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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처음부터 “황까”였지? - 이분법적 논리 속에서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에 관하여 (서상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1 11:22
조회
408
황빠’ 바람이 한창 기세를 부리고 있던 당시 필자는 필자가 속한 신문사 덕분에(?) 예기치 못한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다. 이른바 “너 ‘황까’ 아냐?”하는 시선이 그것이다. 물론 그런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소지는 다분했다. 세상이 다 ‘배아줄기세포’의 유용성에 대해 확신을 넘어선 신앙으로 한 방향으로 쏠려 가고 있을 때 필자가 몸담은 신문사는 일찌감치부터 ‘배아도 생명이다!’는 깃발을 내걸고 싸움도 되지 않을 법한 전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1년여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우석 교수나 그의 오른팔이라는 안규리 교수를 웃으면서 만나던 처지였으니 그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로 다하기 힘든 것이었다. 신문사 사옥에 ‘황우석 교수님, 힘내세요!’라고 쓰인 대문짝만한 플래카드마저 내건 타 종단 신문 기자를 만나도 웃음을 주고받기가 서로 머쓱해서 인사 한 마디 없이 지나치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런 ‘황빠’ 바람이 태풍이 되어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동안에도 필자의 뇌리에는 희미하게 보일망정 결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스러졌다 생겨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은 막연한 희망이라기보다 다른 의미의 ‘의지’였던 것 같다. 과학적 지식이나 여론의 흐름 등을 감안할 때 필자는 그런 대세에 영향을 줄만한 어떤 힘도 없었다. 가깝던 지인마저도 당신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며 조금만 더 멀리 내다보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해올 땐 비참한 생각마저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필자가 속한 신문사는 속칭 ‘황까’ 논리가 분명한 내용을 담은 신문을 찍어내는 걸 무슨 사명감으로까지 여기고 있었다. 당연히 신문사 홈페이지나 관련 사이트들은 ‘너희들 ○○○와 한 통속 아니냐?’는 투의 댓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이런 흐름은 하루 이틀 새 ‘두고 보자’식의 협박성(?) 말투로 바뀌기 십상이다. 무수한 말과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이 난무하는 속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지니고 하루하루를 넘긴다는 건 무척이나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그 짜증은 익명을 대하는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보인 전반적인 가벼움, 나아가 타인의 인권이라고는 차분히 생각해볼 대상도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니 이른바 ‘황우석 신화’가 어처구니없는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너 처음부터 ‘황까’였지?”하는 반인권적이고 이분법적인 재단이 여전히 기세를 올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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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한겨레



다행히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통해 거짓으로 가득 찬 ‘신화’가 미망임이 드러났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희망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이런 희망에 더해 이제는 이 거짓된 신화가 준 교훈을 철저하게 규명하고 배워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대세에 휩쓸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는 않았나’ ‘진실에 애써 눈감으려 하지 않았나’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 하고 있는지 않나’….

이번 사태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홍역을 치르고도 면역력을 갖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애초부터 ‘황까’는 아니었던 필자가 보기에 ‘황우석 사태’는 객관적인 검증과 평가 시스템의 필요성 등 많은 교훈들을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생명에 대한 경시와 인권에 대한 무지에 있다고 본다.

배아 연구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으로 인해 인간 배아의 생명권은 아예 고려의 축에도 들지 못했고, 우려되는 부작용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은 채 무지막지하게 난자를 채취함으로써 여성 인권을 묵살했는가 하면, 연구 성과를 부풀려 난치병 환자들에게 허망한 기대를 갖게 함으로써 다시 한번 인권을 유린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무시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이런 모습은 결코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소수 과학자들만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두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동조한 정부와 언론,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침묵한 과학자들, 비판적 성찰 없이 국익과 경제적 논리에 눈이 멀어 무조건적 지지를 보낸 모두가 공동 책임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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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쿠키뉴스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사태가 우리 사회가 지닌 가벼움을 돌아보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인간 생명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착각을 착각인지도 모르고 있던 적잖은 이들을 깨어나게 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배아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이란 사실만은 착각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한때는 배아였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 때문에 종국엔 필자도 의도하지 않게 ‘황까’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