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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단상 (김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7 17:57
조회
430
무엇인가를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가슴이 설레는 일이다.
조금은 흥분되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것은 기다림에 대한 희망의 꽃망울이 숨 쉬는 소리와 같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런 설렘과 기다림의 흥분된 마음이 아니라, 참으로 답답하고 벽에 갇혀 버린 듯 한 실존적 상황으로 보인다.
가슴이 아리고, 고통스러워 손을 내밀 때, 옆에서 그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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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손잡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참여 정부는 한˚미 FTA를 빠른 시간 내에 체결하겠다고 발표하였고, 협상이 개시되는 시점에 서있다.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점에 서있는 행동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5천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우리 사회의 기축을 이루어 온 농민들의 가난과 몰락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데, 일부 언론들은 홍콩에서의 시위를 거론하면서 미국에서 우리 농민들의 폭력 과격 시위가 걱정된다고 친절한 금자씨처럼 걱정(?)하고 있다.
농민들은 이 시대의  소수자가 아니고 다수자이다. 비정규직 문제도 소수자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중요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다수자의 문제다.
그런데 이들이 손을 내 밀어도 아무도 그 손을 잡아 주지 않고 있다.
이들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이대로 아무것도 없다면, 결국 이들이 ‘친절한 금자씨’처럼 복수를 하지 않을까
과연 어떤 복수가 나올까
다수이면서 사회적 약자인 이들을 구해줄 기다림은 무망한 것인가

평택 미군기지 확장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처절하게 외치고 몸부림 쳐도 아무런 메아리가 없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는 그 의지와 맹세는 어디로 가고, 지금 무엇을 하자는 것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으로 동북아 문제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어디든지 침략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문제를 놓고서, 국민의 동의도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농민들의 땅을 강제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부치는 형식적 법치국가의 오만이, 나 스스로 법조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법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와 미래의 문제이다.
땅을 수용당하고 반발하는 농민들의 숫자가 별로 안 되니 그냥 지극히 소수자의 저항이라고 치부하고 말 것인가.
1,400여 년 전 외세를 끌어 들인 신라는 삼국 통일 후, 온 국민과 함께 힘을 모아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몰아내는 역사를 이룩하였고, 내가 이것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배웠던 것은 한낱 꿈속의 자장가였단 말인가
평화와 자주 국가의 기다림은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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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시각 장애인들의 안마사 자격문제가 평등에 어긋난다면서 위헌 결정을 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결정이다. 길이길이 헌정사에 남을 자랑스러운(?) 결정이로다.
한비자는 ‘동냥은 주지 못해도 쪽박은 깨지 말라’고 몇 천 년 전에 말했다.
그래 그렇게도 시각장애인들이 자신의 거의 유일무이한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안마사의 자격이 그렇게도 큰 떡으로 보이던가.
그토록 힘없고, 오고 갈데없는 약자들을 위한 배려의 미덕이, 지고지순한 평등의 원칙으로  승천하니 이 땅에 힘없는 사람은 전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없어진다.
시각 장애인들이 한강에 뛰어드는 장면이 무엇을 웅변하고 있는지 우리는 보고 있지 아니한가.
절대적 절망은 거꾸로 희망의 싹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암울함이 나의 시간과 공간에 절어 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대학 후배들에게 법을 강의하면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힘주어 나 자신에게 스스로 암시하면서 말해보지만 그것도 위선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은 것은 왜 일까
기다림이 이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 거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