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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억울한 죽음이 없어야 - 전문성도 독립성도 없는 한국의 검시제도 (정 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5-31 17:35
조회
410
“핏자국은 남아 있지 않군요?”, “벌써 닦아 냈을 수도 있겠지. 루미놀 반응이 있나 살펴보자구.”. 닉이 루미놀 용액이 들어있는 스프레이를 실내 구석구석에 뿌린다. 잠시 후 마루바닥이 반딧불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바로 저기군, 남아 있는 혈흔에서 샘플을 채취해봐야겠군.” 그리섬 반장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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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I 과학수사대라는 미국 외화시리즈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다. 갑자기 무슨 미국 외화시리즈를 이야기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순위에 감식전문가, 법의학자를 당당히 진입시킨 1등 공신이 바로 위 드라마 시리즈이다.

하지만 우리 초등학생들이 장래에 그리섬 반장 같은 멋진 감식전문가나 법의학자가 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현재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특히 법의학 관련 분야는 우리와 소득 수준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추어 볼 때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법의학 발전 정도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다음 세 가지 정도를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의 검시는 사법검시에 편중되어 있다. 검시의 책임을 검사가 지고 있기 때문에 변사체 중에서 범죄와 관련이 있거나 그러할 우려가 있는 시체에만 부검이 실시되고 있다. 따라서 범죄와 관련성이 적다고 판단될 경우, 국민보건 정책 수립이나 각종 사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이 필요한 경우에도 사인확인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또한 법의학적 전문지식이 부족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범죄와 무관하다는 판단을 할 경우 실제로 범죄와 관련이 있는 죽음도 부검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은폐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선진국의 경우 의혹의 소지가 있는 죽음을 유형화하여 해당 유형은 반드시 부검을 실시하도록 정하고 있다(예: 15세 미만 양자가 사망한 경우, 교도소 등 구금시설의 재소자가 사망한 경우 등).

둘째, 검시에 관여하는 사람의 전문성이 부족하다. 검시의 책임자인 검사, 실제 집행자인 사법경찰관, 변사체에 대한 검안과 부검을 담당하는 의사 모두 법의학에 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선진국의 경우 법의학에 관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자는 검안이나 부검에 관여할 수 없도록 정해져 있는 것과 대조된다. 만약 장준하 선생의 사망 당시 전문성을 갖춘 의사가 부검을 실시했다면 적어도 사인에 관하여는 지금과 같은 논란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해마다 군대에서 발생하는 의문사 역시 검시에 관여하는 군의관의 비전문성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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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검시기관의 독립성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의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상당수 행해진다. 국과수는 행정자치부 산하기관으로 설치되어 있지만 운영과 감독을 경찰청장이 수행하므로 사실상 경찰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못하다. 이처럼 수사기관에 종속된 기관이 검시를 행하는 결과 수사결과의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 특히 부검에 있어서는 사체에서 얻는 정보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얻는 정보가 사인을 판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현장의 단서를 경찰 등 수사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사인에 대한 판단이 왜곡될 우려가 크다. 그래서 선진국의 경우 법의학 전문가가 변사현장부터 참여하여 관련증거물을 주도적으로 수집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사인확인제도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지만 그동안 충분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 원인을 밝히려는 것 자체가 망인에 대한 결례가 된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의식도 원인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2003년 12월「사인확인기관의 설립ㆍ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하여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최근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유시민 의원 등 143인이 발의한 「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 범위 확인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계류 중인 상태다.  위 법률안이 통과되어 우리나라 사인확인제도 개선의 기틀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CSI 과학수사대에 흥미를 느낀 분이라면 ‘여검시관 히카루’라는 만화를 읽어볼 것을 권유해 본다. 아래 내용은 만화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노숙자가 아이를 익사시켰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망한 사건에서 검시관 히카루는 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재차 부검을 시도한다. 그녀는 집도하기 전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아저씨, 마모루 아저씨 용서해주세요. 전 진실을 알고 싶어요. 아프지만 한 번만 더 참아주세요”. 사인확인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바탕에 두고 있다. 우리의 사인확인제도가 개선되어 억울한 죽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기원한다.

 

정 원 위원은 법무법인 지평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