달러, 줌 기능이 좋은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다 걸려도 10달러였다. 등산을 할 때도 가이드를 추월해서 앞으로 나가면 벌금감이라고 했다. 일행 중에는 합법적 ‘삥뜯기’라며 기분 나빠하는 이도 있었고, 이 정도면 ‘애교’라며 기부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겠다는 이도 있었다.

마지막 날, 해금강에 들렀다 삼일포-어떤 왕이 하루만 놀고 가려고 들렀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삼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삼일포라고 했다-에 갔을 때였다. 앞서가던 동아일보 기자가 내 신분을 말했는지, 북쪽 안내원이 아는 체를 했다. ‘기지’ 바지에 운동화, 점퍼를 입은 전형적인 북쪽 남자였다.

 

 “한겨레신문사에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네다.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우리 수령님(인지 장군님인지 잘 안들렸다)을 칭송하는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잘 안 들린다고 했더니 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말해줬다.

 “아, 네. 칭송은 아니구요, 북쪽을 바로 보자는 거죠. 그동안 너무 왜곡된 시각으로만 보아왔으니,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대화가 한 번 삐끗했다. 북쪽 안내원이 다시 물었다.

 “금강산에는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그럼 금수산기념궁전은 가보셨습니까? 우리 수령님 계시는.”
 “아니요, 거긴 못 가봤고, 만경대는 가봤습니다.”
 “아 그렇습네까? 만경대 고향집에 가보신 소감이 어땠습니까?”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그렇죠.”

 안내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을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속에 없는 말은 잘 못하는 성미인지라.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일행들이 북쪽의 여자 안내원을 졸라 노래를 하게 한 것이다. 올망졸망 예쁘게 생겼는데, 두 볼이 발그레해지며 쑥스러워하면서도 노래를 잘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가이드가 “정상에 올라가면 반드시 안내원에게 노래를 청해서 듣고 오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정상에 올라가보니 바로 이 안내원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거기서도 관광객들을 상대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를 듣고 내려가는데 뒤에서 이 안내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한겨레 기자 선생, 저랑 같이 가지 왜 먼저 갑네까?”
 “아 그럴까요? 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까?”

  농담은 묵살되고 질문이 돌아왔다.

 “금강산은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평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네까?”
 “넓은 들판이요. 넓어서 거칠 게 없으니 좋더라구요.”
 “아니 뭐 가본 데가 있을 거 아닙니까?”
 “만경대도 가보고 개선문도 가봤습니다.”
 “만경대를 보신 소감이 어땠습네까?”

 앞의 대화와 패턴이 비슷해서 살짝 짜증이 났다. 똑같이 대답했다.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뭐 그렇죠.”
 “만경대에서 xx(잘 모르는 단어였다)를 보셨습니까?”
 “아니요 기억이 안 나네요.”

 역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때 다른 누군가 끼어들어 대화는 잠시 중단됐다. 그 사람이 xx를 안다고 하자, 안내원이 나를 타박했다.

 “아니 한겨레신문 기자가 만경대에서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까? 강정구 교수께서 만경대에 가서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고 썼다가 구속이 되셨는데, 기자 선생은 그럼 강 교수와 다르다는 겁니까? 진보적인 신문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다르지요. 진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닙니다. 같다 다르다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강정구 교수의 구속에 반대한다. 그의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와 생각이 같지는 않다. 대충 그런 요지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대화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졌다. 그는 조선일보가 밉다고 했고,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신뢰감을 표시했다. 나는 중앙일보의 한계에 대해 말했다. 그러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지점에 다다르자 그는 “아까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며 “우리 힘 모아 조국 통일을 위해 힘쓰자”고 말했다. 나는 “다 이해한다”고 했다.

버스에 올라타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같은 ‘종교’임을 확인하고 위로받고 싶어 했던 것일까?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해서 (맹신이라는 의미의) 종교가 되었을까? 세계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사회주의를 이처럼 종교로 만든 사례가 있던가. 마오쩌둥의 중국이든 호치민의 베트남이든 카스트로의 쿠바든 내가 아는 그 어떤 사회주의 국가도 권력을 세습하거나 종교화하지는 않았다. 왜 북한에서는 귤이 탱자가 되었을까? 맹목성은 우리 민족의 특질인가?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벌도 세습하고, 교회도 세습하는 나라. 역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광신적인’, 그리고 격렬한 반공투사로서의 한국의 기독교. 북한의 사회주의와 남한의 기독교는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서북청년단이 남한 기독교의 뿌리라지만, 어쩜 그렇게 극과 극으로 닮을 수 있는지. 몰아의 경지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이성을 잃는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다. 절대주의는 힘이 있지만 배타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조선일보는 탈북자 출신이 만든 <요덕스토리>라는 뮤지컬을 수 십 차례에 걸쳐 대서특필해 억지 흥행을 시킨 바 있다. 그 뮤지컬을 보면서 나는 착잡했다. 뮤지컬을 만든 탈북자들이나 그걸 꼭 봐야한다며 대서특필하는 조선일보의 유아적 비명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북쪽의 인권현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다. 폭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아니, 폭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쪽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안쓰럽지만 남북관계나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당장 쳐들어가서 북쪽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부 극우파들의 주장을 논외로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며 탈출을 감행한 탈북자들의 절박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해져야 하는 것 아닌지.

금강산이든 개성공단이든, 더디고 어렵지만, 그것이 통일로 가는 유일한 접근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등산할 때 가이드 신경 쓰지 않고 내 속도에 맞춰 가고도 싶고, 북쪽 주민들과 어울려 사진도 마음껏 찍고 싶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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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요덕스토리'의 한 장면
사진 출처- 한겨레



 사회주의가 한번 흥했다 망했고, 세계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각종 부작용이 생기고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사이클로 치면 몇 바퀴는 돈 상황인데, 우리의 지적 수준은 60년 전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또다시 불러 죽고 죽이는 칼부림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