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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소송 (이재승)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1:47
조회
522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주 국정농단사태에 대한 국회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가 단연 돋보였다. 특히 주무부처 장관이 블랙리스트를 전혀 모른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실세들도 블랙리스트의 작성이나 운용이 불법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천만 다행이었다. 존재하는 블랙리스트를 대통령인들, 장관인들 어찌하겠는가! 무려 1만 여명에 육박하는 문화예술인 명단이 누구의 발상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구체화되고 확장되어 갔는지를 특검이 촘촘하게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아마 이러한 유형의 정권이 향후 10여년 정도를 더 집권하게 된다면 동독의 쉬타지 문서처럼 몇 백만의 시민이 요시찰대상자명부에 등재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인류역사에서 삐딱한 학자나 문화예술인들을 좋아하는 권력자는 없다. 권력자들은 정권을 비판하는 작품을 금지하거나 그 영향력을 깎아 내리려고 애를 쓴다. 블랙리스트나 금서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작품 경향에 대한 분석과 판단이라는 지적인 수공예작업을 전제한다. 그런데 작품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시국선언이나 야당후보의 지지선언에 동참한 것만으로도 리스트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에서 권력집단이 통치의 열성에서 너무 불성실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특히 정보화 사회에서 명단을 인터넷에서 쓸어 담았으니 권력자들이 통치하기가 쉬운 세상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명박 정권 아래서 국방부의 불온도서 사건은 어떠했는가? 무자격의 국방당국이 제멋대로 휘둘러 인문사회도서를 불온도서로 지정하였음에도 헌법재판소는 이를 합헌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타락한 권력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작품이나 학술도서를 직접적으로 통제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리스트를 만들어 합법과 불법의 중간영역에서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성향의 집단을 배제하는 것 같다. 더구나 처음부터 대놓고 배제하면 표가 날 것이고, 실상을 아는 당사자가 드잡이를 할 여지가 있으니 적당히 끼워주었다가 배제하는 수법을 취한 모양이다. 그러한 냉탕과 온탕의 방식이 비판적인 예술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데에 가장 효과가 크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실세들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일관되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블랙리스트의 작성 또는 운용을 정책 범죄(crime of policy)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신 정권은 한수산, 김지하, 남정현, 현기영 등 비판적인 작가들을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불러와 개처럼 두들겨 패는 등 적나라한 폭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제는 작가를 더 이상 팰 수 없기 때문에 국가적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지원사업에서 배제하기로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책 범죄는 정부가 일정한 사업 분야에서 재량을 갖고 있다는 명분 아래 신청자의 정치적 성향을 사업수행자격과 부당하게 결부시키는 결정이라고 보면 된다.


문화예술인에 대한 이러한 방침을 통해 볼 때 지난 10년 동안 운영된 모든 정부지원사업에서 예컨대, 정치적 현안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들의 신청사업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본다. 학술적 고위공직은 이미 정치적으로 특정한 성향을 보인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그 아래 다양한 평가단계들이 제대로 설계되어 온당하게 진행되었다고 믿기 어렵다. 정권교체 이후에 이러한 심사과정에 관여한 학자들과 그들의 평가진술에 대한 분석과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만적 학술활동과 과학적 사기를 통해서 천문학적 예산을 낭비하게 한 세력들에게 법적인 응징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에 도처에서 날뛴 크고 작은 괴벨스들을 찾아내야 한다. 전국의 국립대학교 총장 임명에 정부가 멋대로 순위를 바꿔 임명하거나 심지어 수년 째 임명을 거부하는 일도 있으며, 이 과정에서 권력의 실세들이 개입하였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20170104095518872170.jpg사진 출처 - 노컷뉴스


여기서 블랙리스트의 본질과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블랙리스트의 작성은 권력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피아를 식별하는 것이라면, 블랙리스트는 그 식별의 결과물이다. 아마도 정치가 적과 동지의 구분에 입각한 투쟁이라고 한다면 모든 조직 또는 권력은 잠재적으로도 누가 벗이고 적인지를 가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문제는 현실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악의 무리로 상정하고 그에게서 시민으로서 향유해야할 기회를 부당하게 박탈할 수 없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를 취업금지자명단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역사에서도 몇 가지 사례가 떠오른다. 전두환 신군부는 80년대에 언론을 강제로 통폐합하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에게 재취업의 기업을 봉쇄하고자 언론인리스트를 작성하였다. 유신시대 이래로 노조활동 관여자나 해직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막았던 노동자리스트도 기억해야 한다. 1990년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은 국군보안사령부가 명부를 작성하여 정치인이나 운동권에 대한 사찰을 지속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한국에서 리스트는 취업을 방해하거나 정치인의 일상을 감시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6.25전쟁 중에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나 예비검속에 따른 민간인 학살도 명부가 그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총괄적인 명부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정치사회에는 다양한 위험원인에 대한 다양한 리스트가 존재해야 한다. 예컨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의심할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리스트는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 수없이 많은 심각한 범죄나 테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정부는 무능한 조직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일반적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고 그러한 한도 안에서 정부와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고 해서 이들을 블랙리스트에 기재하는 것은 심각한 불법이다. 블랙리스트는 적법한 권리행사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블랙리스트의 작성만으로도 범죄에 해당한다. 이러한 명단에 입각하여 지난 몇 년간 문화예술사업을 설계하고 운영했다면 국운쇠락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보아야 한다.


블랙리스트의 작성 및 운용과정에 관여한 모든 공직자들을 상대로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문화예술인들이 집단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차제에 국민의 이름으로 불법적인 권력농단을 더 이상 국가행위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건에 연루된 공직자, 대통령에서 문체부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모든 재산을 책임재산으로 삼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공직자에게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자행하려면 자신의 직위와 재산까지도 모두 걸어야 한다는 점을 학습시킬 최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